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중릉이 아니다>
감은사를 지나 문무대왕릉으로 알려진 대왕암으로 향한다. 봉길리해수욕장이 들어선 이곳에서 바라본 대왕암은 4개의 큰 암초 덩어리가 외곽을 둘러싸고 그 안쪽에 바닷물이 차 있는 특이한 구조물이다. 중앙에 거북등 모양의 거대한 바위가 물 속에 잠겨있으며 위에서 내려다보면 십(+)자 모양의 물길이 나있어 대왕암 안으로 항상 바닷물이 흘러든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동쪽과 서쪽은 바닷물이 들어가고 빠지는 수로 역할을 한다.
1967년 7월 24일 신라 시대의 문무왕릉이 경북 월성군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인 동해에서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대서 특필되었다. 토함산의 석굴암으로부터 일직선상에 있는 수중에 십자형의 암석이 석관의 형태로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 석관은 주위의 돌과도 판이하게 다른데다가 동해의 맑은 물이 30센티미터 정도로 덮여 있어 물 밖에서도 잘 보인다. 한국일보사가 주관한 신라오악학술조사단의 결론을 토대로 하여 문무왕릉은 곧바로 사적(史蹟) 158호로 지정되었다. 조사단의 발표 요지는 다음과 같다.
‘681년 문무왕이 죽자 유언에 따라 화장한 유골을 동해의 큰 바위에서 장사지냈다. 바위는 둘레가 200미터쯤 되는 천연 암초인데 사방으로 바닷물이 드나들 수 있는 물길을 인공적으로 터놓아 언제나 맑은 물이 흐르게 하였다. 가운데 못에 깔려 있는 거북이 등 모양의 큰 돌은 길이 3.7미터, 두께 1.45미터, 너비 2.6미터로서 그 밑에 문무왕의 납골을 모신 용기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바위의 안쪽 가운데에서 사방으로 물길을 낸 것은 사리(舍利)를 보관하는 탑의 형식을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세계에서도 드문 수중릉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수많은 전설이 깃들어 있는 대왕암이 수중릉이라는 주장이 발표되자 대왕암은 문무왕의 수중릉이 아니고 산골처라는 주장이 곧바로 제기되었다. 바위가 인공석이 아니라 천연석으로 보인다는 주장이 가장 큰 논제의 주안점이었다.
그들은 해중능침의 복개석으로 주장된 돌은 사리장치(舍利藏置)를 덮은 인공적인 석관 덮개가 아니고 자연석임이 틀림없다고 재차 확인하였다. 복개석의 밑바닥은 돌과의 사이에 공간이 뜨고 그 일부분만 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왕암이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장소라고 할 수 있을지언정 능침 구조는 아니며 그 일대의 바다에는 대왕암에 버금갈 전설과 신비에 싸인 바위들이 많다고 주장했다.
물론 당시에 인공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1,3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면서 파도 때문에 마모되어 천연석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수중릉을 옹호하는 학자들이 반박하였지만 산골처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대왕릉이 문무왕을 화장한 후 유골을 바다에 뿌린 산골처임을 주장하는 이유 중의 하나로 문무왕 비문에 ‘나무를 쌓아 장사 지내다(葬以積薪)’, ‘뼈를 부숴 바다에 뿌리다(硏骨鯨津)’ 등이 『삼국사기』의 내용과 똑같이 적혀 있기 때문이다.
1967년 오악조사단이 대왕릉을 수중릉이라고 주장한 것은 당시 학계에 만연되어 있던 소위 한탕주의, 즉 5․16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나라 문화유산을 재검토하자는 시류에 편승하여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성급하게 발표하였다는 것이다. 백 번 양보하여 대왕릉이 수중릉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복개석’이라고 주장하는 거북 모양의 돌을 들어내고 그 밑에 납골 장치가 있는지를 확인하여야 한다고 했다.
문무왕릉이 ‘산골처인가 혹은 수중릉인가’라는 주장을 완전히 가려내기 위해서는 문무왕릉을 국민들의 정신적인 믿음의 장소로 인정하던가 혹은 그럴 가치가 전혀 없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선 가운데 〈KBS역사스페셜〉팀이 2001년 3월 본격적인 탐사 작업에 나섰다.
지질학자들은 대왕암의 겉모습을 살펴보고 위에 돌이 떨어져 나간 흔적을 확인했다. 대왕암 안쪽의 50여 곳을 조사한 결과 대부분 북동 방향으로 돌이 떨어져 나간 것도 확인했다.
탐사팀은 경주문화재연구소의 지원하에 대왕암의 물을 퍼냈다. 물을 완전히 퍼내자 4개의 암초 덩어리로 보인 주변 암초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중앙에 놓인 바위는 한쪽 부분이 약간 들떠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안정되게 바닥에 놓여 있었다. 정밀하게 측정한 결과 중앙 바위는 거북등 모양으로 가로 3.74미터, 세로 2.4미터, 높이 1.35미터로 무게는 대략 20톤이었다.
많은 풍화가 진행되었지만 물이 빠진 내부는 인위적으로 돌을 다듬은 흔적도 발견했다. 안쪽을 동그랗게 다듬기 위해 튀어나온 부분을 깎아낸 흔적으로 중앙에 놓인 거북등 바위 아래 문무왕이 묻혔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되었다. 그러나 문화재를 함부로 들어내어 볼 수는 없다는 지적에 따라 지하투과 레이더와 전자 탐사를 병행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부장품이 전혀 없었다. 거북등 바위 아래는 단단한 암석으로 형성되어 있었으며 어떤 인공적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능이라면 시신이나 유골을 지하에 묻는 것을 의미하는데 시신을 묻을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없다는 것은 결국 대왕암을 능이라 부를 수 없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삼국사기』에 분명히 거대한 돌 위에서 장례를 지냈다고 적혀있고 『삼국유사』에도 감은사 동쪽 바다에 능이 있다는 기록을 종합해 보면 대왕암에서 문무왕의 장례를 치렀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도 탐사 결과는 능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왕암이 수중릉이라는 주장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결정적인 강펀치를 만났다. 1991년 ‘기후 변화의 환경 및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국제회의(CIES)’에서 지구의 해수면이 과거 100년 동안 연평균 1.0~1.5밀리미터의 속도로 상승하고 있으며 최근 50년 간에는 상승속도가 가속되어 1년에 2.4밀리미터에 이른다고 발표하였다. 한국의 경우, 서울대학교의 박용안 교수가 탄소동위원소 연대 측정법으로 조사한 결과 빙하기 직후인 7천 년 전에는 해수면이 지금보다 6.5미터, 4천 년 전에는 3미터, 2천 년 전에는 2.5미터 낮았다고 한다.
이러한 자료를 볼 때 대왕암이 수증릉이라면 지난 1,300년 동안 수심이 적어도 2미터 가량 높아졌으므로 현재 수중릉으로 알려진 덮개석을 덮고 있는 수심은 최소한 2~2.5미터는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재 석관 위로 물의 깊이는 30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즉 현재 수면의 높이로 판단해 볼 때 당시의 석관이라고 주장하는 덮개석은 수면보다 최소한 2미터 이상 높은 곳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2005년 수증릉이 문무대왕릉이 아니라는 사료적 연구결과도 발표되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신종원 교수는 ‘문제의 대왕암이 신라 문무왕의 무덤이란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각종 문헌사료와 구비·민속자료를 검토한 신 교수는 ‘대왕암은 경북 영일과 울산 등 동해안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대왕암 중 하나이며 고려시대 중기 이후 주변의 감은사 등과 연결되면서 모든 의미가 문무대왕과 연결된 것일 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추론했다. 『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이 ‘임종후 열흘 안에 서국(인도)식으로 화장하라’고 유언을 남겼는데 그때 문무왕의 시신을 경주 월성동에서 발견된 능지탑(陵旨塔)에서 화장했다고 추정했다. 또한 1961년에 발견된 문무왕능비문의 뒷면에 새겨진 ‘분골경진(粉骨鯨津)’이란 글귀는 화장한 뼛가루를 경진(鯨津), 즉 고래가 사는 깊은 바다에 뿌렸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문무왕을 화장한 다음 대왕암에서 그 유골을 뿌렸다는 것이다. 결국 대왕암이 세계 유일의 수중릉이라는 것은 후세 사람의 욕심에서 나온 근거 없는 희망 사항일 뿐이다. 그렇더라도 대왕암이 문무대왕의 호국 의지를 담았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대왕암을 의미 있게 눈여겨볼 수 있는 곳이 사적 제159호로 지정된 이견대다.
신문왕이 부왕의 시신을 화장하여 대왕암에 모신 뒤 이곳에 대를 쌓고 그곳을 바라보니 큰 용이 나타나서 하늘로 올라가고, 부근에 있던 왜구의 근거지라는 12개의 섬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에 그 뜻을 따라서 ‘이견대(利見臺)’라 하였는데 이것은 『주역』의 ‘비룡재천이견대인(飛龍在天利見大人)’이라는 글귀에서 취한 것으로 신문왕이 바다에 나타난 용을 통하여 크게 이익을 얻었다는 뜻이다. 대본리는 이견대로 인해 생긴 이름으로 ‘대본’은 ‘대 밑’ 즉 이견대 밑을 나타낸다. 이견대는 대본리 대본초등학교 남쪽에 있었는데 이 자리에 있는 이견정(利見亭)은 1970년에 세워진 것이다. 양북면 봉길리는 문무왕 수중릉을 현지에서는 댕바 또는 댕바위, 대왕바우라 부르는데 왕의 릉을 받들어 모시는 곳(奉)이니 매사가 잘 풀리는 곳(吉)을 합하여 봉길리가 되었다고 한다.
문무대왕을 설명하면서 신라의 보물인 만파식적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문무대왕의 아들인 신문왕은 부왕을 위해 감은사를 짓고 부왕을 기렸는데 『삼국유사』 <기이>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신문왕 2년(682) 5월 동해 가운데 작은 산이 있었는데, 감은사 쪽으로 떠내려 와서 물결에 따라 오가고 있다고 하자 신문왕은 천문을 담당하는 김춘질(金春質)로 하여금 점을 치게 했다. 김춘질은 문무대왕과 김유신의 영혼이 나라의 영원한 평화를 위해 보물을 내어주고자 한다는 풀이를 했다.
이에 왕이 친히 이견대에 행차하여 사람을 보내어 살펴보도록 했는데 거북이 머리 같은 산 위에 한 줄기의 대나무가 있는데, 낮에는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하나가 된다고 보고했다. 왕은 감은사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다음날 정오가 되자 대나무가 합해져서 하나가 되더니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쳐 7일 동안이나 깜깜하였다가 바람이 잦아지고 물결이 잔잔해졌다. 왕이 배를 타고 그 산에 들어갔는데, 용이 검은 옥대를 왕에게 바쳤다. 용은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이 왕에게 내리는 큰 보물이라고 했다. 이에 왕이 대나무가 때로는 갈라지고 때로는 합해지는 연유를 물으니 용은 한 손으로 손뼉을 치면 소리가 나지 않지만,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이 대나무도 합해진 연후에야 소리가 나는 법. 왕이 소리로 천하를 다스릴 상서로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평화로워질 것이라고 했다.’
왕이 대나무를 베어 뭍으로 나오자 산과 용이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대나무로 만든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질병이 사라지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홍수가 지면 비가 그치고 바람과 물결을 잦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고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놀라운 것은 서울 곧 경주를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면 소리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문무왕이 죽어서 용이 되었다는 전설 역시 『삼국유사』에 있다. 문무왕은 생전에 지의 법사에게 ‘내가 죽은 뒤에 큰 용이 되어 불교를 받들고 나라를 수호하겠소’라고 자주 말했다. 법사가 ‘용은 짐승인데 전하께서 그렇게 태어나도 좋겠습니까?’라고 묻자 문무왕은 ‘나는 세상 영화에 염증을 느낀 지 이미 오래 되었소. 만일 추한 응보로 짐승이 된다 해도 그야말로 내 뜻에 맞는 것이오’라고 말했다.
이것은 문무왕이 평소에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인간으로서는 차마 용서받지 못할 일도 많이 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내세에 어찌 또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바라겠는가?’라는 문무왕의 깊은 참회의 뜻이 담겨 있다는 주장도 있다.
어떻든지 삼국통일의 유업을 이어받아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데 힘을 썼던 문무왕이 진정으로 걱정한 것은 바다 밖의 외적이었다. 그러므로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는 설명이다.
참고문헌 :
「통일신라 금속공예의 백미」, 내셔널지오그래픽, 2001년 8월
「용을 불러들인 감은사」, 황규호, 내셔널지오그래픽, 2003년 12월
「문무대왕수중릉 의문 많다」, 최영창, 문화일보, 2005.01.04
「화장했는데 뼛가루 아닌 뼈를 묻었다고?」, 정만진, 한겨레, 2012.11.06.
「일제가 두려워한 우물, 이유 있었다」, 정만진, 한겨레, 2012.11.07.
『팔만대장경도 모르면 빨래판이다』, 전병철, 내일을여는책, 1999
『경주이야기』, 국립경주박물관,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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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와지명(3) 땅은 이름으로 말한다』, 김기빈, 한국토지공사토지박물관, 2004
『경주여행 109선』, 정선중, 혜지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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