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주인공>
전쟁이 끝나고 튜링은 1948년까지 국립물리학연구소에서 컴퓨터 개발 프로젝트 팀장으로 일했다. 1946년 미국이 만든 에니악이 놀랄만한 연산 능력을 갖추었다고 하자 그는 그보다 뛰어난 컴퓨터를 만들겠다고 자청했고 에니악의 연산 속도를 능가하는 컴퓨터를 개발했다. 그는 곧이어 맨체스터대학의 컴퓨터연구소 부소장에 임명되었고 그의 관심은 인공지능에 집중했다. 1951년에 튜링은 영국왕립학회 회원이 되었다. 그 이후 그는 급격히 추락한다.
튜링에 대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영국정보부에서 근무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튜링의 돌출적이고 비사교적인 성격 때문이다.
그가 콜로서스를 개발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싫어했는데 튜링은 멜빵 대신 새빨간 줄을 바지에 묶고 나타났는가 하면 자전거로 출퇴근하면서 봄만 되면 꽃가루를 조심해아 한다면서 방독면을 쓰고 다니는 등 기이한 행동을 많이 했다. 그를 더욱 동료들이 싫어한 것은 다음 사건 때문이다.
‘튜링은 자신이 사용하는 컵을 다른 사람이 쓰는 것을 몹시 싫어해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컵을 쓰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말이 통하지 않자 머그 컵을 남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난방기에 자물쇠로 채워놓았다.
튜링의 행동이 지나치다고 생각한 동료들은 튜링이 신경을 쓰지 못하게 한 후 컵의 자물쇠를 풀었다. 튜링이 화가 나서 펄펄 뛰는데도 동료들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자 튜링은 동료에게 총을 쏘았다. 튜링은 도망갔지만 그가 극비 중의 극비를 다루는 인물이라 지명수배도 하지 못하고 그의 사진 한 장도 구할 수가 없자 사건을 각하했다. 얼마 후 튜링이 다시 연구소로 돌아오자 동료들은 더 이상 그를 놀리지 않았다.’
튜링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그가 1954년 동성애자라는 판결을 받고 자살하지 않았다면 곧바로 노벨상을 수상했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음에도 그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가 동성애자라는 족적에 의해 자살했으며 그의 컴퓨터 발명이 전쟁의 여파로부터 탄생한 것이므로 비밀로 분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공지능(A.I.) 로봇은 물론 핸드폰을 비롯하여 제4차 산업혁명 자체가 그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하튼 그의 컴퓨터 발명과 비극적인 죽음이 알려지자 튜링 탄생 100주년을 기하여 전 세계 네티즌들 사이에서 앨런 튜링에 대한 60년 전의 법원 판결을 사면하라는 전자사면청원서가 확산되었다.
튜링이 자살하게 된 직접적인 요인은 그가 동성애자였기 때문이다. 1952년 1월 튜링은 아놀드 머레이라는 젊은 남자와 동성애 관계를 맺었지만 곧 시들해졌다. 그런데 튜링의 집에 도둑이 들자 그는 머레이가 의심스러워 추궁했다. 그가 자신의 친구가 튜링의 집을 털자고 제의했다는 것을 자백하자 튜링은 경찰에 도난 사실을 신고했다.
그런데 경찰은 튜링을 조사하면서 그가 동성애자임을 알았다. 당시 영국은 동성애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는 범죄 행위였기 때문에 경찰은 튜링과 머레이를 ‘심각한 외설죄’로 고발했다. 전쟁 영웅이었던 학자가 19세 소년과 불법적인 성관계를 맺었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려 소문이 확산되었음에도 튜링은 법정에서도 자신은 동성애가 왜 죄가 되는지 모르겠다고 순진한 변호를 하다가 유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금고형을 받든지 아니면 호르몬 요법 처방을 받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것을 명령했는데 이는 동성애를 성범죄자로 인식했기 때문으로 그는 남성 호르몬 처방을 받는 쪽을 택했다. 당시에 동성애란 남성이 남성답지 못하고 여성은 여성답지 못해 생긴 질병으로 성호르몬을 사용하면 치유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당시의 호르몬 요법은 부작용이 심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심한 스트레스를 받던 튜링은 발기 불능과 가슴이 커지는 등 부작용이 생기고 영국 정부의 일급 기밀 전산 프로젝트에서도 보안 인가를 취소당하자 결국 1954년 42살이 되던 해 맨체스터전산연구소에서 마치 화학 실험을 하다가 실수로 청산가리를 마신 것처럼 꾸며서 한 장의 유서도 남기지 않은 채 청산가리가 든 사과를 먹고 목숨을 끊었다.
당시 영국 언론에서는 평생 결혼도 하지 않은 튜링에 대해서 위대한 천재의 우울증에 의한 죽음이라고 짧게 보도했다. 그러나 그에게도 결혼 기회는 있었다. 1941년 블레츨리 파크에서 같이 암호 해독가로 일하던 조안 클라크와 가까워져 그녀에게 청혼하고 조안은 기꺼이 수락했다. 그러나 불과 며칠 후 튜링은 자신이 동성애 성향이 있어 원만한 결혼 생활이 불가능하다며 청혼을 취소하여 결국 결혼하지 못했다.
이 문제는 영국의 동성애자에 대한 엄격한 당시 정황이 개제되었지만 현재 많은 국가에서 동성애가 합법화될 정도로 세계인의 인식이 많이 변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도 뜨거운 감자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동성애자를 성범죄자로 간주하지 않지만 튜링이 받은 화학적 거세 자체는 합법화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2011년부터 「성폭력범죄자의 성충동 약물치료에 관한 법률」로 화학적 거세가 법적으로 가능하다. 화학적 거세가 도마에 오른 것은 현행 법률의 경우 16세 미만의 아동에게 성범죄를 저지른 19세 이상 성도착증 환자 및 재발 위험성이 있는 성폭행자, 2회 이상 아동 대상 성범죄자 등으로 대상이 한정된다.
화학적 거세란 남성 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이 나오는 고환을 자르는 물리적 거세와 달리 화학약물을 투입해 성충동을 억제하는 치료법이다. 대개 시상하부에서 뇌하수체를 거쳐 테스토스테론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끊거나 성선자극호르몬을 투입해 테스토스테론을 일시적으로 과도하게 분비하도록 해 이에 놀란 뇌하수체가 테스토스테론 분비를 막도록 한다.
튜링의 경우는 여성 호르몬을 투입해 남성 호르몬 분비를 억제하는 방법인데 성범죄 방지책으로서 화학적 거세가 주목받는 이유는 효과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미국 오리건주에서 가석방된 성범죄자 134명 가운데 약물 치료를 받은 사람의 경우 재범자가 없었지만, 화학적 거세에 불응한 성범죄자의 재범률은 20%에 가까운 것으로 조사됐다. 독일에서도 화학적 거세를 받은 성범죄 전과자의 경우 성범죄 재범률이 3%에 그친 반면 받지 않은 성범죄자들의 경우 46%가 다시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연구결과가 나온 바 있다.
문제는 튜링처럼 화학적 거세의 부작용이다. 성선자극호르몬을 투입할 경우 안면홍조, 골다공증과 같은 부작용을 겪을 수 있으며, 지속적인 여성 호르몬의 투입은 가슴을 나오게 하고 목소리가 얇아지는 등의 신체적 변화를 일으키기 십상이다. 더구나 화학적 거세의 효과는 치료가 진행되는 동안에만 지속될 뿐이고 주사를 맞지 않으면 원래대로 복구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즉, 현재 화학적 거세는 인권과 강력한 재범 방지책이라는 두 가지 가치의 충돌 속에서 논란을 빚고 있는 셈인데 튜링 같은 천하의 천재가 현재로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 동성애자로 낙인찍혀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그야말로 아쉽지 않을 수 없다는 설명이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법과 행하는 방법을 바꿔 놓은 사람’이라고 평가되는 튜링의 자살은 그의 과학적 업적인 컴퓨터 개발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특히 그의 성격이 다소 특이하고 동성애자라는 것도 당대에는 지탄받았지만 현재는 동성애가 큰 문제가 되지 않고 동성 간의 결혼도 허용되는 나라가 생각보다 많이 있다. 과학의 천재인 튜링이 보다 과학을 연구하지 못하게 한 것은 당대의 사회 수준 때문이라고 볼 수 있지만 학자들이 아쉬워하는 것은 그가 자살하지 않았다면 컴퓨터의 세계가 현재와 달라졌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개발된 콜로서스가 맹활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세계 최초의 컴퓨터는 에니악이라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은 콜로서스가 제2차 세계대전의 첩보전을 위해서 동원되었기 때문에 굳이 컴퓨터의 최초 개발자가 누구냐를 밝히기 위해 콜로서스를 공개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수립에 대한 세부 사항은 오늘날까지도 비밀로 남아 있는데 전 영국 정보부 간부 해리 힌슬리 경은 1986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콜로서스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비쳤을 뿐이다.
‘암호 해독작전이 상륙 계획을 효과적으로 바꿀 수 있도록 적절한 정보를 제때에 제공해 주었다.’
1974년 블레츨리파크의 암호해득 작전에 동참했던 프레더릭 윌리엄 윈터보섬(F. W. Winterbotham)이 『울트라의 비밀 The Ultra Secret』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울트라’는 암호해독 작전명으로 영국 정부가 에니그마 해독에 얽힌 이야기를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비로소 튜링을 비롯한 암호해독반의 역할이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더불어 튜링의 진가를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지만 튜링이 사망한 지 20년 뒤의 일이다.
참고적으로 동성애 때문에 범죄자로 몰린 뒤 자살한 앨런 튜링이 사후 59년 만에 사면됐다. 영국 정부는 2013년 12월 ‘그의 지대한 공헌과 과학유산은 기억되고 인정받을 만하다. 그가 독일의 암호를 해독해 전쟁을 끝내고 수천 명의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며 튜링의 업적을 기렸다. 튜링에 대한 사면 조치는 스티븐 호킹 등 과학자를 포함한 37,404명의 청원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받아들여 특별사면령을 내리면서 성사된 것이다. 2009년 영국 정부 관계자로는 처음으로 고든 브라운 당시 총리가 튜링이 받았던 처우에 대해 사과한 바 있다.
<현대 컴퓨터를 창안한 폰 노이만>
컴퓨터는 또 한 명의 천재를 등장시키는데 튜링을 프린스턴 대학교로 초청하려다 실패한 폰 노이만(1903~1957)이다. 튜링은 콜로서스를 개발했음에도 컴퓨터 개발자로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반면에 존 폰 노이만은 현대 컴퓨터를 창안한 주역의 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경제학과 군사 전략 같은 분야에 적용되는 통계학의 일종인 게임 이론을 개발한 사람인 동시에 현대 컴퓨터의 아버지로 불려지는데 존 시몬스는 현대 세계를 형성하는 데 널리 영향을 끼쳤고 또 계속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이언티스트 100’ 중에서 51번째로 거론했다.
그의 업적은 1946년에 현재의 컴퓨터와 같이 기억 장치에 컴퓨터의 명령과 수치를 함께 기억시키는 내장 방식을 고안한 것이다. 이것이 현대 컴퓨터의 기본 원리가 되어 1949년 최초의 프로그램 내장 방식 컴퓨터인 ‘EDSAC’이 완성되었다. 수은 지연 회로에 의한 전용의 기억장치는 1,024 언어의 기억 용량을 가지고 저장된 자료 및 명령에 의해서 연산을 할 수 있다.
폰 노이만은 1903년 12월 28일 헝가리에서 유태인 중산층 출신으로 태어났다. 신동인 노이만은 여섯 살 때 이미 여덟 자리 숫자를 암산으로 나눌 수 있었으며 여덟 살 때 미적분을 배웠다. 역사에도 관심을 보여 잔 다르크의 재판과 미국 남북 전쟁 전투 장면도 모두 암송할 정도였다고 한다.
추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최초의 프로그램 내장형 컴퓨터(폰 노이만 형 컴퓨터라고 부름)인 에드백(EDVAC)가 완성되었을 때 ‘드디어 세상에서 두 번째로 계산을 빨리하는 물건이 만들어졌다’라고 농담했다.
연구원들은 폰 노이만에게 장난삼아 오른쪽에서 네 번째 자리의 숫자가 7이 되는 가장 작은 2의 거듭제곱을 구하는 시합을 컴퓨터와 해 보라고 제안했다. 놀랍게도 폰 노이만이 에드백보다 더 빨리 정답을 구했다(정답은 221로 2097152). 아무리 당시 컴퓨터의 성능이 떨어진다고 해도 이쯤 되면 그의 천재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박부성 교수는 그의 암산 능력은 다음 일화로도 충분히 입증된다고 적었다.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은 문제를 폰 노이만에게 주었다.
‘20마일 떨어져 있는 두 대의 자전거가 시속 10마일의 속도로 마주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자전거를 타고 있던 한 사람의 코에 앉아 있던 파리가 시속 15마일의 속도로 반대편 자전거를 향해 날아가, 타고 있던 사람의 코에 닿자마자 다시 반대 방행으로 날기를 반복했다. 두 자전거가 만날 때까지 파리가 날아다닌 거리는 얼마인가?’
이 답은 두 자전거가 만날 때까지의 시간을 구한 다음 파리의 속력을 곱하면 간단하게 답이 나온다. 그러나 파리가 날아간 거리를 차례대로 구해서 그 일반항을 더한 무한급수를 계산해도 가능하다.
폰 노이만은 이 문제를 듣고 단 몇 초 만에 ‘15마일’이라고 대답하자 질문자는 트릭을 알고 있다며 매우 실망하는 눈치로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문제를 무한급수의 합으로 구하려 하니까요.”
이 말에 폰 노이만은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트릭이라니요. 나도 무한급수의 합으로 구했는데요.”라며 되물었다.
여하튼 암산에 관한 한 세계적인 천재라 볼 수 있는 폰 노이만은 1921~1923년에 베를린 대학, 1923~1925년에는 취리히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고 1926년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0년 말부터 게임 이론에 대한 관심을 보였는데 그는 다양한 우연 게임과 그 게임을 진행하기 위한 전략적 규칙을 수학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1928년에 발표한 「실내 게임 이론」에서 그는 상대방의 잠재적인 전략이 최선의 수를 발견하는 데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 체스같이 ‘엄격한 조건이 규정된 게임’과 포커와 같이 전략이 상호 연관되어 있는 게임을 따로 구분했다. 그는 포커의 경우 경기자가 전략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최적의 ‘혼합 전략’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1944년에 그는 『게임 이론과 경제 행위』를 출간한다. 경기자가 연합하는 것이 유용하다는 비(非)제로섬 게임 개념도 폰 노이만이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과학사에서 끼친 가장 중요한 역할은 역시 컴퓨터 개발이다. 1943년 초, 미국은 로스알라모스연구소에서 본격적인 원자폭탄 개발에 들어갔다. 문제는 고온, 고압 기체 내에서 고속충격파 및 연쇄반응에 대한 계산으로 당시의 탁상용 계산기로는 주어진 시간 내에 계산을 마칠 수 없었다. 이때 자문위원으로 참여한 노이만은 마침 에니악을 개발하고 있던 존 윌리엄 모클리와 프레스퍼 에커트를 만난다.
그는 에니악을 보고 ‘19,000개의 라디오 진공관으로 두뇌를 모방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생각했다고 술회했을 정도로 에니악은 10미터가 넘는 길이에 무게 30톤이 넘는 초대형기계였다. 노이만의 참여로 에니악은 원자폭탄의 분열 계산을 예정된 시간에 마칠 수 있었고 결국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을 탄생하게 만든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폰 노이만은 프로그램 저장장치라는 개념 즉 프로그램 된 컴퓨터를 개발하는데 기여한다. 에니악은 필요한 연산과 데이터를 모두 펀치카드로 입력해야 했는데 이럴 경우 컴퓨터가 실제로 계산하는 데 필요한 시간보다 연산을 읽는 시간이 더 들어갈 수 있다. 노이만은 튜링의 논문에서 힌트를 얻어 프로그램을 메모리에 내장한 컴퓨터 아이디어를 도출한다. 소위 ‘폰 노이만 구조’라 불리는 이러한 기본구조는 지금까지도 모든 컴퓨터의 기본 구조에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문서를 작성하거나 게임을 하기 위해 컴퓨터를 켜는 순간 우리들은 튜링과 노이만이 제시한 아이디어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엘 셔킨은 ‘폰 노이만의 천재성은 다른 사람들이 기계에 조잡한 디지털 명령을 쓰는 동안 그는 컴퓨터가 존속하는 한 수정을 거치면서 존속되는 명령을 개발했다는 데 있다.’고 적었다. 오늘날 프로그램의 구조를 표시할 때 사용하는 흐름도(Flow Chart)도 노이만과 메트로폴리스가 1950년대 초에 개발한 것이다. 그의 컴퓨터가 활용한 첫 번째 프로그램은 기상예측이었고 미국 국방부에서 곧바로 채택했다.
물론 그가 초기에 컴퓨터를 설계할 때 비인간적인 측면을 강조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컴퓨터를 작업장과 수천만 명의 일상 생활 속으로 파고들도록 유도하면서 ‘인간의 인간적 활용’이라는 개념을 배제했다는 것이다.
유태인 출신인 폰 노이만 가문은 매우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1930년경 반유태주의를 피하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했고 사망하기 직전에 카톨릭으로 개종했지만 생애 대부분 무신론자였다.
병석에 있는 동안 친구들과 군 인사들이 자주 문안을 했지만 그가 치매 현상으로 자주 헛소리를 하고 기밀을 누설하자 침대 곁에 군인 한 명을 배치했다. 그러나 그가 헛소리를 자주 했지만 헝가리어로 말했기 때문에 원자폭탄에 관한 비밀은 누설되지 않았다고 추정한다. 그는 1957년 2월 8일 췌장암으로 눈을 감았다.
참고문헌 :
「튜링 100주년의 화학적 거세 논란」, 이성규, 사이언스타임스, 2012.08.30.
『20세기 대사건들』, 리더스다이제스트, 1985
『사이언스 오딧세이』, 찰스 플라워스, 가람기획, 1998
『과학, 그 위대한 호기심』, 서울대학교 자연대 교수 외, 궁리, 2002
『세계를 바꾼 20가지 공학기술』, 이인식 외, 생각의 나무, 2004
『천재들의 수학노트』, 박부성, 향연, 2004
『미래와 진화의 열쇠 이머전스』, 스티븐 존슨, 김영사, 2004
『위대한 패배자』, 볼프 슈나이더, 을유문화사, 2005
『과학으로 생각한다』, 이상욱 외, 동아시아, 2007
『과학과 인문학의 탱고』, 황진명 외, 사과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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