소현세자는 조선 왕실의 지도층으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사람이었음이 틀림없다.
청나라에 그만큼 모욕을 받았으면서도 그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들 것을 철저하게 배워서 조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청나라에 굴하는 것으로 보이더라도 그들 것을 배우지 않으면 결코 청나라를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다. 배청이 아니라 친청으로 보이는 소현세자의 행동에 청나라에 대한 원한이 사무쳐 있는 인조와 조정 대신들(주전파)은 발끈했다.
그런데 1645년 2월에 귀국한 소현세자는 4월 갑자기 사망한다.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은 상당한 파장을 몰아왔다. 가장 큰 의혹은 소현세자가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세자가 죽고 난 뒤, 곳곳에 검은 반점이 나고, 시신이 빨리 부패했다는 점에 인조가 의관 이형익을 시켜 독살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인조23년(1645) 6월 27일 『인조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소현세자의 졸곡제(卒哭祭)를 행하였다. 전일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 집을 지어 단확을 발라서 단장하고, 또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하여 둔전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館所)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으므로, 상이 그 사실을 듣고 불평스럽게 여겼다. (중략)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幎目)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外人)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하였다. 당시 종실 진원군(珍原君) 이세환의 아내는 곧 인열왕후의 서제(庶弟)였기 때문에, 세완이 내척(內戚)으로서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다가 그 이상한 것을 보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갑자기 사망하자 의관인 이형익을 국문하라는 상소 등을 시종일관 무시했다. 당시에 왕이나 세자가 사망하면 이를 의관의 책임으로 몰아 죄를 주는 것이 기본이었고 심지어는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문제는 세자가 사망했음에도 아버지인 인조의 처신이다. 『의례』에 의하면 왕은 장자를 위해 참죄 3년을 입고 신하는 왕의 부모와 아내의 장자를 위해 기년(1년)으로 종복(從服)한다고 되어 있는데 인조는 상상할 수 없는 묘수를 도출한다. 인조는 날짜로 달수를 바꾸어 12일을 1년으로 셈하더니 마침내는 그조차 7일로 감해버렸다. 그리고 윤6일, 인조는 원손을 제치고 둘째아들 봉림대군(효종)을 왕세자로 책봉했다. 적자 계승의 원칙을 저버리는 예외적이 조처이므로 신하들이 벌떼같이 일어났지만 인조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같은 인조의 조치는 훗날 현종과 숙종 때 치열하게 전개된 예송(禮訟)의 불씨가 됐다.
그런데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강신몽 박사는 의관 이형익이 소현세자의 시신을 적은 기록에 관한 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위 설명에서 소현세자가 죽은 후 몸이 검은빛을 띠고 이목구비 일곱 구멍에서 선혈이 흘러나온 것을 볼 때 중독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강 박사는 우리가 보통 보는 몸이나 시체와는 달리 색깔이 검푸르거나 검은빛을 띠면 중독을 의심할 수 있으며 이목구비에서 피가 흘러나온다면 더욱 그럴 가능성이 커진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소현세자의 경우 졸곡제를 행한 시기를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소현세자의 경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었다’고 했는데 이런 현상은 부패에 가깝다는 것이다.
강박사는 중독에 의한 시반으로 인해 얼굴을 비롯한 온몸이 검게 변한다는 것은 현대 법의학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소현세자가 죽은 날은 음력 4월 26일이고 졸곡제를 지낸 날은 6월 27일 즉 2달 후다. 부패되면 부패가스에 의해 뱃속의 압력이 높아져 부패액이 코와 입을 통해 흘러나오기도 하므로 이목구비 일곱 구멍에서 모두 선혈이 흘러나왔다는 기록도 부패와 일맥상통한다고 적었다. 조선왕조에서 가장 비극적인 일로도 설명되는 소현세자의 경우 사망 원인은 어떠하든 『인조실록』에 의한 글로 비추어 보면 중독사가 아니라 부패가 틀림없다는 설명으로 일반에 알려진 이야기의 정확성을 찾아낼 때 과학의 역할은 보다 높아진다는 뜻이다.
소현세자와 인조와의 알력에 대한 흥미로운 야사를 송백헌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서 돌아오기 전 청의 황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나씩 말하라고 했는데 소현세자는 황제의 벼루인 용연(龍硯)을 청했고, 봉림대군은 볼모로 잡혀온 백성들과 함께 갈 수 있기를 원했다. 돌아와서 인조를 만난 두 아들은 자신들이 받은 선물에 대해 답하자, 인조가 노하여 소현세자가 받아온 벼루를 그에게 집어던지며 용연석이라 외쳤는데, 이 말이 ‘요년석’ 또는 ‘요녀석’이라는 단어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인조의 비애를 보면 당시 조선인들의 고통이 연상되지만 인조에 대한 매우 색다른 이야기가 정설처럼 알려져 온다. 먹걸이인 도루묵에 관한 이야기다. 워낙 인조가 혼란한 시대를 살았으므로 음식이야기가 개제되는 것은 그만큼 왕이나 백성들에게 절실한 이야기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도루묵에 관한 이야기는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 지방으로 갔을 때와 관련 있다고 한다.
‘공주 지방에 사는 백성이 ’묵어‘라는 생선을 잡아 피난 온 인조에게 진상했다. 피난길을 오느라 피곤도 하고 시장도 했던 인조는 처음 맛본 생선이 무척이나 맛있으므로 ’은어화‘라는 이름을 직접 지어주었다. 그 후 묵어는 ‘은어’라고 불렸는데 난이 평정되고 궁궐로 돌아간 인조는 피난길에 먹었던 생선의 맛을 기억하고 다시 밥상에 올리도록 했다. 그런데 다시 먹어 본 은어의 맛은 영 아니올시다였다. 실망한 인조는 자신이 맛을 잘못 알았다며 다시 묵어로 원 위치시키라고 명했다.‘
도루묵이라는 말이 생긴 이유인데 학자들은 도루묵이라는 말이 인조는 물론 한국의 왕과는 관련 없다고 생각한다. 우선 도루묵은 주로 강원도와 함경도 그리고 경상북도의 동해 북쪽 바다에서 잡히는 바닷물고기다.
조선의 허균이 『도문대작』에서 도루묵 이름의 유래에 관련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동해에서 나는 생선으로 처음에는 이름이 목어였는데, 이전 왕조에 이 생선을 좋아하는 왕이 있어 이름을 은어라고 고쳤다가 너무 많이 먹어 싫증이 나자 다시 목어라고 고쳐 환목어라고 했다.’
한자 ‘환목어’를 우리말로 풀이한 것이 바로 ‘도루묵’이라는 설명이다.
여하튼 허균의 기록에 의하면 도루묵을 만든 주인공은 고려 또는 조선시대의 어느 왕일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이 경우 수도인 개성이나 한양을 버리고 피난을 떠난 왕은 모두 다섯 명이다. 고려 시대에는 11세기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피해 전라도 나주까지 피난을 간 적이 있으며 고종은 몽고의 침입에 대비해 수도를 개성에서 강화도로 옮겼다. 14세기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경상도 안동으로 피신했다.
조선시대에는 2왕이 피난을 갔다. 16세기 선조가 임진왜란 때 평안도 의주로 피난을 떠났으며 인조가 세 차례에 걸쳐서 한양을 비웠는데,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 그리고 이괄의 난 때는 충청도 공주로 몸을 피했다.
한마디로 고려와 조선 시대에 도루묵이 잡히는 동해안으로 피난 간 왕은 한 명도 없다. 특히 선조의 경우 한양을 떠나 임진강을 건너 평양을 거쳐 의주로 갔으므로 실제 피난길에서 도루묵을 먹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난리 통에 생물을 동해에서 잡아 진상했을 가능성도 크지 않다는 뜻이다.
또한 도루묵을 함경도 지방에서는 은어라고 부르지만 함경도 지방 이외에서는 다른 어종이다. 그러므로 도루묵을 은어라고 부르는 것은 함경도에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말에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 서유구가 쓴 『난호어목지』에는 이름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물고기의 배가 하얀 것이 마치 운모 가루와 같아 현지 사람들이 은어라고 부른다.’
이를 보면 은어는 왕이 명칭을 변경한 것이 아니라 현지 백성들이 이미 불렀던 이름이었다는 결론이다.
도루묵이란 말이 조선의 왕 특히 거의 대부분 장본인으로 거론되는 인조와 관련 없다고 한다면 어떤 연유로 생겨났느냐가 관심사항이다. 이 문제에 관한 한 학자들은 도루묵의 특성에서 찾는다. 도루묵은 비린내가 별로 없고 맛이 담백해 생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곧잘 먹지만 먹을 것이 많은 부유층에서는 즐겨 먹지 않았다. 때문에 도루묵을 즐겨 먹었던 일반 서민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 속에는 생선의 진정한 맛을 모르는 상류층을 비꼬는 의도에서 왕을 상징적으로 등장시켜 귀한 생선으로 격상시키려는 기대 심리가 담겨 있었을지 모른다고 추정한다. 내용은 어떻든 인조는 도루묵으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고 현재 도루묵은 과거와는 달리 때에 따라 생산량이 많지 않아 자주 먹을 수 없는 귀한 생선이다.
장릉은 본래 경기도 파주시 운천리에 인열왕후릉을 먼저 조성하고 우측에 미리 자신의 능을 마련해 두었다가 사망 후 그곳에 묻히도록 준비한 것이다. 인조 사망 후 사전에 예정된대로 인조의 능을 조성했는데 후에 화재가 일어나고 뱀과 전갈이 능 주위로 무리를 이루는 것은 물론 석물 틈에 집을 짓는 등 이변이 계속되자 영조 때 현 위치인 파주시 갈현리로 옮겨 합장릉으로 다시 조성됐다.
천장으로 합장하면서 규격이 맞지 않은 병풍석 등은 새로 마련했고 일부 석물은 기존의 것으로 그대로 사용했다. 따라서 장릉은 17세기와 18세기의 석물이 공존하는 왕릉이라고 볼 수 있다.
왕과 왕비가 합장된 무덤 형태로 병풍석을 둘렀는데 면석(面石)에는 보통 구름무늬와 십이지신상을 새기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모란문, 연화문 등 화문을 새겨 새로운 양식을 남겼다. 이것은 이후 사도세자의 융릉과 홍릉, 유릉으로 이어졌다. 왕릉의 호석이나 병풍석에 얹는 인석(引石)에도 만개한 화문이 있는데, 그 중심부에 십이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장명등에도 모란무늬와 연꽃무늬가 새겨 있는데 이는 17세기 석물 문양의 특징을 보여주는 예다.
이민식 박사는 병풍석의 꽃 문양이 정조가 조성한 사도세자의 융릉의 병풍석과 흡사하고 무인석도 유사하여 융릉을 조성할 때 장릉을 모델로 삼아 조성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봉분을 둘러싼 곡장 3면을 비롯해 석상, 고석, 장명등, 망주석, 문인석, 무인석, 석마, 석양, 석호 등의 석물이 매우 섬세하게 조각되었다. 능침을 보호하는 석마, 석양, 석호의 경우 파주삼릉의 순릉과 같은 형태다. 석양과 석마의 배 부분을 판으로 만들었고 석호는 앉아 있는 모습도 동일하다.
거의 대부분 정자각의 기둥 하부에 구름과 하늘을 의미하는 하얀색과 파란색 줄이 있는데 다소 예외가 보인다고 조선왕릉서부지구 파주삼릉관리소의 노병호 선생은 말한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정자각 전면부의 원형 기둥에만 칠해져 있는데 파주 장릉은 정자각의 모든 기둥에 칠해져 있다. 정자각 우측에 비각과 수복방이 있다. 특이하게 비각은 정자각보다 상단에 있으며 수복방은 정자각 우측 하단에 있다. 비각 안에는 1731년 이장할 때 건립한 방부개석(方趺蓋石) 양식의 능표가 있으며 그 앞면에 전자(篆字)체로 ‘조선국인조대왕장릉인열왕후부좌’라고 쓰여 있다. 참고적으로 파주장릉은 미공개지역이다. 학술 등 답사가 필요한 경우 파주삼릉관리소에서 3일전에 예약하면 허가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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