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경주역사지구 답사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8) : 대릉원지구(3) 금관

Que sais 2021. 10. 31. 10:54

<어린아이 크기의 금관>

금관고고학자들에게 큰 고민을 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국내에서 출토된 금관천마총 금관의 직경이 20센티미터, 금관총 금관이 19센티미터, 서봉총 금관 18.4센티미터, 황남대총 금관 17센티미터, 금령총 금관 16.4센티미터, 호암미술관 소장 금동관 16.1센티미터, 복천동 금관 15.9센티미터로 중간 값은 황남대총 금관의 17센티미터로 둘레는 53.4센티미터. 이 크기는 12살짜리 남자 어린아이의 머리둘레에 해당한다.

금관의 크기작은 이유로 금관을 어린아이일 때 사용하고 장성해서는 다른 관을 사용했다는 추정도 가능하지만 신라의 금관처럼 정교하고 호화로운 금관을 어린아이용 소위 장난감으로 만든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다른 이유로는 금관을 사용하던 어린 나이에 사망했을 경우를 추측할 수 있는데 56세기신라왕 가운데 10세 전후의 어린 나이로 사망한 왕은 없다. 특히 황남대총의 경우 남성의 무덤인 남분이 아니라 여성의 무덤인 북분에서 금관이 출토되었으므로 왕만 금관을 사용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금령총 금관

금관너무 작은데다 실제 머리에 쓰고 활동하기에는 부적합한 것도 사실이다. 화려한 외모와는 달리 버팀력이 약하고 지나치게 장식이 많아 어른이 사용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므로 금관은 생존시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 아니라 사망자의 무덤에 넣기 위한 부장품, 즉 죽은 자를 위한 일종의 데스마스크 용도로 특별히 제작한 것이라는 해석도 제기되었다. 다시 말해 이집트 무덤에서 나온 황금마스크와 비슷한 용도라는 것이다. 특히 피장자의 발치에 묻혀 있는 금동신발의 바닥스파이크 같은 장식이 있어 실용성이 없으며 또 다른 부장품인 금제 허리띠무게가 4kg이나 되는 것으로 볼 때 금관장례용 부장품일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물론 특수한 걸이나 끈을 사용할 경우 머리에 쓰고 활동하거나 무속의 한 형태로 춤을 출 수도 있다는 설명도 있다. 금관을 어떻게 머리에 썼을까하는 연구에서 세움장식을 실로 고정시키고 그 안에 모자를 쓴다면 머리에 쓸 수 있다는 해석도 제시되었다. 특히 중국 당나라 장회태자묘 벽화에 묘사된 인물 중에 신라인으로 추정되는 사신도가 있는데 이 그림에 의하면 신라인으로 추정되는 사신이 쓴 관모머리의 정수리 부분에 얹혀 있다. 이러한 관모는 또 테두리 양쪽에 길쭉한 끈을 드리워 턱밑에서 묶고 있다. 신라 왕의 금관 또한 착용법이 이와 비슷할 것으로 유추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가설 모두 금관의 크기가 작다는 것을 매끄럽게 해석할 수 없으므로 고고학자들이 풀 수 없는 큰 숙제 중에 하나였다.

지증대사비

이 문제는 금관의 착용자가 인공 변형된 두개골인 편두(扁頭, cranial deformation)라면 쉽게 해결된다. 편두란 외압에 의해서 두개골이 변형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편두에 관한 기록은 진수의 삼국지』「위지동이전에도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긴 돌로 머리를 눌러두어 납작하게 했다. 그래서 진한(辰韓) 사람들의 머리는 모두 편두다.’

 

기록 속의 진한(辰韓) 3세기 중엽의 진한과 변한(弁韓), 김해지역의 가야인이 여기에 포함된다. 편두 풍습은 일반적으로 유목민(코카서스 북부, 터키 등)에게 많이 나타난다. 고조선 지역에서도 일찍부터 편두 풍속이 있었다.

편두 풍습은 중국과 세계 곳곳에서 행해졌다. 남아메리카의 페루, 아르헨티나, 칠레, 에콰도르, 콜롬비아는 물론 멕시코에서도 발견된다. 미국 서남부의 인디언에서도 발견되며 대양주의 뉴기니, 뉴칼레도니아, 뉴헤브리디스제도고립된 섬에서도 보이며 소아시아, 카프카스, 아르메니아, 중앙아프리카, 인도에서도 발견된다. 중앙아프리카몸부투는 물론 이집트에서도 보이는데 근래 미라를 근거로 컴퓨터 그래픽으로 복원된 이집트의 투탕카멘왕의 얼굴도 전형적인 편두다.

편두는 현대인의 눈에는 다소 기이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고대에는 보편적인 풍습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중국의 여러 지역의 무당들이 편두라고 알려져 있다. 편두는 워낙 많은 민족들이 차용했으므로 만드는 방법이 여러 가지다. 당연히 만드는 방법에 따라 머리 모양도 다르게 변형된다. 첫째 유형은 식물을 꼬아 만든 새끼줄이나 가죽 끈으로 이마, 관자놀이, 침골 부위를 돌려 묶는 것이다. 이 방법은 머리 모양이 전체적으로 길고 좁아지며 뒤통수도 비교적 직선에 가깝다. 둘째딱딱한 판자를 머리 앞뒤에 대고 끈으로 묶어두는 것으로 이렇게 하면 이마와 뒤통수편평해지고 머리가 길어져서 옆에서 보면 이마뼈가 편평한 나무판처럼 보이며 정수리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셋째중국대문구유적지에서 발견된 편두바닥에 딱딱한 물건을 깔고 유아기의 아이를 장시간 눕혀두는 것으로 머리 뒤쪽이 편평하게 된다. 이를 첨형 편두라고 하는데 왼쪽 뒤통수가 더 기울게 했다. 지금도 산동성과 강소성 북부에서는 아이머리 밑책 같은 딱딱한 물건을 받쳐놓아 뒤통수를 납작하게 한다. 이들은 이렇게 하여 머리 모양사방형으로 되면 아이가 똑똑해 보인다고 생각한다.

헌강왕 11(885), 왕은 최치원에게 882년에 입적한 지증대사탑비(智證大師塔碑) 건립을 위해 비문을 짓게 했다. 지증대사 824년에 출생하여 9 832년에 부석사에서 출가했고 신라 경문왕이 제자의 예를 갖추고 초청했으나 거절할 정도로 교화활동에 힘썼다.

지증대사탑비는 현재 경상북도 문경군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 경내에 있으며 귀부와 이수 및 비좌의 조각이 뛰어나 2010 1월 보물 제138에서 국보 제315로 재지정되었는데 이 비문 서두에 신라 왕의 두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원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마다 석가의 종족에 참여하여 편두인 국왕 같은 분이 삭발하기도 했으며, 언어가 범어(梵語)를 답습하여 혀를 굴리면 불경의 글자가 되었다.’

 

이는 신라 법흥왕이 만년에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나온 말이다. 거매금, 거서간, 마립간, 이사금은 통칭으로 신라의 지배자를 의미하므로 최치원이 적은 편두란 존귀한 신라 왕이 편두였음을 뜻한다. 크기가 매우 작은 금관은 한국이 대표하는 유산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한국 문화유산 중에서 가장 큰 미스터리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금관을 사용하던 사람들이 편두라면, 신라의 왕을 비롯한 지배자들이 편두였다면 금관이 작은 이유가 충분히 설명된다. 언론인 안태용편두신분을 구별하기 위한 방편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참고적으로 지증대사비가 있는 봉암사는 4월 초파일 단 하루봉암사외부인에게 공개한다. 봉암사선원으로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발굴의 한 획을 그은 천마총>

황남대총과 함께 반드시 방문해야 할 곳은 천마총이다.

경주의 고분공원대릉원에서 관람객이 무덤 내부 안으로 들어가 내부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한 무덤이 바로 천마총(天馬塚)으로 천마총심야에도 내부를 개봉한다.

1971 6 평소 경주에 대한 강한 애착을 지녔던 박정희 대통령은 경주를 직접 둘러보고 신라 천년고도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며 신라고도웅대(雄大찬란(燦爛정교(精巧활달(豁達진취(進取여유(餘裕우아(優雅유현(幽玄)의 감이 살아날 수 있도록 개발할 것을 지시했다. 개발계획에 포함된 내용 가운데 신라 최고·최대의 무덤98호분인 황남대총발굴 조사하고 내부를 공개해 관광자원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계획이 들어 있었다. 발굴 결과 황남대총보다는 시기가 다소 늦으며 피장자의 성별남성으로 판단되었다.

천마총

98호분은 높이 25, 하부 길이가 120나 되는 대형 부부묘. 그때까지도 이렇게 큰 신라무덤을 발굴한 경험이 전혀 없었으므로, 98호분과 약 130미터 떨어진 비교적 규모가 큰 155호분(동서 60.0미터, 남북 51.5미터, 높이 12.7미터)시험적으로 발굴해 98호분을 발굴하기 위한 경험을 축적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발굴에 착수했다.

천마총은 외호석 안쪽으로 적석을 쌓으면서 봉토를 동시에 쌓아 올렸는데 적석과 봉토의 접착면 4.0미터 높이까지 쌓았다. 내부에 황남대총과 같은 목조가구는 설치되지 않았고 적석부와 봉토의 축조가 동시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적석부는 정상부 6.5미터 아래에서 확인되었는데 단면 형태는 타원형으로 동서 15.5미터, 남북 13.0미터, 높이는 3.35.9미터에 이르며 장축이 동남쪽으로 17도 기울어져 있다. 적석 상부 1520cm 정도의 점토층이 피복되었다. 목곽의 기저부는 바닥을 약 40cm 파고 그 위에 두께 40cm의 냇돌을 깔았다. 그 위에 동서 6.6m, 잠북 4.2m 크기의 판재를 올려 놓았으며 주칠되었다. 목곽의 높이는 2.1m 내외이며 환형철구를 이용하여 결구했다. 그 안에 수장궤와 목관을 놓아 ‘T자형으로 배치했다. 목관 주위에 석단을 쌓은 부장품 수장궤를 제외한 목관과 석단 바닥에는 판재를 깔았다. 목관의 내면에는 주칠 위에 금박을 입힌 흔적이 있다.

부장공간을 살펴보면 목관내 피장자는 장신구를 착장하고 부장품 수장부에 유물을 매납한 후 목곽의 뚜껑을 덮은 후 그 상부에 다시 토기와 마구 장신구 등을 부장하였다. 목곽 상면으로부터 낙하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수식 4쌍과 석단 상면의 철제유물과 무구류순장자가 있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