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경주역사지구 답사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7) : 대릉원지구(2) 적석목곽분II

Que sais 2021. 10. 30. 10:46

<신라 최대의 적석목곽분 황남대총>

대릉원지구간판스타라면 사적 40경주황남리고분군 속칭 대릉원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대릉원에는 미추왕릉, 천마총, 황남대총 등 많은 고분들이 있는데 야간에도 개장하여 어느 곳보다도 친근하게 다가온다.

사적 제175미추왕릉은 여러 모로 황남대총이나 천마총과 다르다.

미추왕릉

우선 무덤의 주인이 누군지 확인되었다는 점이고 또 무덤 둘레담장이 둘러져 있다. 묘역 출입을 통제하는 문도 세워져 있으며, 무덤 앞쪽에 제사를 모시는 사당숭혜전도 건립되어 있다. 미추왕이 그토록 사후에 큰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은 그가 흉노 휴저왕의 황태자 김일제의 후손으로 김씨 최초의 신라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경북 청도에 있는 이서국금성경주를 공격해왔는데 신라가 이기지 못했다. 이때 갑자기 대나무 잎을 귀에 꽂은 무수한 병사들이 나타나 적들을 물리쳤다. 적이 물러간 후 죽엽군(竹葉軍)들도 모두 사라졌는데 미추왕릉 앞에 수만 개의 댓잎이 쌓여 있었다. 백성들은 돌아가신 미추왕이 군사를 보내 적을 물리쳤다고 생각하여 미추왕릉죽현릉(竹現陵), 죽장릉(竹長陵)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미추왕릉에 가서는 무덤의 앞면만 보지 말고 무덤 뒤편으로 걸어가 보기 바란다. 실제로 미추왕릉무덤 뒤편에 울창한 대나무들을 거느리고 있으므로 대숲 사이로 허리를 굽히고 왕릉 쪽으로 다가가면 눈앞에 죽엽군들이 적을 향해 힘차게 뛰어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황남대총

또한 죽은 김유신미추왕에게 찾아가 자손의 억울한 죽음호소하며 신라를 떠나겠다고 하자 미추왕이 달랬다는 이야기도 있다. 미추왕김유신과 함께 신라인에게 영원한 호국영령으로 상징화되었는데 이로 인해 신라인들이 그 덕을 생각해서 삼산(三山)과 함께 제사지내고 서열을 혁거세의 능오릉보다도 위에 두어 대묘(大墓)로 불렀다고 한다.

대릉원에서 놀라운 것은 중앙아시아 대초원지대의 기마유목민족들이 즐겨 사용했던 각종 제품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는 점이다. 금관과 장신구, 금으로 만든 허리띠, 띠 고리(버클), 각배(뿔잔), 보검, 유리제품 등도 북방기마민족들이 즐겨 사용한 것과 비슷하거나 동일한 제품들이다.

특히 황남대총에서는 순금제 금관을 비롯해 실용적인 은관(銀冠), 실크로드를 통해 수입된 것으로 보이는 로만그라스 등 무려 7만여 점이 쏟아졌다. 그 중에서도 비단벌레(玉蟲)를 잡아, 그 날개 수천 개를 장식하여 무지개빛처럼 영롱한 자태를 뽐내는 비단벌레 장식 마구(馬具)도 발견되어 세계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들 출토품은 고구려와 백제 고분의 출토품과 비교하면 품목과 내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또한 동 시대의 중국에서 출토된 것과 비교해보아도 차이가 크거나 전혀 달라 두 문화의 공통점을 거의 인정할 수 없을 정도이다. 신라는 왜 중국문화의 수용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문화를 견지했을까하는 질문이 있는데 이는 두 말할 나위 없이 신라독자적인 문화를 영위할만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과 전혀 다른 풍습과 문화를 가진 북방기마민족신라동천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해준다.

북아시아카자흐스탄의 이리 강 유역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카족의 대규모 고분의 크기는 지름이 30100미터로 거의 신라 고분 규모에 가깝다. 특히 지상에 목곽을 만들고 그 안에 목관을 놓고 주위에 돌을 채우고 다시 목곽을 돌로 빈틈없이 덮고 그 위에 봉토를 올리는 방식으로 신라의 적석목곽분과 유사한데 건립연대가 기원전 7기원전 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카족스키타이 부류로 보기도 하므로 적석목곽분스키타이-알타이의 쿠르간 또는 쿠르간으로 줄여서 부른다. 요시미츠 츠네오신라의 적석목곽분의 원류로 러시아를 거점으로 삼았던 흉노훈족으로 추정했는데 이 부분은 필자를 비롯하여 여러 자료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어지므로 이곳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경주 황남동에 있는 고분 중에서 대표적인 적석목곽분98호분 황남대총이다. 경주 대릉원에서 가장 큰 황남대총적석목곽분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형태상 쌍분, 부부묘표형분이라고도 불리는데 남자가 매장된 남분을 먼저 축조하고 나서 여자가 매장된 북분을 잇대어 만든 것이다.

황남대총 발굴 현장

황남대총 발굴 1973 7에서 1975 10까지 2 4개월이 소요되었는데 이것은 국내 고분 발굴사상 단일무덤으로서는 최장 조사기간이다. 발굴에 동원된 인원만 총 33,000여 명이었는데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무덤의 규모답게 출토유물은 순금제 금관, 비단벌레 장식의 안장틀과 발걸이, 말띠드리개, 유리병 등 무려 7만여 점이나 출토되었다.

남분 외형은 반표주박형이며 남분만 놓고 볼 때에는 반구형이다. 봉토의 크기는 동서 83.0m, 남북 70m, 높이 22.2m이다. 봉토는 고분의 중심부에 축조된 적석부 상면과 그 주위에 넓게 덮은 두꺼운 점토층으로 구분된다. 따라서 적석부 상면 아래가 먼저 성토되고 목곽내부 매장과 적석부의 개부가 축조된 이후에 적석부 상면 윗 부분이 조성되었다.

적석부는 봉토 꼭대기로부터 15.6미터 아래에서 노출되었는데 크기는 동서 27.2미터, 남북 19.7미터, 높이 6.6미터에 이른다. 적석 상부말각장방형을 띠며 내부에 목조가구를 설치한 후 이에 맞추어 냇돌을 쌓아 축조했다. 목조가구황갈색 점토층 아래 약 50cm 깊이로 구멍을 파고 통나무 기둥을 박아 설치했는데 기둥의 직경은 2530cm이다. 이 기둥들은 주곽과 부곽이 배치되는 공간과 그 주위에 동서 23, 남북 14이 배치되었다.

목곽주부곽의 구조이며 주곽은 다시 내외곽 2중으로 축조되었고 그 안에 목관이 설치되었다. 외곽의 크기는 동서 6.5m, 남북 4.1m, 높이는 3.7m에 이르고 내곽의 크기는 동서 4.7m, 남북 2.3m, 높이는 1.8m이며 목관은 길이 2.2m,  0.7m 정도다. 목곽이 설치된 부분은 얇은 황갈색 점토로 다진 바닥면에서 46cm 정도 파낸 후 냇돌을 깔아 높이를 맞추었다. 목관 안에는 잔자갈 20cm 두께로 깔았는데 모두 주칠되어 있었으며 내곽과 목관 사이에는 잔자갈을 약 50cm로 높이로 둘러 채워 석단 형태로 만든 후 판재와 같은 목재로 둘렀다.

부장 공간을 보면 목관내 피장자는 장신구를 착장하고 부장품 수장부에 유물을 매납한 후 의도적으로 목관 주위의 석단 상면에 유물을 부장하고 목곽의 뚜껑을 덮은 후 그 상부에 다시 토기와 마구 장신구 등을 부장했다. 석단 상면에 1520세 가량의 여자 1순장되었으며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로 보아 또 다른 순장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황남대총 북분도 전체 외형은 반표주박형이며 북분만 놓고 볼 때에는 반구형이다. 봉토의 크기는 동서 80.0m, 남북 50m, 높이 22.9m이다. 봉토는 고분의 중심부에 축조된 적석부 상면과 그 주위에 넓게 덮은 두꺼운 점토층으로 구분된다. 따라서 남분처럼 적석부 상면 아래가 먼저 성토되고 목곽내부 매장과 적석부의 개부가 축조된 이후에 적석부 상면 윗 부분이 조성되었다.

북분의 적석부는 봉토 꼭대기로부터 16.5미터 아래에서 노출되었는데 크기는 동서 16.02미터, 남북 12.8미터, 높이 6.0미터에 이른다. 적석 상부말각장방형을 띠며 내부에 목조가구를 설치한 후 이에 맞추어 냇돌을 쌓아 축조한 형태다. 목조가구는 황갈색 점토층 아래 약 50cm 깊이로 구멍을 파고 통나무 기둥을 박아 설치했는데 기둥의 직경은 30cm이다. 이 기둥들은 주곽과 부곽이 배치되는 공간과 그 주위에 모두 64주가 배치되었다.

목곽은 부장궤가 따로 없는 단독곽의 구조를 띠고 있는데 목곽 주변의 3면에 석단을 만들었으며 그 안에 2층 목관이 설치되었다. 목곽의 크기는 동서 6.8m, 남북 4.6m, 높이는 4.0m에 이르고 외관의 크기는 동서 3.2m, 남북 0.8m, 높이는 0.8m 가량이며 내관은 길이 2.2m,  0.7m 정도다. 금속재 연결구가 출토되지 않아 순목재 이음으로 제작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부장 공간을 보면 목관내 피장자는 장신구를 착장하고 부장품 수장부에 유물을 매납한 후 목곽의 뚜껑을 덮은 후 그 상부에 다시 토기와 마구 장신구 등을 부장했다. 석단 상면으로부터 낙하된 것으로 보이는 심엽형 장식으로 보아 순장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신라 최대의 이 고분에는 당연히 신라에서 최고 권력을 자랑하던 왕과 왕비가 매장되었다고 추정된다. 그런데 여자무덤북분에서는 금관이 출토되었는데 남자무덤남분에서는 금관 대신 왕관 형식상 유례가 없는 은관 1, 은관과 같은 형식의 금동관 1 외에 동제 금도금의 금동제 수목관 5이 출토되었다.

여자의 금관이 더 화려한 이유권삼윤신라 금관의 주인공이 정치 권력자가 아니라 샤먼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유명한 스키타이의 고분에서 출토된 수하의 기사에는 7개의 가지를 가진 우주목에 말이 매여 있다. 기마민족이 사는 땅은 나무가 귀한 초원이 대부분이므로 나무가 있는 곳은 성스러운 땅이다.

알타이족 샤먼우주목을 타고 오르면서 환자들을 치료한다고 믿었다. 샤먼은 하늘과 교응하는 영혼의 소유자이므로 병마 때문에 고생하는 자, 불행에 빠져 고통받는 자를 치유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인식되었다. 당시 제정(祭政)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였다면 샤먼의 중요도는 누구보다도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여자의 무덤에서 더 화려하고 우수한 부장품이 나왔다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설명을 대입하면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허리띠의 경우남자는 7인데 비해 여자는 13이라는 것도 쉽게 이해될 수 있다.

황남대총 금관

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황남대총을 비롯하여 적석목곽분에서 발견된 금관들이다. 금관금으로 만든 관모를 뜻하는데 일반적으로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모든 관모를 통칭하기도 한다. 관모는 착용자의 신분을 나타내거나 특별한 의식을 집행할 때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주로 삼국시대 고분에서 출토되지만 신라 고분의 출토품이 주류를 이룬다.

신라와 가야의 왕릉급 무덤에서 출토된 금관은 모두 7(가야 1)이다. 이 중에서 교동 금관을 제외한 황남대총 북분금관총서봉총금령총천마총 금관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것이다. 학자들은 경주 일원에만 150여 기의 큰 무덤이 있는데 그 중 발굴된 것은 약 30여기에 불과하므로 앞으로 발굴 여하에 따라 훨씬 많은 금관이 쏟아져 나올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까지 금관을 출토한 무덤은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 경으로 소위 4명의 마립간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왕의 숫자보다 많다. 왕비나 왕의 가족금관을 썼기 때문으로 추정하는 이유이다. 경주를 제외한 경상도 일대에서 금동관이 많이 출토되는데 이들도 5세기 후반부터는 금관처럼 자 모양으로 통일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경주의 사로국이 경상도 일대의 소국을 복속시킨 뒤수장에게 일정한 지배권을 인정하면서 금동관을 비롯 각종 장신구를 하사함으로써 지배 복속관계를 유지한 흔적으로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