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성대의 수학>
첨성대의 형태가 남다르므로 남다른 수학이 들어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첨성대의 수학을 보자.
첨성대의 기단의 대각선과 첨성대의 높이의 비는 약0.8 , 즉 4/5이며, 정자석 한 변과 1단 원의 지름의 비는 약0.6, 즉 3/5이다. 그리고 최상단의 원지름과 중앙부에 있는 창의 한 변 길이의 비는 약3이다. 1, 4/5, 3/5은 원주율과 피타고라스정리에서 나오는 3:4:5의 값이다. 이것은 첨성대가 그 시대 철저한 수학적 구조물로 건설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타고라스 정리라하면 의아하게 생각하겠지만 피타고라스 정리라는 말이 우리나라에 알려졌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이들 원리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를 ‘구고현의 정리’라고 부른다.
신라시대에 천문학의 기본 교재로 삼았던 책이 중국의 『주비산경』이다. 이 책에 구고현 정리가 나오는데 구고현의 정리에서 ‘구(勾)’는 직각 삼각형에서 직각을 낀 두 변 가운데 짧은 변, ‘고(股)’는 긴 변, ‘현(弦)’은 빗변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구’를 3, ‘고’를 4, ‘현’을 5로 하는 숫자쌍을 선택한 이유는 동양 기하학의 기본도형이 원과 사각형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 원지름이 ‘1’일 때의 원둘레 ‘3’을 ‘구’, 한 변이 ‘1’인 정사각형의 둘레길이 ‘4’를 ‘고’에 대응시킨 것이다. 나머지 한 변은 자연스럽게 ‘현’이 된다.
구고현의 정리는 우리나라의 건축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건축물을 수직으로 세우거나, 직접 측정할 수 없는 거리를 계산하는데 사용하였고, 건축물의 균형미를 살리는 데에도 이용하였는데 불국사의 건물에서도 구고현 정리가 접목되었다.
첨성대 입면의 아름다운 비선형 곡선은 원통형몸통의 제1단으로부터 제27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름의 단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만들어졌다. 원통형몸통 제1단에 대한 제27단의 지름의 비는 대략 3 : 5이며 첨성대 전체 높이에 대한 기단의 대각선 길이의 비는 4 : 5다.
이들 비의 구성요소는 3 : 4 : 5 ,직각삼각형의 밑변 : 높이 : 빗변의 비를 사용한 것이다. 물론 3 : 5와 4 : 5는 그 사인과 코사인 값이 된다. 이는 첨성대에서 피타고라스 정리가 사용되었음을 다시금 알려준다.
첨성대의 효용도 여부는 과학적인 분석에 의해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만약 첨성대가 천문대였다면 첨성대의 꼭대기에서 천문 관리가 바라본 신라의 밤하늘은 어떠했을까가 의문점이다.
경주에 위치한 신라역사과학관에 신라의 밤하늘을 재현한 천문도(天文圖)와 혼상(천구의)이 전시되어 있다. 천문도와 혼상은 연세대학교 나일성 교수가 컴퓨터를 이용하여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6년인 서기 637년의 별자리 위치로 계산한 것이다. 혼상이란 하늘의 별들을 보이는 위치에 따라 천구면에 표시한 것으로서, 별의 제작 방법은 천문도와 동일하지만 천장에 평면적으로 그린 천문도와는 달리 일주 운동에 따라 회전하면서 별들이 지평선에 뜨고 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천문도와 혼상이 첨성대를 둘러싼 중요한 의문 두 가지를 해결해 주는 뜻밖의 결과를 보여준다. 첫째는 첨성대가 왜 지금의 바로 그 장소에 세워졌는가이다. 혼상이 놓여 있는 나무 판자의 가장자리에 첨성대를 중심으로 첨성대에서 보이는 산들을 배치하였는데 그 결과 북쪽 부분에 산이 없이 뚫린 부분이 생겼다. 이것은 첨성대의 자리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한 북두칠성의 움직임을 관측하기에 적합한 자리라는 것을 말해준다. 북두칠성은 첨성대에서 바라볼 때 북쪽의 지평면에서 가까운 곳의 밤하늘에 떠올랐다. 북두칠성을 잘 관측할 수 있는 첨성대는 북쪽 부분이 산에 가리지 않고 보이는 지금의 자리에 세워질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북한의 개성시 외곽지대에 있는 고려의 첨성대, 창경궁에 있는 관천대의 경우 높이는 첨성대에 못미치지만 하늘을 관측하는데 문제가 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두 번째는 고대 천문도에 표시되어 있는 5등성의 희미한 별에 북극이라고 적혀 있는 이유가 밝혀진 것이다. 이 별은 현재의 하늘에서는 북극에서 약 6도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기린자리에 속해 있지만, 지금부터 약 2,000년 전 중국에서 별자리를 정하던 당시에는 북극에 가까이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선덕여왕의 시대에는 이 별이 북극에서 불과 1도 떨어져 있었으므로 신라 시대 사람들이 그 별을 북극이라고 부른 것이 결코 오류가 아니었음이 증명되었다.
이런 내용을 보면, 먼 별까지의 거리를 감안했을 때 높은 산에서 보는 것이나 평지에서 보는 것이나 차이도 없다. 사실 지상에서 고작 10미터 더 올라간다고 해 봐야 딱히 별을 관측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높이로 따지면 바로 옆에 있는 왕궁 경주 월성이 지형적으로 높은 언덕지형이라서 오히려 하늘에서 더 가깝다.
오히려 높은 산으로 올라 다니는 불편함을 감안할 때, 평지에서 자주 관찰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도 있다. 더구나 평지일지라도 굳이 높은 대를 만들어 놓고 관측할 필요도 없다.
김봉규 박사는 천문대라는 특정 건물이 필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매우 춥거나 더운 날 혹은 개인적 사정이 있을 때 첨성대와 같은 건물이 없으면 천문관이 관측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왕은 직속의 천문관 아닌 지방의 관료로부터 천문현상이 있었다는 보고를 받게 되는데 그들의 보고는 전문가들의 관측결과가 아님이 분명하다. 실제 『고려사』에 그런 기록이 확인되는 것을 볼 때 천문관이 보다 수월하게 매일 빠지지 않고 하늘을 관측할 수 있도록 첨성대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첨성대의 위치나 높이에 관한 지적도 천문대에서의 천문 관측을 현대의 천문학과는 성격이 매우 달라 과학 연구를 목적으로만 활용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즉 국가의 길흉을 점치는 용도로 사용하기 마련인데 이런 역할을 수행하는 시설은 당연히 왕궁에 가까워야 했다는 것이다. 즉 첨성대의 부지선정에서의 고려대상은 천체 관측의 용이성이 아닌 교통 접근성이라는 뜻이다.
첨성대에 문이 없는 이유도 설명했다. 문이 없기 때문에 사다리로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한다. 거기에는 좁지만 앉을 만한 자리가 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누군가가 다시 사다리를 가져올 때까지 천문관은 꼬박 밤을 새워 별을 볼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썩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지만, 이렇게 만든 첨성대는 대단한 효과를 거두었다는 것을 그 증거로 제시했다. 첨성대가 만들어진 이후의 천문기록 즉 첨성대가 만들어 진 직후의 일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신라 전체를 감안하면 이전의 같은 기간보다 무려 5배나 많아졌으며 천문현상의 기록도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나일성 박사는 첨성대의 효용도에 대해 매우 포괄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삼국사기』에 첨성대가 완성된 후 물시계를 만들었다는 기록을 볼 때 첨성대 아래에서 물시계로 정확한 시각 측정을 하는 동안 첨성대 꼭대기에서 조위가 서술한 대로 규표로 태양으로 생기는 그림자의 길이를 재서 1년의 길이를 정하기도 하고 해와 달을 관찰하여 절기를 구별한다. 또한 구름의 모양과 움직임을 보고 날씨를 살피고 별을 관찰하여 국운을 점치는 일들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그런 관측은 맨 눈으로 보는 것이었지만 그것 자체가 첨단 과학이었다는 것은 빠뜨리지 않았다.
삼국시대의 천문학은 신라뿐만 아니라 백제에서도 발달했다. 백제는 천문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일관부라는 기관이 있었고, 백제에서 사용한 역(歷)은 고구려와 같은 것이었다. 6세기부터 새로운 역을 쓰게 되었는데 여기서는 1년의 길이를 365.2467일로, 한 달의 길이를 29.5306일로 썼다.
백제는 일식, 월식, 행성, 유성, 지진, 우박 등에 대해 세밀하게 관측하였는데, 『삼국사기』에 혜성에 관한 관측 기록만 15건이나 있다. 특히 87년에 있었던 일식에 대한 기사는 매우 일찍부터 천문 관측이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554년에는 왕보손이, 602년에는 관륵이 천문 관측방법과 역법, 지리책 등을 일본에 전하였다.
첨성대의 진면목은 구조적인 안정성을 기했다는 점이다.
학자들은 첨성대의 설계자가 내부 정자석의 배치, 원주부 하부에 채운 흙, 창구의 위치 등을 주도면밀하게 고려하여 안정성과 기능적 곡선미에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고 설명한다. 특히 11단 아래에 채워져 있는 흙은 원형으로 인한 변형에 저항할 수 있는 내력을 만들어 축조 시에 무너지는 위험을 감소시켰고, 완공 후에는 외력과 기초부 등, 침하 및 지진으로 인한 진동 등에 대비하여 첨성대의 원형을 보존하는데 기여했다.
이는 경주에서 일어난 지진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첨성대가 세워진 후 경주에서 100여 명의 사망자를 낸 지진이 일어났는데 접착재도 사용하지 않은 첨성대에는 지진 피해를 입은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지하투과 레이더 탐사법으로 첨성대의 지층 구조를 조사해 본 결과 첨성대의 지하와 주변을 인공적으로 공고하게 기반을 다진 것이 확인 되었다. 즉 건축 당시 땅을 깊게 파서 큰 돌을 채웠고 특히 첨성대 바로 아래 부분에는 더 많은 돌들을 채웠다. 한마디로 첨성대의 장인들은 안정성과 기능은 물론 심미적인 면에도 남다른 공을 들였다는 뜻으로 1300여 년 간 비바람과 지진을 견딘 첨성대의 비결이야말로 신라 건축 기술과 예술의 개가인 셈이다. 첨성대를 겉모양만 과시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첨성대가 무려 1300여년 전에 축조되었으므로 첨성대가 현대 들어서 금이 많이 가고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짐이 심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인근을 다니는 차량의 진동이 전달되어 생기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사실 정면 사진을 보면 이상 없어 보이지만 뒷면이라든지 다른 쪽에서 보면 훼손이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다. 2014년 8월 문화재청의 특별 점검에서 첨성대는 밑에서 두 번째인 ‘D등급’을 받았다. 이를 근거로 문화재청은 2014년 10월 첨성대의 안전성에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그런데 2016년 경주 지진이 일어나면서 첨성대가 원래는 중심축에서 북쪽으로 20.4cm 비스듬히 서 있었는데, 지진으로 2cm 더 기울어졌다는 것이 발견되었지만 별다른 지진 피해가 발생하지 않아, 경주시청은 첨성대가 내진 설계로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발표했다. 특히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의 문화재대응팀의 실사에서 북쪽 석축이 지진 발생 전에 비해 약 1.2 cm 정도 벌어졌지만 균열은 없었다고 발표했다. 지진이 첨성대에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뜻이다.
참고문헌 :
「신라첨성대」, 나일성, 한국사시민강좌 제23집, 1998
「신라 첨성대에서 이룩된 업적」, 나일성, 한국사시민강좌 제23집, 1998
「천문대이자 제단인 첨성대」, 문중양, 경향신문, 2004.06.07.
「첨성대, 천문대냐 제단이냐」, 김봉규, 중앙일보, 2004. 09. 28
「[이명우 박사의 역사연구] 신라 천문학의 진수 첨성대」, 이명우, 참한역사신문, 2020.10.27
「첨성대」, 나무위키
http://newsplu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8/05/2014080500871.html
https://scienceon.kisti.re.kr/srch/selectPORSrchTrend.do?cn=SCTM00039057
『신라 과학기술의 비밀』, 함인영, 삶과꿈, 1998
『전통속의 첨단 공학기술』, 남문현 외, 김영사, 2002
『테마로 읽는 우리 역사』, 김경주 외, 동방미디어, 2004
『우리 과학의 수수께끼』, 신동원, 한겨레출판, 2008
『첨성대의 건축학적 수수께끼』, 김장훈, 동아시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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