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난의 이모저모>
처음 시작은 매우 좋았다. 홍경래난은 조선왕조에서 일어난 사건 중 현대사와 직결되므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데 <우리역사넷>의 글 등을 참조하여 설명한다.
12월 18일 홍경래에 의해 다복동에 모인 500여 명의 반군들은 격문을 낭독하고 거병식을 마친 뒤 남진군과 북진군으로 나뉘어 출병했다. 홍경래가 이끌고 홍총각(洪總角)이 선봉장이 된 남진군은 가산 관아를 공격해 군수를 살해하고 무기를 수습했다. 이들은 다음날 꼬박 하루를 행진해 가산의 동남쪽 박천군(博川郡)에 도착하여 기병 40여 명, 보병 500명을 이끌고 공격했다. 인근 서운사(棲雲寺)에 숨어 있던 군수 임성고(任聖皐)는 노모의 구금 소식을 듣고 항복했다.
남진군은 원래 박천을 점령한 뒤 영변부(寧邊府)를 공격하고 이어서 안주(安州)를 함락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이때 지도부 내부이라는 돌발 상황이 생긴다. 안주 병영의 집사 김대린·이인배 등이 안주를 먼저 치자고 주장했으나 모사 우군칙이 애초 계획대로 영변을 치고 안주를 칠 것을 주장하여 우군칙의 의견이 결국 채택되었다.
이에 김대린 등은 홍경래 지휘하에서는 난이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차라리 홍경래를 죽이고 공을 세우자는 생각으로 홍경래에게 칼을 휘둘렀다. 홍경래가 이를 피하고 김대린은 자결하고 이인배도 함께 죽었는데, 이 때문에 남진군은 진공을 일시 늦추고 다복동으로 후퇴했다.
여하튼 홍총각이 이끄는 남진군의 선봉부대 300여 명이 3일 뒤인 24일 밤 박천 송림리에 도착했고 홍경래와 우군칙도 이어서 군병 500여 명을 이끌고 회합했다. 그러나 이 사이 안주성의 목사 조종영과 영변부사 오연상이 내응자들을 색출하고 처벌하면서 안주와 영변은 이들의 반란에 합류되지 않았다.
당초에 홍경래는 안주성 확보가 거사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대린 등의 내분으로 안주의 공격이 어렵게 되자 남진군의 일부는 박천과 태천 남창에 이르러 곡식을 풀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고, 25일 밤 좌수 김윤해 등의 환영을 받으며 태천성을 접수했다. 남진군은 갈마창과 고성진에서 군량을 날라와 진공을 준비하고 안주성 북쪽 송림에 진을 쳤다.
한편 부원수 김사용(金士用)을 중심으로 선봉장 이제초(李濟初), 모사 김창시 등이 이끄는 북진군은 18일 밤에 곽산군(郭山郡)을 점령하였고, 좌수 김이천 등의 내응과 협력으로 정주성(定州城)에 무혈입성하였다. 이후 북진군은 선천을 함락시켰고 다음날 선천부사 김익순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어 부대를 두 개로 나누어 1부대는 철산군(鐵山郡), 2부대는 구성군(龜城郡)으로 각각 진격하였다. 구성군으로 간 2부대는 저항을 받기도 했으나, 철산군으로 간 부대는 내부의 향임·무임층의 협조로 저항 없이 철산을 장악하였다.
김사용은 곽산·선천·철산에 이어 용골산성(龍骨山城) 등을 차례로 함락시키며 기세를 올렸지만 의주(義州)의 회군천 전투에서 관군과의 접전에서 패해 용천으로 철수한다. 이후 구성부 진입에 실패한 제2부대는 정주성과 합세하는데 관군은 곽산 전투, 사송야 전투 등에서 차례로 승리를 거둔다.
놀라운 것은 단 몇 일이지만 점령지역에서의 홍경래의 조처다. 그는 점령지역의 토호ㆍ관속을 유진장(留陣將)으로 임명한 후 기존 행정체계를 이용해 군졸 징발과 군비(군량)조달케 했다. 학자들은 이처럼 재빠른 승리는 각지의 내응세력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있었기 때문으로 설명한다. 이 때의 내응세력은 주로 좌수·별감·풍헌(風憲) 등 향임(鄕任)과 별장(別將)·천총·파총·별무사(別武士) 등 무임(武任) 중의 부호들이다.
여하튼 봉기 10일만에 청천강 이북의 8개 읍을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으나, 내부 반란자를 수습하는데 시간을 소비하여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틈을 타 공격해온 관군과의 전투에서 이제초가 전사하는 등 참패하자 정주성으로 퇴각했다.
조정에서는 난이 발생한지 6일째 정만석(鄭晩錫)을 관서위무사로 임명한 유시문을 하달하는데 당시 순조는 일단 이 난이 흉년에 시달린 빈민들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 약간의 동정심을 표하면서도 이들을 황건적의 무리로 파악하여 결코 용서할 수 없음을 밝히고 이들에게 현상금을 걸면서 적당들을 쳐부술 것을 촉구 하였다.
당시 조정은 홍경래 난의 상황을 매우 급박하게 받아들였으나 군대를 즉각적으로 보낼지 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하기보다는 일부 정예군사만 파견한 뒤 현지의 의병들과 합세해서 홍경래를 토벌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홍경래의 난이 진행되면서 순조가 사망했다는 헛소문이 돌기도 하여 반란군의 기세를 올려주었지만 이는 소위 가짜뉴스였다.
한편 안주성에서 강한 저항에 부딪힌 홍경래군이 정주성으로 퇴각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데 관군의 공격도 난항에 부딪혔다. 관군이 반란 진압과정에서 양민도 반란군으로 몰아 약탈ㆍ살육을 자행하자 박천ㆍ가산의 일반농민들이 관군을 피해 정주성으로 합류하여 홍경래의 기세를 올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군은 역시 관군이다. 처음에 8개 읍을 점령당했을때만 해도 반란군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는데 비로소 홍경래가 지도자이며 김창시, 우군칙 등 모사가 합류하여 이들이 반란의 성공 가능성을 선전하면서 이희저의 자금력을 기반으로 초반 인원을 모았다는 것을 파악했다.
정부에서 본격적으로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겨울이라는 변수다. 당시 관군의 총수는 8,329명으로 성안의 반군에 비해 월등히 많은 숫자였지만 혹독한 추위와 질병, 인근 주민들의 적대적인 태도로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더구나 성안의 반군은 난의 초기와 달리 인근에서 모인 농민군으로 구성되어 저항이 완강하였다. 3월에는 오히려 홍경래가 1,000여명의 병력과 성을 지키면서, 우군칙·홍총각 등이 군사 500여 명을 이끌고 새벽에 서북문으로 나가 함종부사 윤욱렬과 의병장 허항의 진을 기습하기도 했다. 여기에 의병들이 관군에 합세했다는 것은 홍경래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관군의 편이었다. 관군이 어느 정도 전열을 정비하면서 비록 반란군의 숫자가 수천에 이르렀지만 조직력이 부족하여 관군의 공격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 또한 시간이 흐를수록 식량이 고갈되어 소·닭·돼지·개 등을 모조리 잡아먹고 말까지 잡아먹어 10여 필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결국 홍경래는 식량을 절약하기 위해 3월말 굶주린 사람들을 성 밖으로 내보냈다.
4월 들어 관군은 총공세를 펼쳤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 밑으로 땅굴을 파들어가더니 성 밑에 도달하자 4월 18일 밤 북장대 밑에 화약을 폭발시키고 성이 무너지자 일시에 공격하여 반군을 제압했다. 거병한 지 5개월 만이다.
이때 홍경래는 총에 맞아 죽고 주모자들은 포로가 되어 한양으로 압송된 후 곧바로 참형되었다. 또한 2,983명이 체포되어 여자 842명과 열살 이하의 남자 소년 224명을 제외한 1,917명이 전원 처형되었다.
그런데 홍경래가 정주성에서 죽었음에도, 당시 핍박받던 농민들은 ‘정주성에서 죽은 홍경래는 가짜 홍경래이며 진짜 홍경래는 살아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변혁을 바라는 조선인들에게 홍경래의 실제 생사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홍경래가 죽지 않았다는 믿음으로 자신들의 변혁의지를 키워갔다는 뜻인데 이는 홍경래란이 단순한 농민 반란이 아니라 정치적 반란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홍경래의 난은 그동안 일어난 민란과는 달리 많은 준비와 세력을 등에 업은 대규모 반란이었다. 더불어 홍경래는 박종일로 하여금 자신에 동조하여 한양에서 난을 일으켜 중앙의 혼란을 꾀하도록 유도했다. 비록 이것이 발각되어 주살되었지만 한양까지 연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은 단순한 민란 수준이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더불어 창성·강계·초산·위원 등지에서 내원을 기대하였으나, 모두 체포되어 당초 구상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홍경래가 조선 전역에서 봉기가 일어나도록 유도했다는 것은 조선 정부의 전복을 기본적으로 구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불어 학자들이 홍경래난을 특별하게 취급하는 것은 봉기세력의 지도층은 몰락 양반, 향임, 부호 등으로 당대의 정치ㆍ경제ㆍ사회적 모순이 모두 홍경래의 봉기 속에 녹아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홍경래의 반란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서북지역의 특수성 때문이다.
이 지역에 부임하는 수령들은 ‘매향(賣鄕)’이라는 이름으로 지방의 부호에게 양반 즉 향인을 강매했다. 평안도관찰사 심이지는 정주목사 오대익이 46,849냥을 받고 400여명을 향안에 올렸다고 장계했을 정도로 각종 구조적 문제가 심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관리의 수탈에 대응하기 위해 민초들은 민고(民庫)라 해서 일종의 기금을 만들었는데, 서북지역은 명ㆍ청으로 떠나는 연행사의 비용을 민고로 부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이들 민고는 지방수령의 사금고 역할도 하면서 점차 수탈을 위한 시스템으로 변모했다. 그러므로 홍경래의 봉기하기 직전인 1808년 함경도 북청과 단천의 농민봉기와 황해도 곡산의 농민봉기는 모두 향임층이 지방수령의 수탈에 주도적으로 저항하면서 발생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홍경래가 난을 일으키자, 향임층이 적극 가담하였으므로 청천강 이북 8개 읍이 순식간에 점령된 것이다. 그러나 군사편제가 엄정했던 안주, 의주 등을 점령하지 못한 것이 결국 반란이 실패하는 요인이 되었는데 이는 이곳에서 상대적으로 향임층의 역할이 크지 않았고, 군사요충지로 정부에서 집중적으로 관리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봉기하자마자 잘 나갔지만 단 10일 이후 고전을 면치 못한 이유는 부농ㆍ상인층으로 구성된 지휘부와 소농ㆍ빈농ㆍ유민ㆍ임노동자로 구성된 일반 병졸이라는 이원적 구조에 따른 상호 대립적 성격으로 인해 이들 하층민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홍경래가 지도이념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 이유도 있다.
격문을 보면 단지 서북인의 차별대우, 세도정권의 가렴주구, 정진인(鄭眞人) 즉 정도령의 출현 등만을 언급할 뿐 정작 소농·빈민층의 절박한 문제를 대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홍경래의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조선 사회에 큰 타격을 가해 그 붕괴를 가속화시켰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이 난에서 부농과는 달리 소극적인 구실만을 담당했던 광범한 소농·빈민층들이 이후 임술민란(壬戌民亂)에서는 오히려 적극적인 주도층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도 큰 변화다.
특히 이씨 왕조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새로운 정치체제가 구성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홍경래 난이 비록 평안도 지방이 주요 무대였지만 동시에 도성(都城)에서 소론 박종일(朴鍾一)을 중심으로 중인·서얼층이 연계해 정권 탈취를 계획한 것 등은 당대의 정치 변화가 감지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1960년대 이후 역사학계에서 홍경래난을 정체성 비판의 일환으로 내재적 발전론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즉 그 주도층의 성격을 농민층 분해 과정에서 성장한 향무 중의 부호, 경영형 부농, 서민지주, 사상인 및 일부 몰락한 양반지식인 등이 광산노동자·유민·빈농을 동원해 일으킨 반봉건농민전쟁으로 규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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