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릉이 남다른 명성을 갖고 있는 것은 무인석의 얼굴과 신체가 신라인이 아닌 서역인이라는 점이다. 곱슬머리에 코가 우뚝하고 눈이 깊숙한 무인석은 당대에 신라가 서역인들과 활발히 무역을 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삼국유사』 <처용랑(處容郞)과 망해사(望海寺)>조를 보아도 그렇다.
‘헌강대왕 때에는 서울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연하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다. 어느 날 헌강왕이 현재 울산 부근인 개운포(開雲浦)에서 놀다가 돌아가려고 낮에 물 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서 길을 잃었다. 왕이 괴상히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 천문을 맡은 관리)이 이는 동해 용(龍)의 조화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해서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왕은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지으라고 명하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이 때문에 이곳을 ’구름이 개인 포구‘라는 뜻으로 개운포라 했다.
동해의 용은 기뻐해서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여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중의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들어가서 왕의 정사를 도우니 그의 이름을 처용(處容)이라 했다. 왕은 그를 위해 미인에게 장가들이고 제9등급인 급간(級干)이라는 관직까지 주었다. 그러나 그 아내가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신(疫神)이 흠모해서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 집에 가서 남몰래 동침했다. 처용이 밖에서 자기 집에 돌아와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자 이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나왔다.
동경(東京) 밝은 달에, 밤들어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 가랑이 넷이어라.
둘은 내 것이고, 둘은 누구 것인가.
본디 내 것이건만 빼앗겼으니 어찌할꼬.
그때 역신이 본래의 모양을 나타내어 처용의 앞에 꿇고 “내가 당신의 아내를 사모하여 이제 잘못을 저질렀으나 공은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맹세코 이제부터는 당신의 모양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 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일연은 이런 연유로 고려시대에도 사람들이 처용의 형상을 문에 그려 붙여서 나쁜 귀신을 쫒고 복을 맞아들인다고 기록했다. 많은 학자들이 처용을 서역인으로 추정하는데 이 설화는 한편으로 신라가 당대에 닫힌 나라가 아니라 열린 나라임을 보여주는 징표로도 제시된다.
『고려사』는 고려 초기에 100여 명이나 되는 많은 아라비아 상인들이 고려에 왔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상인들이 집단적으로 고려에 와서 무역 활동을 하였다는 것은 그 이전부터 우리나라와 여러 가지 형태로 관계를 맺어 왔음을 시사해 준다. 특히 헌강왕 재위 시대와 고려의 건국(918)은 불과 30여 년 차이밖에 나지 않으므로 그 가능성은 아랍인들이 쓴 자료를 보아도 충분하다.
아랍의 상인 슐레이만 앗 타지르(Suleyman)가 851년에 작성한 여행기 『중국과 인도 소식』을 보면 신라가 정확하게 나온다. 슐레이만은 인도, 중국의 광주와 천주를 여러 차례 방문했는데 이 책에서 그는 신라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중국은 바다 쪽으로는 신라군도에 의해 막혀 있다. 신라인들은 백인이고 중국의 황제와 평화롭게 지내며 만약 황제에게 선물을 보내지 않으면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 아랍인들은 아무도 그들을 방문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 관해 잘 알지 못한다. 그 나라에는 흰매가 있다.’
이슬람제국의 역사학자이자 지리학자인 알 마스오디(Al-Masau야, ?〜965)는 페르시아만을 경유해 인도 각지를 둘러본 다음 중국 남해안까지 여행하는 등 당대의 많은 나라를 여행했는데 그는 『황금초원과 보석광』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바다를 따라가면 중국 다음에는 신라국과 그에 속한 도서를 제외하고는 알려졌거나 기술된 왕국이란 없다. 신라국에 간 이라크 사람이나 다른 나라 사람은 공기가 맑고 물이 좋고 토지가 비옥하며 또 자원이 풍부하고 보석이 일품이기 때문에 극히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곳을 떠나려하지 않는다.’
알 마스오디보다 앞선 시기에 활동한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Ibn Khurdadhibah, 820〜912)는 자신의 저서 『도로 및 왕국 총람』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중국의 맨 끝에 있는 금이 많은 신라라고 하는 나라에 들어간 무슬림은 이 나라의 훌륭함 때문에 정착하였으며 절대로 떠나지 않았다.’
근래 학자들은 쾌릉의 무인들은 현재의 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 등에 해당하는 ‘소그다니아’에서 온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한다. 당대에 페르시아제국의 지배를 받던 소그디아나는 지리적인 잇점 때문에 이슬람제국, 당나라 등 강대국의 침략을 받았으므로 고향을 떠나 유라시아 대륙 곳곳을 누비며 상업과 무역에 종사했다. 당나라, 발해, 신라 등에 당시 소그드인들이 들어와 살았는데 무인 석상도 그중 하나라는 설명이다. 이들이 전해 준 놀이가 당나라, 신라, 발해에서 즐기던 격구 즉 이란의 폴로 경기라는 주장도 있다. 물론 현재의 우즈베키스탄인은 소그드인이 아니라 약 500년 전쯤 나라를 세운 터키계통인 우즈베크족이다. 우즈베키스탄에는 구소련에 의해 만주에서 강제 이주된 조선족(카레스키)이 약 30만여 명이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지만 한국인의 현지 대처능력은 탁월하여 현재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장 잘 사는 부족은 한국인이라고 한다. 사마르칸트 등 곳곳의 중심 상가를 장악하고 있는 상인들도 한국인이 주력이라고 한다.
역사유적이나 문화재의 현장을 찾을 때 안내판의 내용부터 꼼꼼하게 읽는 것이 기본이다. 문화재청이나 전문가의 안목이 드러나는 안내판이므로, 일반 답사자에게 핵심 내용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두 마리씩 마주보고 있는 사자가 몸체는 그대로 둔 채 고개만 자기가 지키고 있는 방위를 향해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돌사자를 소개하는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두 마리씩 나누어 마주보고 있는 돌사자는 동남쪽과 서북쪽의 것이 정면을 지키고, 서남쪽과 동북쪽의 것은 각각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려 남쪽과 북쪽을 지키게 하는 기발한 배치 방법을 사용하였다. 네 마리의 사자는 모두 자신감이 넘치는 웃음을 머금고 있으며, 특히 북쪽을 지키는 사자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괘릉에서 나와 슬픈 전설을 간직한 영지(影池)로 향한다.
영지라는 이름은 불국사 석가탑을 만들 때의 전설에 따라 붙여진 것인데 들어가는 길에 유형문화재 204호인 석불좌상이 나타난다. 얼굴은 알맞은 크기로 조각되었는데 눈⋅코⋅입을 정확하게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었으며 왼손은 결가부좌로 앉은 무릎 위에 놓고 오른손은 손가락을 가지런히 하여 무릎 아래로 내렸다. 석불좌상은 심하게 마멸된 탓인지, 아니면 미완성이라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겉보기에는 보물급으로 생각되는데도 불구하고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도 있다. 문화재위원이 충분히 심사하여 정한 일이므로 일반인들이 항의할 일은 아니지만 영지와 석불좌상에 서린 전설만은 유형문화재 등급이 아니라 국보급이다.
삼국 시대 최고의 석공인 아사달이 신라까지 와서 석가탑을 제작하고 있을 때 남편을 기다리다 못한 아사녀는 백제를 떠나 불국사로 찾아온다. 그러나 탑이 완성되기 이전에는 여자의 출입을 제한하는 금기 때문에 그녀는 남편을 만날 수 없었다. 그때 어떤 승려가 아사녀에게 탑이 완성되면 그림자가 못에 비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못가에서 기다렸으나 끝내 그림자가 비치지 않아 못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그 후, 탑을 완성한 아사달은 아내를 만나려고 연못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그가 울면서 못 주위를 배회하자 아내의 모습이 앞산의 바윗돌 위에 떠올랐다. 아내의 얼굴은 흡사 부처님의 모습과도 같았다. 아사달은 바위에 아내를 새기기 시작했고 그 이후 사람들은 아사녀가 탑의 그림자를 기다린 못에 영지(影池)라는 이름을 붙였고 그림자를 비추지 않은 석가탑에도 무영탑(無影塔)이라는 별칭을 붙였다는 설명이다.
전설에 의하면 아사달이 영지탑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학자들은 훨씬 이후 누군가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지만 이 역시 확실하지 않다. 현재 상태만 보면 미완성 상태에서 종료된 것으로 보이지만 몸통의 볼륨감을 볼 때 상당히 공을 들여 제작한 불상으로 추정된다. 현진건의 『무영탑』이라는 소설로 유명해졌는데 이 전설은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도 실려있다. 참고적으로 강태공들의 인기 낚시터로 유명한 영지에 늦가을 청명한 날 오후 동쪽 토함산 자락에 있는 불국사가 실제로 이 연못에 비친다고 한다. 불국사가 보인다면 석가탑도 당연히 그 속에 있을텐데 아사녀가 왜 석가탑을 보지 못했는지 궁금하다.
영지에서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불국사 삼거리에 구정동 방형분(方形墳)이 하나 있는데 지나칠 유적은 아니다. 우선 이곳은 신라 때의 무덤 속을 옛날 모양 그대로 공개하는 데 통일신라 시대의 무덤으로 일반인들이 볼 수 있는 곳은 천마총과 이곳 뿐이다. 더욱이 이 무덤은 신라 무덤들이 모두 원형인 것과 달리 사각형이다. 한 변의 길이 9m, 높이 2.7m로 길게 다듬은 큰 돌을 3단으로 쌓았으며 그 위로 판석을 넓게 놓아 봉토의 흙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았다.
1920년 공식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졌는데 이미 도굴당해 일부 장신구 외에는 특징적인 유물이 나오지 않았다. 구정동 방형분의 캄캄한 통로를 기다시피 허리를 구부려 안으로 들어가면 무덤의 벽과 천 년 세월 동안 관이 놓여 있던 자리가 눈에 보인다. 석실 안 바닥은 돌로 만들었으며 입구 왼쪽 면에는 안상이 그려진 직사각형의 받침돌이 있다. 4각 무덤이기 때문에 방형분이란 이름이 붙었는데 이런 형태는 고구려에만 있고 신라에는 유일한 형태다.
방형분의 기원은 중국 진나라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는데 진시황릉이 대표적인 방형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에서 유행했다가 통일신라 이후인 고려시대에 방형분의 변형인 방형호석 무덤이 출현했다. 방형호석 무덤 가운데 잘 알려진 것이 ‘거창둔마리벽화고분’이다. 사적 27호로 지정을 받은 중요 유적이지만, 정작 묻힌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적석목곽분인 천마총과는 다른 맛을 맛볼 수 있으므로 경주를 방문할 때 빠뜨리지 말기 바란다.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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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을 불러들인 감은사」, 황규호, 내셔널지오그래픽, 2003년 12월
「문무대왕수중릉 의문 많다」, 최영창, 문화일보, 2005.01.04.
「‘빵터진' 돌사자, 무덤 앞에서 뭐가 그리 신날까」, 정만진, 한겨레, 2012.10.29
「화장했는데 뼛가루 아닌 뼈를 묻었다고?」, 정만진, 한겨레, 2012.11.06
「일제가 두려워한 우물, 이유 있었다」, 정만진, 한겨레, 2012.11.07.
「신라왕의 보디가드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 강응천, 조선일보, 2013.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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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이덕일 외, 김영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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