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구 내곡동 대모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헌인릉(獻仁陵, 사적 제194호)은 조선 제3대 왕인 태종과 왕비 원경왕후의 능인 헌릉과 제23대 순조와 왕비 순원왕후 인릉을 합쳐 이름 붙인 곳이다. 과거부터 서울시의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우거진 숲 속이 일품이며 헌릉에는 아름다운 오리나무 숲에 둘러싸인 습지가 있는데 이것은 사전에 계획된 일이다.
오리나무는 장수목으로 옛날에 도로의 오리(五里)마다 심어놓고 거리 표시를 했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오리나무를 능역의 입구 습한 지역에 인위적으로 심어 관리했는데, 낙엽활엽수의 교목(큰나무)으로 습하고 비옥한 정체수(停滯水)가 있는 토양에서 잘 자란다. 목질부가 견고하고 붉은색을 띤 이 나무는 양수로 능역 남측의 합수지(명당수) 연못(주작) 근처에 심어 관리했다. 목질이 붉은 것은 오행 중 남측을 상징하며, 목질은 말라도 갈라지지 않아 가구 제조용으로도 많이 사용한다.
원래 왕릉 뒤에는 우거진 숲을 계획적으로 조성했는데 특히 봉분 뒤에는 소나무를 심었다. 소나무가 나무 중의 나무로 제왕을 뜻하기 때문이다. 봉분 주변에 심은 떡갈나무는 산불을 막는 역할이다. 지대가 낮은 홍살문(왕릉 입구) 주변에는 습지에 강한 오리나무를 심었다. 헌릉이 그런 예다.
태종의 수리사업에 대한 이야기는 전설이다. 태종 말년에 계속적으로 심한 가뭄이 왔고 서리가 내리는 이변도 일어났다. 이에 태종이 말했다.
‘예전에 날이 가물면 백성들은 제도개혁을 도맡아 한 영의정 하륜 탓이라고 하더니 지금 하륜이 죽고 없는데도 이렇게 가무니 하륜의 허물이 아니라 바로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 아니겠느냐?’
태종 때는 유달리 천재지변이 많았는데 태종이 사망하기 하루 전에도 지진이 일어났고 벼락과 큰 바람이 불어 홍수에 마소들이 떠내려갔고 태종이 만년에 애용했던 정자의 기둥들이 부러져 무너지기도 했다. 이런 천재지변을 못내 안타깝게 생각한 태종은 눈을 감으면서도 가뭄을 걱정하여 자신이 죽어 혼이 있다면 이날 비가 오게 하겠다고 유언을 남겼다. 그 이후 해마다 태종의 기일인 음력 5월 10일이 되면 비가 왔는데 이 비를 ‘태종우(太宗雨)’라고 하며 헌릉의 혼유석 밑 하전석의 네모난 구멍 속에 있는 물을 태종우가 고였다고 한다.
학자들이 특별히 헌인릉에 주목하는 것은 400년 이상의 시간차를 두고 조성된 두 개의 왕릉이 있으므로 조선 초기와 후기의 왕릉 양식을 한 곳에서 비교해 볼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입구로 들어가자마자 정면으로 인릉이 보이지만 우측으로 길을 따라 헌릉부터 알아본다.
① 헌릉(獻陵) :
헌릉은 조선왕조를 화려하게 수놓은 풍운아 제3대 태종(1367〜1422) 및 원비 원경왕후(1365〜1420) 민씨의 능이다. 태종은 고려 공민왕 16년(1367) 함흥 귀주동에서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우왕 때 태종 이방원은 열여섯 살 나이에 문과에 급제할 정도로 머리가 명석했다. 태종 등극의 1등 공신으로 관상을 잘 봤던 하륜은 태종을 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하늘을 덮을만한 영특한 기상이 있다”고 칭찬했다. 계모로 태종과 알력을 벌인 신덕왕후 강씨도 태종 방원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면, “어찌 내 몸에서 나지 않았는가”하며 아쉬움으로 탄식했다고 한다.
태조가 조선을 개창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방원의 역할이 컸다.
고려 충신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참살하고,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폐위하게 한 뒤 아버지 이성계를 등극하게 하는 등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이었다. 그런데 태조가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장성한 자식들을 제쳐 두고 계비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어린 의안대군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사단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조가 방석을 세자로 택하기 전의 일이다. 막내 방석을 특별히 총애한 태조는 방석의 생모인 신덕왕후의 공을 거론하면서 그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세우기 위해 배극렴과 조준 등을 내전으로 불렀다. 태조가 “누구를 세자로 책봉했으면 좋겠는가?”하고 묻자. 배극렴은 “적장자를 세우는 것이 고금을 통한 의(義)입니다”라고 대답한다. 배극렴이 태조의 의도를 만족시키지 못하자 조준에게 다시 물었다. 조준은 “시국이 태평할 때에는 적장자를 먼저 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공이 있는 이를 먼저 세워야 한다”고 간했다. 비록 조준이 누구라고 지칭은 하지 않았지만 공이 있는 자란 곧 한씨 소생 ‘태종 방원’을 두고 한 말이다. 신하들의 의견이 이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성계는 계비 강씨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에 봉하는데 이것은 결과론이지만 형제들 간의 골육상쟁을 예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방석(芳碩)이 세자가 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방원은 태조 7년(1398) 중신 정도전, 남은 등을 살해하고, 이어 강씨 소생의 방석과 방번을 귀양 보내기로 했다가 도중에 죽여 버린다. 이것을 ‘제1차 왕자의 난’이라 하며 방원은 이때 세자로 추대되었으나 이를 동복형인 방과 (芳果) 즉 추후 정종에게 양보한다. 이보 전진을 위해 일보 후퇴라 볼 수 있는데 그의 왕위 등극 찬스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정종 2년(1400) 넷째 형인 방간(芳幹)이 박포와 공모해 방원 일당을 제거하려 하자, 방원은 이를 즉시 평정하고 세제(世弟)에 책봉된다. 방간·박포의 난을 가리켜 ‘제2차 왕자의 난’이라 하며 왕자의 난이 평정된 후 방원은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즉위했다.
왕위에 오른 후 공신과 외척을 제거하여 왕권을 튼튼히 했으며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했고 관제의 개혁에 주력하여 조선왕조의 기반을 닦는 데 큰 치적을 남겼다. 많은 사람들이 창업보다 수성이 더 어려운데 조선 개국 초창기 제반 어려운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500여 년이나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태종이 결정적인 조선왕조의 발판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좋은 평점을 준다.
<만만치 않은 원경왕후>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閔氏)야말로 한국사에서 매우 중요시되는데 그녀가 조선 태종(太宗)의 왕비이자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별호는 정비(靜妃)이며 시호는 창덕소열원경왕후(彰德昭烈元敬王后)다.
남편 태종이 왕이 되는 데 막대한 역할을 했으나 후일 남편 태종에 의해 친정이 멸문당하는 과정을 지켜봐야 했다. 조선 왕조에서 문정왕후, 명성황후 민비와 함께 정치적인 왕비로 알려지는데 작가 김향은 『악녀의 세계사』에서 이들 세 명 모두 악녀로 뽑았다.
원경왕후 민씨는 고려 최고의 문벌집안 중 하나인 여흥부원군 문도공 민제(驪興府院君 文度公 閔霽)의 둘째 딸로,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이방원이 함흥에서 상경해 성균관에 입학할 당시 성균관의 사성이 민제였다. 자신의 제자를 사위로 삼을 정도로 이방원은 민제의 마음에 쏙 드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다. 함흥 출신의 시골 청년과 개경의 귀족집안 딸, 즉 집안으로 치자면 여흥 민씨 집안과 전주 이씨 집안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격차가 났지만 이성계는 이미 고려의 군사권을 장악한 최고 권력이었고, 이방원 또한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이성계를 고려 귀족사회로 편입시키고자 동분서주해온 이성계의 부인 강씨인 신덕왕후에게도 민제의 딸은 상당히 흡족한 혼처였다.
두 집안의 결합은 조선왕조의 개창을 연 서막이었다.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창하는데 공헌을 한 일등공신이 이방원과 신덕왕후였다면, 이방원을 조선의 세 번째 국왕으로 끌어올린 일등공신은 원경왕후와 그녀의 친정이었다.
조선이 건국된 그 해에 정녕옹주(靖寧翁主)로 책봉되고, 태조가 계비 신덕왕후의 11세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민씨가 옆에서 남편 이방원에게 정변을 부추겼으나 이방원이 아직 아버지인 이성계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주저했다고 한다.
1398년, 조선을 창건한 후 당대의 실세인 정도전이 사병 혁파법을 주도하여 모든 사병과 무기를 국가에 회수하였으나 민씨는 자기 집의 무기들을 숨겨놓았다고 한다. 얼마 후 태조가 병에 들자 민씨는 이 틈을 노려 이방원에게 무기를 주며 반정을 독려하였고 그에 이방원은 처남들인 민무구와 민무질 등과 궐기하여 세자 방석, 방번과 신덕왕후의 사위 이제 그리고 정도전, 남은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바로 제1차 왕자의 난이다.
학자들은 왕자의 난으로 실권을 쥐었지만 여러 면에서 불리함을 느낀 이방원이 시간을 벌기 위해 형들 중 가장 위인 둘째 형 영안군 방과를 이성계의 세자로 책봉케했다고 추정한다. 이에 이성계가 반발하면서 건강은 매우 나빠지고 있었는데 방원이 이성계 앞에서 자신의 불충이라며 용서해달라고하자 민씨는 그럴려면 왜 거사했느냐고 반박했다.
방원이 부모의 병환에 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고하자 민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답답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소생한다고 전의가 말했습니다. 소생하신 뒤에 그렇지 않아도 미워하는 마마가 곁에 있다는 것을 아버님이 알아나 보십시오. 뒷일은 어찌 되겠습니까? 범 같으신 아버님 성미에 펄펄 뛰시다가 그 길로 세상을 뜨시면 백성들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동생들을 죽이고 부왕까지도 마마가 시역했다고 알려질 겁니다. 그리되면 후에 아무리 잘하셔도 좋은 이름 남기기는 틀린 일입니다.’
민씨의 말에 놀란 방원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데 이성계가 3일 후에 일어나 곧바로 세자 방과를 왕위에 올리고 퇴위했다.
괄괄한 민씨는 정종이 뒤를 잇자 죽도록 헛고생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방원의 바로 윗형인 회안군 방간이 이에 반발하자 민씨 가문은 민제를 필두로 이방원이 곧바로 왕위에 오르도록 준비를 착착 진행시켰다. 반면 방간은 박포와 함께 1400년 2월 거병하였는데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이다. 이를 진압한 남편 정안군이 세제로 책봉되자 정빈(貞嬪)이 되었는데, 곧바로 11월 태종이 정종의 양위로 왕이 되자 정비(靜妃)의 칭호를 얻어 왕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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