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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 답사 (66) : 제3구역 헌인릉(8)

Que sais 2021. 6. 29. 10:13

https://youtu.be/bd9ZEZ32qUk

<만만치 않은 세자 공부>

양녕대군 1404왕세자가 된 후 14년 간이나 세자로 있다가 1418 폐세자가 되었다. 세자 양녕과 충녕의 일화 즉 태종이 세자인 양녕을 폐위하고 충녕에게 왕위를 준 이유 중 하나가 양녕글공부를 싫어하여 결국 왕위충녕에게 빼앗겼다는 야사는 많이 알려진 이야기다.

그러나 이는 매우 와전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나 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세자가 된다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로 왕이 되는 직행로임에도 이를 동생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양녕천치가 아닌 한 원하는 일이 아니었음은 분명한 일이다. 그것도 무려 14이나 세자로 생활한 후다.

일단 세자가 되면 세자의 생활이 만만치 않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데 대체 세자 생활이 어떻기 때문에 왕위를 앞에 두고 양녕낙마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도 양녕과 같은 문무에 능력이 있음에도 공부를 싫어했다는데 더욱 의문이 든다.

왕자 중 왕자세자는 책봉되기 전부터 서열이 다르다. 우선 세자로 책봉되기 전 단계로 원자가 기본인데 이는 왕의 정비 몸에서 태어난 적장자맏아들을 말한다.

 

책상 위 책을 든 박사, 왕세자에게 수업하는 장면(노란색 왕세자의 위치 : 문화재청)

이러한 고귀한 신분은 어려서부터 혹독한 교육의 대상이다. 원자의 나이 네댓 살이 되면 원자를 특별하게 교육시키기 위한 원자강학청이 설치된다. 강학청에서는 교육 담당관들이 임명되는데 이들이 가르키는 교육시기에 따라 다소 달라지지만 대체로 소학, 격몽요결 등으로 내용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우는 것이다.

교육 방법은 간단하다. 이런 훌륭한 내용통째로 외우는 것이다. 앞부분을 외어야 뒷부분으로 진행되는데 어린아이이므로 내용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추후 외운 것이 큰 도움이 됨은 물론이다.

이때 원자는 매일 의관을 정제하고 교재를 외웠다. 네댓 살의 어린아이에게 이런 교육이 그야말로 가혹한 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원자는 이를 통해 예절참을성을 배운다. 사실 참을성이야말로 왕도를 걸어야 할 원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다. 조선인 전체의 생살여탈권을 쥔 이므로 참을성과 예절이야말로 항상 갖고 있어야 할 자세라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비로소 78세자로 책봉된다. 세자로 책봉된다는 것은 그가 현 왕의 후계자임을 내외에 공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조정은 원자세자로 책봉하기 전중국에 사신을 보내 세자 책봉을 요청한다. 중국에서 커다란 하자가 없으면 이를 거부하지 않는다.

중국에서 세자 책봉을 승인하면 세자책봉례가 열리는데 이때의 절차는 국조오례의차에 따른다. 세자책봉례가 끝나면 원자에서 세자로 바뀌었으며 세자시강원이 새로 구성된다. 세자시강원은 대체로 5으로 구성되는데 이중 세자를 직접 교육하는 사람은 사부(師傅)()영의정, ()좌의정이나 우의정겸임한다. 이들은 원자 시절보다 더욱 혹독하게 세자를 교육시킨다.

세자의 일과가 얼마나 깐깐한지는 다음으로 알 수 있다.

세자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갖추고 부왕 부부에게 문안 인사를 한 후 아침을 먹고 곧바로 오전 공부를 시작한다. 대신유신들과 정사, 학문을 논하는 것경연이라고 하며 세자사부로부터 교육받는 것서연(書筵)이라 한다. 서연은 보통 하루 세 번에 걸쳐 실시된다. 이때 전날 배운 것을 세자가 모두 암송하면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데 세 번째 강이 끝나면 저녁식사를 하고 다시 부왕 부부의 잠자리를 보살펴야 한다.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세자는 그야말로 공부와 문안반복되는데 이때 세자가 교육받는 과목은 소학 외에 논어, 맹자는 물론 효경』『주역』『예기도 거쳐야하며 춘추좌씨전』『통감강목 등 역사서도 빠지지 않는다.

이러한 책들은 세자로 하여금 유교조선의 지배이념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세자의 머리를 온통 유교세뇌시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세자가 즉위했을 때 어떤 정치를 해야하는지를 사전에 예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빡빡한 교육이 어린아이에게 항상 환영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교육을 지겹게 생각하는 세자말썽을 일으키기 마련인데 기록에 의하면 그 대표적인 인물양녕대군이다. 연산군서연을 싫어한 세자 중 한 명이다. 연산군의 세자 시절 조지서연산군의 태만을 매우 나무랐다. 연산군조지서소인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즉위 후 갑자사화 때 조지서를 베어죽이고 그 집을 적몰했다. 세자시절 그야말로 까다롭게 자신을 괴롭혔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사실 세자로 보아 문안과 공부로 맴맴도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이 지루한 과정은 왕이 되기 위해 치러야할 불가피한 일이라 하더라도 언제 세자 딱지를 뗄 지 모른다는 점이다.

물론 이런 교육은 세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왕자들도 왕자 사부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왕자뿐만 아니라 일반 종친들에 대한 교육도 만만치 않았다.

종친 교육담당한 기관세종이 재위 중에 설립한 종학(宗學)으로 이는 현재 일본에 남아있는 황실자제 교육기관학습원과 비슷하다. 세종여덟살 이상된 종친들을 모두 종학에 입학시켰다.

그런데 이 종학 교육 또한 세자시강원에 못지않게 혹독했다. 종친들은 매일 해가 뜨기 씨작해서 오후 5시 가량이 되면 파하는데 그 출결 사항 10일마다 왕에게 보고했다. 왕에게 보고되므로 요령을 필 수도 없었다.

종친들은 이 교육을 정말로 싫어했다. 왕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일반 사대부들은 공부를 통해 출세할수도 있지만 종친들은 정사 관여가 금지되어 있으므로 종친부의 벼슬 이외에 다른 관직 진출도 봉쇄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공부하더라도 동기부여가 없는 상태이므로 특별히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 외에는 괴로운 일이지 아닐 수 없다.

종학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가는 정종의 서자 순평군 이군생의 말로도 알 수 있다.

 

죽고 사는 것은 지대한 일로 어찌 관심이 없겠느냐마는 종학을 떠나는 것은 크게 쾌한 일이다.’

 

왕조 국가에서 세자, 왕자, 종친들은 그 누구보다 귀한 특수신분이다. 그러나 이들은 특수신분으로 태어난 죄로 남보다 몇 배 엄격한 자세를 요구받았다.

문제는 양녕대군의 경우 그야말로 세자의 신분으로 이런 교육에 적응치 못했다고 하는 것은 사실 단견이라하지 않을 수 없다. 여하튼 양녕대군 14년이나 세자로 있었다는 것은 양녕이 결코 공부에 맹탕이 아니었음을 뜻한다.

결론은 그렇게 오랫동안 세자위에 있었음에도 결국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셈이다. 이 문제는 당대의 여러 가지 정황을 분석해봐야 하지만 양녕의 큰 불찰세종태종의 눈도장을 받고 있다는 점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양녕간과한 것은 그의 처신으로 말썽이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충녕에게 기회가 된다는 것을 예상치 못했다는 뜻이다.

이 면에 관한 한 결론적으로 그가 세자에서 폐위됐는데 양녕으로서 태종이 정말로 자신을 폐위하리라는 것은 생각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설마 공부를 잘 안 한다고 해서 폐위되리라 믿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가장 큰 실수는 장자로 태어나지 않은 충녕이란 걸출한 왕자가 있다는 것을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것으로도 설명된다. 누울 자리를 알고 뻗어야 하는데 그 누울 자리에 충녕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자체가 양녕의 실수였다는 지적이다.

 

<함께 묻힌 태종과 원경왕후>

헌릉태종과 원경왕후가 함께 매장되었다는데 많은 사람들이 놀란다. 조선왕조 역사를 통틀어 태종과 원경왕후처럼 애증이 겹치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원경왕후 민씨고려 우왕 8(1382) 방원에게 출가하여 정도전 등이 주살될 때 미리 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여 방원에게 귀뜸을 해주기도 하고 몰래 무기를 숨겨 두었다가 방원의 군사에게 내어주기도 하는 등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왕권을 잡은 후부터는 궁녀 문제불화가 계속되더니 이어서 태종이 불충을 이유로 처남 민씨 형제를 처형하면서 그 골이 깊었다. 원경왕후폐위시킨다는 말도 있었지만 여하튼 그녀가 사망하자 태종헌릉에 안장했다. 그런데 태종 2년 후 사망하자 세종태종원경왕후와 생전에는 다소 소원했지만 그녀의 능 옆에 태종의 자리를 마련했다.

헌릉(獻陵)태종과 원경왕후를 같은 언덕에 무덤을 달리하여 안장한 쌍릉으로 앞쪽에서 보아 왼쪽이 태종, 우측원경왕후 민씨의 능이다. 홍살문이 다른 릉과는 달리 일반 도로와 면해있어 폐쇄된 입구처럼 보이지만 홍살문에서 가능한 한 뒤로 가, 앞을 바라다보면 참도를 거쳐 정자각, 2기의 신도비가 있는 비각이 멀리서도 잘 보인다. 참도가 다른 왕릉과는 달리 어도와 신도가 구분되지 않은 것이 특징이며 신계와 어계가 일반적인 3단이 아니라 2이다.

능제태조의 건원릉 형식을 따랐다. 각자 별도의 붕분을 갖는 쌍릉으로 조성되었는데 각 무덤은 12간의 난간석으로 서로 연결된다. 봉분 아랫 부분에 화강암 병풍석을 쓰고 병풍석방울, 방패, 십이지신상을 새겨 넣은 것 모두 건원릉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당시 왕비의 석곽서울 동대문구 창신동석산 돌로 사용했다. 석곽 덮개돌은 원래 물 등이 새어들지 않도록 한판으로 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그렇게 하면 백성들이 다친다며, 반을 쪼개 두 개를 덮도록 지시하고 직접 자신이 현장에 가 석공들로 하여금 둘로 쪼개도록 했다.

 

십이지신상은 원래 지구가 태양을 도는 길황도(黃道)의 원() 위의 별들을 짐승모양으로 나타낸 것이며, 근동지방에서 시작되어 중국을 거쳐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한다. 무덤에 배치한 것은 무덤 안하나의 우주로 만듦과 아울러 십이지로 하여금 무덤의 수호신(守護神) 구실을 하게 한 것이다. 이와 같은 풍습은 중국에서 이미 시작되었으나 이를 돌에 새겨 무덤의 호석으로 발전시킨 것통일신라인들의 창안이다.

혼유석 아래에 놓인 고석의 개수 5인데, 이처럼 고석이 5인 능은 건원릉과 이곳 헌릉 두 곳으로 모두 조선 초기 상설(象說) 제도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석양과 석호 4, 석상 2, 망주석 1쌍을 3면의 곡장으로 감싸 안고 있는데 한 단 낮추어 중간 층에는 문인석 2, 마석 2, 팔각형 장명석 2가 각 무덤에 설치되었고, 그 한 단 아래에 무인석, 석마 4좌가 아래 층을 이루고 있는데 크기와 모습이 대체로 건원릉과 유사하며 문인석, 무인석 모두 살짝 미소를 짓고 있다. 헌릉의 석물망주석만 빼고 모두 두 쌍씩인데 고려시대 현릉·정릉(玄陵·正陵) 제도를 기본으로 한 것이다.

조선 왕릉 중에서는 가장 크며 웅장하다고 알려지며 정자각 우측으로 비각 안에 신도비가 2가 있다. 능 조성 때 세운 좌측의 비석임진왜란손상되자 숙종우측의 신도비를 새로 세웠다. 정자각 북서측 소전대제례의 마지막 절차지방을 불사르는 시설, 태조 건원릉, 헌릉 등에서만 볼 수 있는 조선시대 초기의 석물인데 근래 정릉 신덕왕후 릉에서도 발견되었다.

태종의 능이 조선왕조의 왕릉에 비해 규모가 크고 석물이 많은 것세종의 효심 때문이다. 세종은 파격적으로 다른 왕자들을 물리치고 자신에게 선위해 준 태종에 대한 효심으로 태종의 무덤에 각별한 정성을 보였다. 세종이 이와 같이 아버지 태종에게 헌신한 것은 그가 왕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