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류를 못 읽은 양녕>
양녕의 실수는 조선 건국이 남다른데다 세계정세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양녕은 조선이 무력으로 탄생했으므로 무력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이 되려는 자신이 무를 닦는 것도 언제 닥칠지 모르는 전란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태종은 이미 조선을 건국했으므로 조선을 장기적으로 존속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성계와 자신이 무력으로 조선을 창건했지만 무력을 앞세운다면 자신들에게 대들을 세력은 결국 무인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무를 바탕으로 형제들을 살해하고 엄밀하게 말하면 태조 이성계와 형인 정종을 겁박하여 왕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양녕이 바로 할아버지와 자신을 똑 닮아 무를 우선했다. 그런데 태종이 방심할 수 없는 것은 양녕이 처가 즉 무인인 외삼촌들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한마디로 무를 기반으로 자신에게 칼을 대들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원경왕후가 태종을 제거하고 양녕을 내세우려한 이력도 있었다.
문제는 조선 밖의 일로 이런 문제를 명나라가 간섭할 경우 태종에게 치명타가 터질수도 있었다. 한마디로 명나라에서 조선의 일에 사사건건 간섭하는데 조선에서 무를 앞세운다는 것은 태종에게도 불똥이 튈 수 있었다.
명나라가 안정기에 들어가고 있으므로 굳이 조선에서 대들지만 않으면 명나라가 조선을 침범할 단계는 아니라는 것이 태종의 생각이다. 적어도 명나라의 문제는 접어둘 수 있었다.
태종이 집중해야 하는 것은 국내의 문제였다. 그동안 자신과 태조가 일단 무력으로 고려를 혁파하고 집권하였지만 백성들이 모두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특히 조선의 중추세력인 깐깐한 선비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중요한데 이에 가장 자연스러운 접근 방법은 이제라도 무를 포기한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즉 선비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야말로 조선왕조가 장수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했다.
조선이 창건된 지 30년도 되지 않은 그야말로 신생국가이므로 양녕이 무를 앞세우는 것은 일리가 있는 일이다. 그런데 국내외 정세가 바뀌고 있음을 태종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음에도 양녕은 바로 태종의 이런 생각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실 양녕의 말대로 주색잡기, 말과 화살은 자신이 왕이 된 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선 왕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양녕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공자와 맹자와 친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이 태어난 지 얼마되지 않으므로 태종과 유학자들의 꼬장꼬장한 도덕주의 기준에 최소한 겉으로라도 부합하는 시늉을 보여야 했다는 설명이다.
대신들이 태종의 이런 마음을 못 알아차릴 리 없다. 일부 대신들이 노골적인 행동에 나섰다. 『태종실록』 태종17년(1417) 1월에 그러한 조짐이 나타난다.
‘인정전에 나아가 군신이 한자리에 모여 연회를 베풀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취하므로, 일어나서 춤추는 자가 심히 많으니, 왕이 매우 기뻐하였다. 세자가 술잔을 올리자, 좌의정 박은(朴訔)이 한참 춤을 추다가 세자 앞에 꿇어앉아 울면서 말하였다.
"세자께서는 국저(國儲)이며 군부(君副)이므로 직임이 큰데, 어찌하여 군부(君父)의 교령(敎令)을 따르지 않습니까?"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말하였다.
"너는 들었느냐? 이 말은 대신들의 충언이다."‘
박은의 발언은 겉보기로는 세자와 국가를 걱정하는 마음에 올린 충언 같지만 사실 세자가 부왕인 태종의 뜻을 거역하고 있다는 것으로 한마디로 그러한 세자를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실 양녕이 이때라도 조신하게 처신했다면 결과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여하튼 태종이 양녕과 세종을 저울질 하면서 어느 정도 시간을 끌었는데 이는 태종의 행동으로도 읽을 수 있다. 태종이 조말생에게 직접 한 이야기다.
‘세자가 어려서 체모(體貌)가 장대하여 장차 학문이 이루어지면 종묘 사직을 부탁할 만하다고 생각하여 항상 가르치고 깨우치는 방도에 부지런히 하였는데, 이제 이미 수염이 그럴듯해지고 또한 자식까지 두었는데 학문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황음(荒淫)하기가 날로 심하다. 역대의 왕 가운데 사적인 의도로 태자를 바꾼 자가 있었고, 참언에 의해 폐한 자도 또한 있었다. 내가 일찍이 이를 거울삼아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러나, 세자의 행동이 이와 같음에 이르렀으니 어찌하겠는가? (중략) 조말생이 대답하기를, ’세자가 학문을 일삼지 아니하고 소인을 가까이 하니, 대소 신료가 실망하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태종은 조말생에게 함께 이야기한 내용을 발설하지 말라고 했다.
태종은 일찍이 그의 손으로 이복형제들을 참살한 전력이 있다. 그의 명분은 자격이 안 되는 사람에게 왕위를 넘겨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자식을 목표로 ‘자격이 안 되는 자에게 왕위를 넘겨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세자의 비행을 도왔다고 사돈인 김한로를 귀양 보내고 빈궁도 사가로 보냈다. 그러면서 시간을 끌고 있었는데 문제는 양녕의 행동이다.
양녕이 태종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반성하는 시늉도 보이지 않고 시강연을 무단으로 폐하고 활쏘기를 다니는가하면 아프다는 핑계로 태종에게 문안도 가지 않았다. 마침내 태종 18년(1418), 눈치 빠른 신하들이 폐세자를 거론하기 시작했는데 황희(黃喜) 정승이 이를 극력히 반대했다.
‘왕의 맏아들은 나라의 대들보나 다름없는데 그렇게 쉽게 그것도 근 15년이나 왕위 계승자로 계셨던 분을 하루아침에 폐위하는 것은 부당하다.’
시류를 잘 파악하고 처세의 달인이라는 황희가 강력히 반대하자 태종은 황희를 외방으로 내쫓아 6년간이나 귀양살이를 시켰다. 그런데 이때 유정현(柳廷顯)이 태종에게 찬성하여 태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그는 세종이 즉위한 뒤 일약 영의정으로 발탁되었다.
황희는 태종의 미움을 사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6년 뒤 태종이 다시 그를 불렀고 즉시 그를 예조판서로 임명했다. 태종은 명나라에 이 내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세자 양녕은 이미 장성하였으나 행실이 좋지 않아 왕위 계승자로서 적합하지 않으니 부득이 그를 대궐 밖에서 살도록 하고 셋째 아들 충녕은 자못 그 성품이 총명하여 효도하고 우애하며 학문을 좋아해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이 모두 촉망하니 왕위 계승자로 세우기로 하였습니다.’
여하튼 태종은 세자를 폐한 후 양녕대군으로 격하하고 궁궐 밖으로 쫓아냈다.
양녕에게 많이 따라다니는 전설은 양녕을 비운의 세자로 간주하며 자신보다 더 나은 셋째에게 왕위를 양보하기 위해 양녕이 고의적으로 방탕한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인기리에 방영된 KBS-TV의 드라마 「용의 눈물」은 양녕이 스스로 왕위를 박찼다는 시각에서 그린 작품이다. 이 문제에 관해 정말로 양녕이 스스로 왕위를 박찼는지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지만 적어도 양녕이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일부러 태종에게 미운 행동만 골라서 했다는 것에는 공감하지 않았다.
함규진 박사는 이 문제에 관한 한 단호하게 말한다. 양녕이 본래 온화하고 공부 잘하는 충녕을 좋아했고 그로부터 공부나 악기를 다루는 법 등을 배우기도 했지만 일단 충녕이 ‘라이벌’로 부상하고부터는 긴장했고 두 사람 사이가 점점 서먹서먹해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태종실록』 태종 16년(1416) 3월 20일자 글을 보면 당시의 정황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세자가 일찍이 왕 앞에서 사람의 문무(文武)를 논하다가, "충녕은 용맹하지 못합니다." 하니, 왕이 말하였다. "비록 용맹하지 못한 듯하나, 큰 일에 임하여 대의(大疑)를 결단하는 데에는 당세에 더불어 견줄 사람이 없다."’
이처럼 충녕에게 기울어지는 듯한 태종의 마음을 돌리려고 동생에 대한 험담까지 마다하지 않는 양녕이었다. 충녕의 장인인 심온은 양녕의 비행을 부풀리며 은근히 폐세자 운동을 벌이는 낌새도 나타난다. 이 말은 양녕에서 충녕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전설처럼 아름답지는 않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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