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전체를 볼 때 놀라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태종이 세자인 양녕대군을 폐세자로 만들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봉했다는 점이다. 충녕대군이 한국 역사상 가장 걸출한 왕이 되어 광개토대왕과 함께 대왕으로 불리는 두 명 중 한 명이므로 태종의 안목이 매우 높았다는 설명도 있지만 양녕대군의 폐세자는 그렇게 간단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양녕대군은 태조 3년(1394), 조선이 창건된 직후 당시 정안군이던 이방원의 맏아들과 다름없이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이방원의 처지는 최악이었다. 당시 이방원은 세자 자리를 이복동생에게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개국공신에도 제외되어 낙담하고 있었다.
더구나 양녕대군보다 앞에 태어났던 세 명이 모두 강보에서 죽어, 양녕대군은 태종과 원경왕후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이었다. 사실상 그들의 모든 자식 중 부부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이라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세종실록』 세종 1년(1419)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내가 젊은 시절에 아들 셋을 연이어 여의고 갑술년에 양녕을 낳았는데, 그도 죽을까 두려워서 본방댁(本房宅) 즉 여흥부원군에 두게 했다. (중략) 그때 내가 정도전 일파의 시기로 말미암아 형세가 용납되지 못하게 되니, 실로 남은 날이 얼마 없지 않나 생각되어 항상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런 낙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비(원경왕후 민씨)와 더불어 서로 양녕을 안아 주고 업어 주고 하여, 일찍이 무릎 위를 떠난 적이 없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자애하는 마음이 가장 두터워 다른 자식과 달랐다.’
태종은 원경왕후와의 사이에서 7남 4녀를 얻었지만 그 아들 중에서 요절하지 않은 왕자는 4남 양녕대군, 5남 효령대군, 6남 충녕대군 그리고 늦둥이 성녕대군인데 성녕대군도 14살에 사망한다.
태종이 정도전과 이방석을 제거하고 형인 정종의 세자가 되더니 마침내 왕좌에 올랐는데 그때 양녕대군은 여섯 살이었다. 그런데 태종은 양녕대군에 관한 한 상당이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인다. 맏아들임을 공식화하는 원자 책봉도 하지 않고 미루다가 3년 후에야 시행한다. 그리고 마지막 세자 책봉은 다시 2년이 지나서인 그의 나이 11살 때다.
엄밀한 의미에서 양녕은 맏아들로 출생- 원자책봉- 세자 책봉의 수순을 받은 최초였다. 한마디로 어려서부터 체계적인 세자 교육을 받은 경우는 그가 처음이다.
그러나 태종은 그에게 특별한 애정을 쏟아 교육 문제에 대단한 열의를 보였다. 세자 교육 시스템도 대부분 그의 설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아버지의 기대에 어린 세자도 그럭저럭 잘 부응했다. 특히 그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여 여러 신하들이 찬탄했다고 하는데 세자시강원에서의 공부는 아무래도 어렵고 따분했는지 간혹 게으른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태종은 세자의 게으름을 용서치 않고 세자시강원 직원들에게 매를 때리면서 분발할 것을 주문했다. 양녕대군은 아버지의 재촉에 열성적인 학부모 밑의 수험생처럼 곧잘 밤을 새워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2008년 10월 담양군 몽한각에서 도난되었다가 회수된 소동파의 '후적벽부'를 양녕대군이 직접 쓴 목판의 글씨를 보면 양녕대군이 남다른 문재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녕대군이 마냥 공부에 게을리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태종의 맹활약으로 조선 개창 초기에 벌어졌던 국내에서의 사단이나 분란이 대충 정리되고 가장 중요한 명나라와의 유대관계도 깊어지자 조선은 어느 정도 안정기에 들어선다.
태종은 보다 명나라와 독독한 유대를 맺기 위해 양녕대군을 명나라 영락제의 딸과 결혼시키는 작전에 돌입한다. 우선 조선에 단골 사신으로 오던 황엄에게 이야기했는데 놀랍게도 황엄이 좋은 반응을 보였다. 물론 이후 황엄 측에서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은데다 김한로가 반발해 흐지부지되었지만 이는 조선이 명나라와 결혼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우호 관계가 좋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바로 이 안정을 태종은 여러 각도로 저울질했다. 양녕대군이 일부 방탕한 생활을 하지만 그가 대범한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졌으므로 이는 권력의 중심이 세자로 옮겨갈 수 있다는 우려다. 태종이 양녕을 끝까지 밀면서 후대 왕의 버팀목이 되겠다고 생각하면 되지만 자신이 왕으로 있는 한 권력의 일부가 세자로 분산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태종이 생각했다. 특히 태종이 우려하는 것은 모리배들이 어린 세자를 오도한다면 그동안 자신이 쌓아 온 것을 하루아침에 망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태종은 절묘한 대안을 도출했다. 한마디로 ‘양위 선언’이란 쇼다.
‘왕이 세자 이제(李禔)에게 전위(傳位)하고자 하니, 여러 신하가 굳이 간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재이(災異)가 자주 보인다고 하여 세자 이제에게 전위하고자 하여, 여흥부원군 민제·좌정승 하윤·우정승 조영무·안성군 이숙번에게 비밀히 고하니, 하윤 등이 모두 불가(不可)하다고 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다. 이날 의안 대군 이화(李和)·영의정부사 성석린이 백관과 기로(耆老)를 이끌고, 전 앞에 도열하여 지신사(知申事) 황희를 시켜 들어가 아뢰게 하였다.’
당시 세자는 열 세살, 살벌하고 복잡한 정치판에 뛰어들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천하의 태종이 진심으로 양위를 물려주겠다고 생각할 신하들이 아님을 잘 아는 태종이다. 그들은 태종의 입맛에 맞게 일제히 태종 앞에 엎드려 ‘뜻을 거두어 달라’고 요청했다.
문제는 양녕이 덥죽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양녕은 자신이 불초하여 아버지가 그런 결단을 내렸다며 스스로 죄인이라며 절절히 반성하는 뜻을 보여야했다. 태종은 옥신각신하면서 8일 후 정말 내키지 않는다며 양위 선언을 철회했다.
일부 학자들은 태종의 이런 행동을 고도의 전술로 생각한다.
태종의 양위 선언 목적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정확하게 파악하자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의 퇴위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속아내야 한다는 뜻이다.
태종이 이와 같은 쇼를 벌인 이유는 간단하다.
태종은 왕자의 난에서 큰 역할을 한 원경왕후의 처남 민무구, 민무질들이 점점 강성해지는데 문제는 그들이 군부까지 세력을 넓히고 있다는 점이다. 더불어 세자가 어린 시절 외가에서 지낼 때 함께 지냈으므로 친분이 두텁기도 했다. 태종으로는 세자가 왕위를 받으면 처갓집이 어린 세자를 툴어 잡고 전횡을 부릴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선양을 명분으로 파동 직후 형제의 병권을 박탈했으며 영의정인 안대군 이화를 통해 그들을 탄핵토록 했다. 그들이 양위파동을 기뻐했는데 취소하여 실망했다는 것이다. 막강한 민무구와 민무질은 이 여파로 권력을 송두리째 일고 죄인이 되었으며 결국 죽임을 당한다.
그런데 태종은 이를 상습적으로 활용했다. 재위 기간 동안 정치적인 목적으로 여러 번 선위 파동을 벌였는데 그때마다 세자는 눈물을 흘리면서 신하들과 함께 부왕에게 간청했다.
학자들은 이처럼 세자와 가까웠던 민씨 형제들을 제거한 조처가 결국 세자의 폐위까지 초래했다고 본다. 외삼촌들을 모두 제거하는 과정에서 태종과 그에 동조한 조정 대신들에게 불똥이 떨어졌는데 이를 세자가 원한을 품자 이에 태종이 선수를 쳐서 세자를 내쳤다는 것이다.
<양녕 퇴위의 진위>
그렇다면 태종이 양녕을 폐위하려는 진실한 이유는 무엇인가이다.
양녕이 상당한 재주를 갖고 있었다는 점은 여러 면에서 나타난다. 태종의 나들이 길에 따라가려고 하자 태종이 글공부도 게을리하면서 무슨 말이냐고 핀찬을 주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양녕은 6년이나 붙잡고 있었던 『대학연의』를 한 달도 안 되어 마침표를 찍었고 시강연 관료조차 놀라게 만들었다고 한다. 양녕은 시(詩)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다. 그가 지은 시「영매(詠梅)」를 보면 시재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글 읽노라 정원도 돌아보지 못했는데
어느덧 원림에 녹음이 우거졌네
매실이 익어가니 봄도 다 갔는데
부질없이 깊은 생각에 황혼도 모르네‘
2008년 2월, 국보 1호 숭례문(崇禮門)이 불타 내려앉기 직전 숭례문의 편액(扁額)은 화재 진압에 나선 두 명의 소방관들에 의해 떼내졌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약간의 파손이 있었지만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다. 숭례문의 심장과 혼을 불길 속에서 구해낸 것인데 이 현판 글씨는 양녕대군의 작품으로 알려진다.
물론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작자를 밝히는 낙관이 현판 전면에 없기 때문이지만 숭례문 현판은 우여곡절을 겪어 현재에 이른 것으로도 유명하다.
남대문이 불탈 때 겨우 살아남은 양녕대군의 친필 숭례문 현판은 임진왜란 때도 사라져버린 일이 있었다. 그래서 찾는것을 포기하였던 숭례문 편액은 엉뚱하게도 광해군 때 청파동 욱천 배다리 어귀에 파묻혀 있었고 그것을 파내어 남대문에 다시 거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양녕이 시와 글씨에 재주가 있지만 양녕은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 것보다 밖에서 말 타고 활을 쏘며 용맹한 기상을 떨치기를 좋아했다는 점이다. 이성계의 핏줄을 이어받았고 태종도 처음에는 이를 그다지 나쁘게 보지 않았다.
그런데 태종은 당대의 국내외 정치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조선은 원나라를 배격하고 명나라에 사대한다는 노선을 걸고 건국했는데 여기에 왜구가 끼어들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태종은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어떤 한쪽에 일방적으로 치중하는 것보다 상황에 따라 이쪽저쪽을 오가는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태종은 명나라의 상황이 언제 변할지 모르므로 여진, 일본과 연대해 공동 대응하는 전략을 검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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