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릉계곡선각여래좌상에서 약 500미터 되는 지점에 또 하나의 선각예술품이 있는데 삼릉계곡선각육존불(지방유형문화재 제21호)이다. 앞뒤의 바위에 윤곽을 파서 여섯 분의 불보살상을 새긴 것인데 최준식 박사는 이 육존불상이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최 박사가 이것을 그림이라고 한 이유는 제작하는 과정에서 밑그림을 그린 다음 선을 따라 판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뒤쪽 바위는 높이 4미터 폭 7미터 정도로 바위면 가운데 본존은 오른 어깨에만 법의를 걸치고 연꽃대좌에 앉아 있다. 머리둘레에 두광(頭光)만 새기고 몸둘레의 신광(身光)은 새기지 않았으며 왼손은 무릎에 얹고 오른손을 들어 올린 모습으로 높이는 2.4미터이다. 그 좌우에는 연꽃 대좌에 두광만 조각되고 방울 3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한 2.6미터의 협시보살 두 분이 서 있다. 보통 이 세분을 석가삼존이라 부른다.
앞쪽 바위는 높이와 폭이 4미터 정도이며 중앙의 본존의 높이는 약 2.65미터이며 연꽃 위에 서서 왼손은 아래, 오른손은 위에서 서로 마주보게 하고 두광만 조각되어 있다. 좌우의 보살상은 높이 1.8미터 정도로 웃옷을 벗고 한쪽 무릎을 세운 모습으로 손에는 꽃 또는 다기(茶器) 쟁반을 받쳐 든 공양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두광만 조각되었으며 목에는 구슬 2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했다. 이를 아미타삼존이라 한다.
아미타여래는 서있고 좌우 협시불이 무릎을 구부린 자세의 삼존불은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매우 성스러운 포즈인데 이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아미타내용도(阿彌陀來迎圖)이다. 착한 일을 많이 한 중생들이 서방 극락세계로 올 때 아미타여래가 직접 나와 환영하는 장면이라고 한다. 신라인들은 이 삼존불 앞에 서서 자신을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아미타를 만날 수 있다고 믿었다.
학자들은 바위에 이 정도의 소묘를 하려면 사전에 수많은 탱화를 그려본 후 비로소 조각에 들어갔다고 추정한다. 특히 이런 훌륭한 조각을 하면서도 바위 면을 다듬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바위에 새겼다는 것은 신라인들의 자연존중사상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자연 암석 위로는 인공으로 홈을 파 놓았는데 아마도 빗물이 마애불 위로 직접 흘러내리지 않게 하는 배수로의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한다. 우측 암벽 위에 당시 이들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법당을 세웠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삼릉계선각여래좌상에서 얼마 되지 않아 돌 위에 조각한 1.55미터 정도의 삼릉계곡마애관음보살상(지방유형문화재 제19호)이 나타난다. 돌기둥 같은 암벽에 머리와 상체부분은 선명하게 돋을새김을 한 반면 하체 부분은 그냥 흐지부지 처리했다. 이런 조각법은 남산의 마애불상들에서 많이 보이는 수법이다. 풍만한 얼굴에 머리 위에는 삼면보관(寶冠)을 썼는데 앞에 작은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입술에는 붉은색이 아직 남아있으며 연꽃으로 된 대좌 위에 서 있는데 목걸이를 하고 허리 아래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양 다리에 각각 ‘U자’ 모양으로 드리우고 있다. 왼손은 정병을 들고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올려 손가락을 꼬부려 밖으로 향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정적인 모습이 아니라 앞으로 움직이는 생동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통일신라 시기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목 없는 석불좌상’은 서남산의 마무리로 적격이다. 높이 1.6미터 너비 1.56미터 정도의 크기로 계곡 밑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64년 동국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현재 위치보다 30미터 남쪽의 땅 속에서 머리가 없는 채로 발견되었다.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려 매듭진 가사끈과 여래 옷을 동여 맨 끈 그리고 무릎 아래로 드리워진 두 줄의 매듭이 매우 사실적이면서 자연스럽게 표현하여 용장사삼륜대좌불과 함께 복식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이 불상은 손과 머리가 파손되었으나 몸체가 풍만하고 옷주름이 유려하여 조각 형태를 볼 때 통일신라시대의 우수한 조각품으로 평가된다.
이들 불상을 감상하면서 삼릉으로 내려오면 어렵게만 생각되던 남산 남쪽을 성공리에 답사한 셈이 되지만 이곳에서 빠뜨리기 쉬운 장소를 찾아가야 한다.
바로 삼릉 입구의 경애왕릉에서 오른쪽 샛길(일명 삿갈골)을 따라 숲 안쪽에 있는 경주남산 입곡석불두(지방유형문화재 제94호)다. 위치가 애매하여 답사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도 지도만 보고는 찾기 어려운 곳에 있다.
보성할매비빔밥 좌측의 성불사 팻말이 있는 좁은 길로 들어서면 100미터도 채 지나지 않아 <경주남산연구소>가 설치한 문화유적탐방로라는 작은 안내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지나치기 쉬우므로 주의하기 바란다. ‘삿갓골석조여래입상’이라고 적혀있는데 이곳에서 약 100미터 정도 들어가면 목적지에 도착하지만 그래도 단 번에 찾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길 안내만으로 목적지를 찾는다는 것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여하튼 목적지를 찾는데 약간 고생을 했더라도 머리와 가슴 부분, 허리 밑 부분, 대좌의 세 부분으로 남아 있는 석불입상을 보면 툴툴하는 마음은 사라질 것이다.
원래는 머리와 가슴 부분 그리고 상체에 붙어 있는 광배만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무릎까지 남아 있는 하반신을 발견하였다. 표면은 약간 파손되었으나 남아 있는 부분의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머리에는 높은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육계(肉髻)와 부처의 머리카락으로 소라 껍데기처럼 틀어 말린 모양인 나발(螺髮)로 표현되었다. 눈썹 밑이 깊게 파여진 조각 수법이나 눈초리가 길게 추켜올려진 긴 눈과 굳게 다문 입, 도드라진 인중(人中)의 모습은 모두 입체적인 조각수법을 보여 준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큰 귀는 길게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법의는 양쪽 어깨를 덮은 통견(通肩)이며, 도드라진 옷단이 가슴 아래로 늘어져 가슴을 많이 드러내고 있다. 신체는 몸에 꼭 달라붙게 입은 법의와 최소한의 옷주름 선을 통하여 풍만하고 탄력 있게 드러나고 있으며 오른쪽 가슴 밑에 붙이고 있는 오른손이 손목까지 남아 있다.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구분하는 도드라진 윤곽선 안에 화불(化佛)과 꽃무늬가 배치되었다. 특히 화불의 연화대좌가 구름 모양의 줄기 끝에 올려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제작 시기는 신라시대 전성기인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서남산에 있는 약수계곡마애입불상(지방유형문화재 제114호)을 답사하는 것은 상당히 껄끄럽다.
약수골은 안질에 효과 있는 약수가 나온다 하여 붙은 이름인데 약수골에서 금오산 정상으로 가는 다소 가파른 길에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단 하나의 마애불만 보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만만치 않은 다리품을 팔아야하는데 올라가는 도중에 정리되지 않은 목없는 불상이 나타난다.
학자들은 몸통만 있는 석가여래상으로 결가부좌며 항마촉지인을 표시하고 있는데 머리는 없지만 만만치 않은 작품성을 보여준다. 이 부근 어디엔가 머리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만약 이 마애불의 머리를 찾을 수 있다면 9세기 초의 걸작품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평가한다.
목없는 불상까지는 비교적 평탄한 길이며 이곳에서 마애입불상까지는 약간 가파른 오르막길이지만 무난하게 목적지인 약수계곡마애입불상에 도착할 수 있다.
단 하나라 하지만 남산의 많은 마애불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몸체는 높이 8.6미터, 폭 4미터나 된다. 머리와 몸체가 지름 9센티미터 되는 철봉으로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는 흔적이 남아 있으며 머리의 크기를 1.8미터 정도로 계산하면 이 불상은 10.4미터나 되는 거대한 불상이다. 몸의 오른쪽 바깥을 거칠게 다듬기만 하고 광배를 조각했던 흔적은 없다. 머리는 다른 돌을 조각해서 얹은 구조로 아쉽게도 사라져 목 부분만 부근에 남아 있다. 부처의 발은 만들어 붙인 것이고 오른쪽 발이 아래로 굴러 떨어진 것을 따로 불상 앞에 옮긴 것이다.
엄지와 장지를 마주 잡은 왼손은 가슴에 올리고 오른손은 배 앞에 들어 설법하는 형상이다.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흘러내린 옷주름이 양쪽 팔에 걸쳐져 수직으로 내려오는 옷주름과 직선과 곡선의 대조를 이룬다. 부처 몸체 이외의 바깥쪽 바위 면을 깎아내 부처의 몸체를 도드라져 보이게 한 것도 남다른 재주이지만 옷주름을 3센티미터 정도로 파내 햇빛이 비치면 그림자가 생겨 옷주름이 뚜렷이 보이도록 한 것은 솜씨 좋은 장인의 솜씨로 평범한 장인이 만들 수 없는 걸작품이다.
서남산(B)을 일괄적으로 답사할 때 이곳을 답사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용장골에서 올라가 용장사지마애여래좌상(보물 913호), 경주남산용장사곡석불좌상(보물 187호), 경주남산용장사곡삼층석탑(보물 186호)을 답사한 후 금오봉 정상에서 약수골 표지판을 보고 내려가 약수계곡마애입불상을 본 후 다시 금오봉으로 되돌아가 삼릉계곡으로 내려오는 답사로도 있다.
참고문헌 :
「바둑예찬」, 윤숙이의 바둑블러그, 2004.4.26.
「바둑과 정신건강」, 윤숙이의 바둑블러그, 2004.4.26
「추억의 주산 돌아왔다」, 정양환, 동아일보, 2005.7.7.
「바위에 새긴 우리 조상들의 바둑, 석국(石局)」, cjs2704, Nate 지식 Q&A, 2009.02.28.
「4.5m 크기인데,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 정만진, 한겨레, 2012.10.26.
『답사여행의길잡이(2) 경주』,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돌베개, 2001
『경주여행 109선』, 정선중, 혜지원, 2007
『과학삼국유사』, 이종호, 동아시아, 2010
'유네스코(한국유산) > 경주역사지구 답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20) 남산지구(남남산II) (0) | 2021.11.04 |
---|---|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19) 남산지구(남남산I) (0) | 2021.11.03 |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17) 남산지구 서남산(VI) (0) | 2021.11.03 |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 (16) : 남산지구 서남산(V) (0) | 2021.11.02 |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15) : 남산지구 서남산(IV) (0) | 2021.1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