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릉(宣靖陵, 사적 199호)을 외국인과 함께 방문하면 그야말로 놀라는데 이유는 한국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데다 복잡한 도심의 한복판이라고 알려진 강남구 삼성동에서 무려 72,778평에 달하는 거대한 면적이 숲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봄가을의 소풍객, 마음의 여유를 위해 산책길에 오른 삼성동 일대의 회사원, 답사객들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해 주는데 사실 서울에서 가장 부동산 가격이 비싼 곳에 위치했음에도 선정릉에 대한 내역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특히 지하철 선릉역에서 5분 정도만 걸어가면 선릉에 제9대 왕인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가 모셔져 있다는 것은 더더욱 모른다.
일반적으로 성종의 아들 중종의 묘도 함께 있으므로 선정릉이라고 하는데 지하철 역 이름이 선릉역이라는 것은 선릉이 보다 잘 알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① 선릉(宣陵) :
선릉은 조선 왕조의 한 획을 그은 제9대 성종(1457〜1494) 및 계비 정현왕후(1462〜1530) 윤씨의 릉으로 동원이강릉이다. 동원이강릉이란 하나 이상의 능이 같은 능호를 사용하지만, 각각 다른 언덕에 조성된 능을 말하는데 한마디로 각기 다른 능침을 갖고 있지만 홍살문, 정자각은 하나다.
선릉을 앞에서 보면 좌측이 성종, 우측이 성종 계비 정현왕후의 능이다.
성종은 조부가 세조로 부친은 세조의 둘째 아들로 사후에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모친은 좌의정 한확의 딸 소혜왕후다. 성종이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부친이 20세로 요절하자 의경세자의 동생인 예종이 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고 성종은 1468년 자산군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예종도 즉위한 지 14개월 만에 사망하자 예종의 원자인 제안대군이 겨우 아홉 살인데다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도 병석이므로 자산군이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태조의 비범함을 닮았다고 알려진 성종은 7년간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을 받다가 친정을 시작했다.
조선 왕 중에서 성종처럼 운이 좋은 사람은 별로 없다.
첫째 어느 모로 보나 국왕에 오를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음에도 한명희의 사위가 됨으로써 조선의 국왕이 될 수 있었다. 예종이 세상을 떠난 직후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으로 보자면 그는 세 번째에 불과했지만 왕으로 등극한 것이다.
둘째로는 국제 정세가 안정되고 국내적으로 태평이 구가되던 때에 왕위에 있었으므로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나 병자호란을 당한 인조와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성종은 국리민복이나 부국강병과 관련해서 세종이나 세조에 비해 딱히 업적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데 이는 스스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국가가 튼튼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성종은 다른 왕들과는 달리 국력의 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이 성종을 조선 왕조의 대표적 국왕 7명 중의 하나로 포함시키는 것은 이유야 어떻든 25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홍문관을 설치하고 『경국대전』, 『동국통감』, 『대전속록』, 『악학궤범』 등 각종 서적을 간행케 했으며 세조 때의 공신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김종직 등 신진사림세력을 많이 등용하여 이들이 서로 견제토록 유도했다. 그의 조치는 성과를 거두어 왕권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조선 왕조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기반과 체제를 완성시켜 조선 초기 문화의 꽃을 피우게 했다고 평가한다.
성종이 남다른 학문에 열중한 것은 왕위에 오르기 전 왕세자 교육을 받지 못하고 졸지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는 왕이 된 후에야 비로소 제왕학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늦었던 만큼 성종은 열심히 공부했다. 13세에 왕위에 올라 20세 친정을 하기까지 성종은 거의 매일 두 세 차례의 왕에게 유교 경전을 강의하고 정책을 논의하던 경연(經筵)에 빠지지 않았다. 7년 여 동안 성종의 월평균 경연일수는 25일이 넘었고 아침과 낮에 열렸던 조강과 주강은 물론 석강과 야대에 경연을 실시하기도 했다. 성종의 이같은 경연 강행군에 신하들과 할머니 정희왕후도 걱정할 정도였다. 사실상 『경국대전』의 반포, 집현전의 후신인 홍문관 설치, 사림파의 등용 등은 성종의 이 같은 학문적 성과와 노력이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성종이 방에 틀어 앉아 글만 읽던 책상물림은 아니었다.
성종은 시를 좋아하고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로맨티스트였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놀라운 정력이다. 성종은 25년 재위 기간 동안 공혜왕후 한씨, 폐비 윤씨, 정현왕후 윤씨와 명빈 김씨 등 총 12명의 왕비와 후궁 등에게서 16남 12녀를 얻었다. 물론 자식의 숫자로는 조선왕으로는 첫째가 아니다. 태종이 18년 재위하면서 12남 17녀를 두어 1명이 많다. 세종, 중종도 자식이 20명이 넘는다. 세종은 32년 재위하면서 18남 4녀, 중종은 38년 동안 9남 11녀였다. 놀라운 것은 성종이 사망할 때 나이가 고작 38세임에도 28명의 자식을 얻었다는 것은 가히 이 분야에서 태종을 제외하고 남다른 실력자라고 볼 수 있다.
조선 왕조에서 왕이 공식적으로 거느린 여인은 성종 12명, 태종 12명, 세종 6명, 중종은 10명이다. 그런데 주지육림으로 잘 알려진 연산군은 한 명의 왕비와 한 명의 후궁만 두었다. 호색(好色)이란 면만 본다면 연산군은 성종, 태종, 세종, 중종에 비해 저리가라다.
성종 자신이 학문을 좋아하고 풍류도 즐겼지만 개인사는 매우 굴곡져 있다.
그는 집권기 내내 훈구파들의 득세를 제압하지 못했고 조선 왕실 역사에서 원비 공혜왕후가 아들이 없이 죽자 1476년 윤기견의 딸인 연산군의 생모 숙의윤씨를 왕비로 삼았으나 투기가 심하다는 이유로 내쫓음으로써 결국 아들 연산군에 의해 피의 보복이 이뤄지는 단서를 고스란히 제공했다.
왕비인 공혜왕후가 후사 없이 사망하여 파주 순릉(純陵)에 모셔지고 원자인 연산군을 낳은 숙의 윤씨를 계비로 삼았는데 윤씨는 질투가 심하여 왕비의 체통에 어긋난 행동을 많이 하였다는 이유로, 성종 10년(1479) 폐출되었다가 사약을 받는다.
윤씨가 폐출 사사된 것은 윤씨 자신의 잘못도 있었지만, 성종의 총애를 받던 엄숙의(嚴叔儀)·정숙의(鄭叔儀), 그리고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합심하여 윤씨를 배척한 것도 큰 이유다. 그러나 모든 권한을 쥐고 있는 성종이 이를 미연에 조정하거나 방지하지 못했다는 것은 성종에게 큰 약점이지 않을 수 없다. 여하튼 이 일이 조선왕조의 가장 어두운 시기를 촉발시키는 ‘갑자사화’의 원인이 된다.
일반적으로 왕릉의 진입공간은 금천교, 연지, 재실, 금천교, 홍살문으로 이어진다.
선릉의 진입 제례동선은 봉은사, 정릉의 재실과 연지를 거쳐 선릉에서 흐르는 도랑을 따라 곡선을 이루며 선릉의 재실로 진입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일반적으로 조선왕릉 제례동선이 곡선으로 이루어진 것을 고려하면 현재의 동선으로 선릉 금천교는 주차장 주변에 있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현재 선릉에는 금천교가 없다. 금천교는 왕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으로 속세의 영역과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금천교가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 아니므로 학자들은 금천교 복원이 시급하다고 설명한다.
성종의 봉분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과 난간석이 있다. 성종의 왕릉이 특이한 것은 세조가 ‘석실이 유해무익하니 원⋅능은 석실과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지에 따라 석실은 만들지 않았음에도 병풍석을 세웠다는 점이다. 병풍석의 면석(面石)에는 연꽃문양, 인석(引石)에는 해바라기와 모란문양이 조각되어 있으며 12면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했다. 원래 십이지신상은 동물이 뚜렷하게 구분되어야 하는데 이곳에 조각된 십이지신상은 거의 비슷비슷하게 생겨 일반인들의 눈으로는 구분하기 어렵다.
장명등의 양식은 태종의 헌릉을 본떴으며, 문인석과 무인석은 극히 사실적이며 조선왕릉 석물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거대하지만 입체감이 없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특히 왕비 능침 문무석인의 조각이 아름답다. 반면에 난간석 석주의 주두는 초기 난간의 부드러운 맛을 보여 장대하면서도 조화가 잘 이루어진 왕릉으로 정평이 나 있다.
성종 능침에서 우측에 있는 정현왕후는 영원부원군 윤호의 딸로 성종 4년(1473) 궁중에 숙의로 들어왔다가 윤씨가 폐위되자 왕비가 된 운이 정말로 좋은 사람이다. 그녀는 성종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는데 다음과 같은 성종의 말로도 알 수 있다.
‘부녀는 질투하고 시기하지 않는 사람이 적은 법인데 현명한 왕비를 맞아들인 후부터 내 마음이 편해졌다.’
남편인 왕으로부터 이런 칭찬을 받은 것은 사사된 윤씨와 비교되는 차별화 때문으로 생각되지만 그래도 정현왕후가 성종을 잘 보필한 것만은 사실로 보인다. 불교에 독실하여 성종이 사망하자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찰(古刹)이었던 건성사를 성종의 원찰로 삼았다.
왕비릉은 병풍석 없이 난간만 돌려져 있고 상설물은 왕릉과 비슷하다. 봉분 주변에 좌우로 석양과 석호를 서로 엇바꾸어 2쌍식 8마리가 배치되어 있다. 성종의 문인석과 무인석이 윤곽이 굵고 강직하다면, 왕후릉의 문인석과 무인석은 윤곽과 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다.
선릉의 표석은 높고 네모난 농대석 위에 팔작지붕 형태의 가첨석을 얹은 18세기 이후 ‘방부개형’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특히 가첨석의 처마 양 끝이 활시위처럼 올라가 경쾌한 느낌을 준다. 앞 시기에 건립된 영릉 표석(1682), 숭릉 표석(1721), 익릉 표석(1721)에서 처마선이 거의 수평으로 처리된 것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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