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왕후에 대해 잘 알려져 있는 것은 함흥차사다.
우여곡절을 겪은 후 태조가 함흥에서 돌아올 때 태종이 직접 교외로 나가서 태조를 맞이하려 하자, 하륜 등이 말리면서, 태조의 진노가 아직 다 풀어지지 않았으니 모든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큰 장막을 받치는 굵고 높은 기둥을 많이 세우게 하라고 조언하였다. 태종이 이를 허락했는데 태조가 태종을 보고 별안간 활을 쏘자, 태종은 급히 순간적으로 기둥 뒤로 몸을 피해 화살은 기둥에 꽂혔다.
그러자 원경왕후 민씨가 화려한 대례복을 입고 나타나 태조에게 큰 절을 올린 후 이렇게 말했다.
‘아버님. 너무도 오래 고생하셨습니다. 사냥을 즐기시는 줄 잠깐 잊어 준비가 없사오나 남은 화살이 있으니 다시 한 번 쏘아보십시오.’
난데없이 태상왕이 활을 쏘는 바람에 놀란 사람들이 속으로 탄성을 지르면서 상황을 주의하는데 이성계가 말했다.
‘나는 단번에 승부낸다. 그러므로 화살도 하나밖에 없다.’
그리고는 품에 지녔던 옥쇄를 태종 앞으로 던졌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소매 속에서 철퇴를 꺼내 놓으면서 ‘모두 하늘의 뜻이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야사에서는 이 장소를 한양의 살곶이 다리 근처라고 말하고 있으나, 『태종실록』에 따르면 이날이 태종2년 12월 8일로 장소는 황해도 금천의 금교역(金郊驛)이다. 이를 볼 때 위와 같은 살기등등한 장면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추정하지만 여하튼 원경왕후가 만만한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녀가 왕비가 되자마자 여러 가지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난다.
민씨는 자신이 태종을 도와 집권했으므로 이는 공동집권이라 생각했지만 태종은 그녀의 생각과 달랐다. 더불어 처남들인 민무구·민무질 등이 세자 즉 양녕대군과 친하게 지내자 태종은 양녕대군이 왕위에 오르면 이들이 정사를 농단할 것으로 생각하고 이들을 경계했다. 더불어 태종은 왕이 된 후 여러 명의 첩들을 받아들였는데 이로 인해 민씨와 언쟁이 심하여, 한동안은 태종은 아예 민씨가 있는 교태전에 가지도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때 태종은 1406년 양녕대군을 저울질하면서 양위하겠다고 소위 쇼를 벌이는데 이 과정에서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양위 소식에 매우 기뻐해했음을 빌미로 이들을 제주도에 유배하였다가 1410년에 이들을 사사시켰다. 태종이 민씨 일가를 철저하게 견제하자 이에 반발하여 원경왕후가 태종의 후궁 효빈 김씨와 그녀의 소생 경녕군을 학대했다고 알려지지만 이를 들은 태종은 원경왕후를 폐비시키는 대신 오히려 민씨들을 처형했다. 태종이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원경왕후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그 공을 어느 정도 선에서 마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1418년에 세자인 양녕대군이 폐위되고 충녕대군이 세자에 책봉될 때 이를 형제간의 분란이 된다며 끝까지 반대했다. 그러나 태종이 곧바로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자, 원경왕후는 왕대비가 되어 후덕왕대비(厚德王大妃)로 존호가 올려졌다.
남편을 왕으로 만들었지만, 그 대가로 민씨 일족이 숙청당한 원경왕후 민씨는 1420년에 수강궁 별전에서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조선 왕조사에서 가장 빛나는 세종의 어머니라는 것은 그녀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면해 줄 수 있다는 시각도 있음은 물론이다.
<정치는 야속>
조선초 정치사에서 큰 영향을 미친 원경왕후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불교를 기본으로 했다. 조선의 국시가 유교임에도 왕실의 믿음은 불교였다는 뜻이다.
왕실의 불교신앙은 대체로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믿음과 정성을 이어간 경우고 다른 하나는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본 다음 더 이상 매달릴 곳이 없어지는 순간 불교에 귀의하는 경우인데 조선 태종의 비 원경왕후는 후자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신덕왕후 김씨는 자신이 낳은 아들 방석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이방원을 숙청하기 위한 작업에 몰두했다. 이방원을 공신명단에서 누락시켰고, 사병을 몰수함으로써 이방원의 권력을 한꺼번에 빼앗으려고 했다.
그러나 태조에게 신덕왕후가 있었다면 이방원의 배후에는 원경왕후가 있었다. 남편이 사병을 몰수당했을 때 원경왕후와 그녀의 동생들이 비밀리에 군사와 무기를 비축했다.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킬 당시 장롱 속에 깊숙이 감추어둔 갑옷을 꺼내 이방원에게 직접 입힌 사람이 원경왕후였다. 거사에 동원된 자금이나 인물들이 이방원보다는 주로 왕후의 친정 쪽에서 나왔고, 왕비의 남동생 민무질은 정도전 쪽의 기밀을 빼내 제1차 왕자의 난을 성공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처럼 부인의 내조에 힘입어 이방원은 결국 조선 3대왕 태종으로 등극했다.
남편이 왕위에 오르면서 자연히 왕후가 되고, 더구나 양녕, 효령, 충령, 성녕이라는 똑똑한 네 아들까지 두었으니 원경왕후는 세상에 더 이상 부러울 것도, 겁날 것도 없는 명실상부한 조선의 안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만사 세옹지마라듯 왕후라는 극점에 도달하자마자 그녀의 인생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태종이 즉위한 직후부터 원경왕후와 태종의 사이가 급격히 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방원의 또 다른 여자들을 원경왕후가 용납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그동안 이방원에게 부인의 친정 배경이 필요했지만 왕위에 오른 이상 더 이상 마누라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도 설명한다. 한마디로 자신을 비호해주던 왕비의 친정 집안이 오히려 이방원을 억누르는 커다란 짐으로 다가왔다는 뜻이다.
태종은 왕위에 오른 후 왕실의 기반을 탄탄하게 한다는 이유로 후실들을 들이기 시작했다.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를 멀게 한 첫 번째 사건은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직전 원경왕후의 몸종을 총애하기 시작해서부터였다.
자신의 몸종을 남편이 눈독을 들이고, 자기 몰래 불러들인다는 사실을 파악하자 원경왕후의 눈에서는 불길이 쏟아졌다. 결국 원경왕후는 이방원의 아이를 임신한 김씨를 집에서 내쫓고 얼음장 같은 방에 가두었는데 겨울날 불기 하나 없는 행랑채에서 아이를 낳고 제대로 산후조리조차 못해 병이 났다. 그런데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 그 몸종을 궐로 불러들여 효빈이라는 직첩을 내려 공식적으로 후궁으로 삼더니 연달아 사대부 집안의 딸들을 후궁으로 들였다. 원경왕후가 집안일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면 조선왕조의 틀이 무너진다고 이야기하자 이방원의 반응은 다소 놀랍다.
‘내가 악역을 맡아야 왕조가 바로 선다.’
이방원은 자신이 쿠데타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왕이 되자마자 조선왕조를 뒤흔들 만한 소지가 있는 외척이나 훈신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하는데 몰두했다. 왕비의 집안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왕비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후궁들은 이방원에게 있어서 오히려 외척의 힘을 빼놓기 위한 미끼였는지도 모른다는 시각도 있다.
이방원은 왕비의 투기를 빌미로 그녀의 남동생 민무구와 민무질의 숙청작업을 차근차근 준비했는데 태종의 뜻을 알아차린 조정의 대신들은 상소를 올려 민무구와 민무질을 공격했다. 결국 민무구와 민무질은 불충 죄인으로 몰려 유배에 처해졌고 이 과정에서 왕비의 아버지 민제가 근심과 한탄 속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원경왕후가 아니었다.
남편의 배신에 치를 떨던 원경왕후는 친정 식구들과 은밀히 쿠데타를 준비했다. 자신의 남편을 제거하고 왕세자 양녕대군을 왕위에 올리려 했으나 태종에게 사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민무구와 민무질에게는 자진을 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태종의 보복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미 외척 숙청을 시작한 이상 흉한 불씨를 남겨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그는 나머지 왕비의 동생들마저 제거했다. 자신이 죽은 뒤 새 왕의 외삼촌의 자격으로 중앙무대에 나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왕비의 동생들까지 모두 제거해야 자신의 아들, 손자가 마음 놓고 조선을 통치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무구와 무질이 죽은 지 5년 뒤 태종은 13년 전 왕비 민씨가 효빈 김씨와 자신의 아들을 죽이려 했던 일을 다시 들먹였다. 태종은 왕비와 민무휼, 민무회를 왕의 아들을 죽이려 한 불충하고 잔인한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결국 왕비의 남은 동생 무휼과 무회 또한 역모로 몰려 죽었다. 고려에 이어 조선에서도 명문귀족 중의 귀족이었던 여흥 민씨 가문은 이렇게 풍비박산 났다.
여기에 한술 더 떠 태종은 왕후를 폐비시키고 그녀를 왕궁에서 내쫓겠다는 의사를 밝히는데 이번에는 조정의 대신들이 왕세자의 어머니, 대군들의 친모라는 이유를 들어 폐서인은 불가하다고 주장했다.
원경왕후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눈치를 두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동안 휘두르던 모든 힘이 쭉 빠진 원경왕후는 궁궐의 공식행사에만 얼굴을 가끔 내밀 뿐 태종과는 얼굴도 맞대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태종 18년 막내아들 성녕대군이 14살로 사망하자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왕비가 41세의 나이에 낳은 늦둥이 아들은 왕비가 외롭고 비참한 궁중생활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즐거움이었는데 그는 비록 어머니와 아버지의 불화 속에서 성장했지만 태종과 원경왕후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복궁 내에서 왕과 왕후 사이를 이어주는 유일한 연결고리인데 그 고리가 끊어진 것이다. 태종은 아끼던 아들의 죽음을 비통해 하며 친히 제문을 짓고 분묘 옆에 암자를 지어 ‘대자암(大慈菴)’이라고 명명한 뒤 막내아들의 명복을 빌게 하는 한편 ‘산리동’이었던 지명을 ‘대자동’으로 바꾸었다.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왕비 또한 궁궐을 나와 아들의 묘소 곁으로 갔다. 현재 이곳에는 성녕대군의 묘와 사당이 있다. 성녕대군의 죽음을 계기로 왕비는 비로소 불교에 귀의했고 대자암을 찾아 불공을 드리면서 여생을 보냈다. 불교에 귀의한 이후의 원경왕후의 생애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남편인 태종과 화해를 했는지, 그리고 남편의 무자비한 선택을 이해하고 그를 용서했는지도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들 부부의 사이가 마냥 좋았다고 볼 순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조선 왕실에서 왕과의 사이에서 가장 많은 자식을 낳은 왕비이기도 하다. 정안군 시절 요절한 세 명의 아들과 1412년에 태어나서 요절한 자식까지 포함하면 총 11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그녀는 41세에 늦둥이 성녕대군을 낳았다. 이는 조선시대 왕비들 중 최고령 출산 기록이다. 산모의 평균 연령이 높아진 21세기 현대 기준으로도 40대 출산하는 사례는 매우 희귀한데 조선 왕실에서 그녀의 출산 기록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를 볼 때 마냥 으르렁거리기만 한 것 같지는 않지만 여하튼 이들 부부의 관계는 전형적인 애증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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