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로부터 만들어진 인간>
『종의 기원』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생명관 즉 진화론을 옹호하는 주장을 담고 있지만 매우 방어적인 책이다. 그는 다른 과학자들이 진화론을 오랫동안 비웃을 것이라는 것을 오래 전부터 상상하면서 책을 썼기 때문이다.
여하튼 다윈은 자신이 역설하는 진화론에 두 가지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우선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의 증거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정황적인 것이지 확연한 과학적 사실에 의해 증명될 성질이 아니라는 점이다. 두 번째로는 그가 믿고 있는 믿음에 명백히 반한다는 것이다. 종의 독자성과 불가침성, 생명의 목적성, 그리고 인간의 도덕적 지위가 그의 이론에 의해 손상 받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다윈은 이런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매우 명쾌한 접근을 시도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완전히 증명했다고 말하지 않고 자연선택은 생물체의 다양성에 대한 주요 원인일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 이 가정에 의할 경우 이제까지 생물계에서 혼란스럽고 연관이 없이 보이는 모든 종류들의 생명체의 존재 이유와 방법에 대해 쉽게 설명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의 논증에서 돋보이는 점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이론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솔직하게 나타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문제점들이 왜 진정한 문제거리가 되지 못하는 가를 적었다는 점이다.
다윈이 제15장 <요약과 결론> 마지막 부분에서 생명이 최초에 창조자에 의하여 탄생되었다고 설명하면서 솔직하게 자신이 모든 분야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고 실토했다는 것도 중요한 내용이다. 다윈이 결코 교회를 부정하거나 폄훼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윈의 진화론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보다 더 큰 충격을 인간에게 준 것은 다윈의 진화론은 코페르니쿠스처럼 천체가 아니라 인간 자체에 대한 의문점을 당대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르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사실 보통 사람들에게 지구가 태양을 돌든 태양이 지구를 돌든 일상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전혀 없다.
그런데 다윈의 진화론은 각 개인의 선조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그 설명에 의하면 지상의 영장물이 인간의 선조가 원숭이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는 전능한 창조주인 신의 자리를 빼앗는 것으로 종교적 감성과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보다도 인간을 동물과 연결시켰는데 그 장본인이 바로 원숭이라고 유추된다는 점이다. 그의 이론을 좀 더 전개하면 인간의 독보적인 자산인 영원불멸한 영혼의 존재도 부정하는 것으로 비화되어 심지어 사회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다윈은 인간이 원숭이의 자손이라고 주장한 적은 없다. 다윈은 지구에 사는 무수한 종이 공동조상들로부터 거듭된 분화의 결과물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원숭이에서 분리된 것과 다름 아니라고 이해된 것이다.
여하튼 다윈의 반대자들이 가장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단순히 원숭이의 변종이라면 도덕성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당시의 식자들은 인간과 동물의 가장 분명한 차이는 지적 능력이라고 보았다. 언어 구사력과 논리적 사고라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이 인간에게 특별한 별도의 지위를 부여했는데 다윈이 이러한 인간의 존엄성을 원천적으로 훼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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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이 예상한대로 당대의 식자들과 종교계에서의 반발이 거셌다. 다윈이 가장 믿고 따르던 헨슬로 교수마저 그가 열심히 연구한 것을 알고 있지만 다윈의 주장이 너무나 터무니 없으므로 진화론에 찬성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당대의 유명한 작가인 칼라일도 다윈이 사람을 원숭이 친척으로 생각한다고 비난했다. 특히 후에 수상이 되어 영국 민주주의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대정치가로 거명되는 벤자민 디즈레일리(1804~1881)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그는 다윈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지금 사회 앞에 놓여 있는 의심할 바 없이 가장 놀라운 질문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은 원숭이인가 그렇지 않으면 천사인가’라는 질문이다. 나는 천사 편을 들겠습니다.”
이와 같은 반응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다윈이지만 종교계에서 너무나 큰 반발을 일으키자 다윈은 ‘왜 자신의 생각이 사람들의 종교 감정에 충격을 주는지 잘 모르겠다’고 실토할 정도였다.
<원숭이 조상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다윈의 진화론이 각 분야에서 논란거리가 되고 사회적인 충격으로 당대의 지적 세계에 일대 혼란 상태로 몰아가자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공개토론이 1860년 6월 30일 옥스퍼드의 <영국과학진흥협의회>의 연례회의 석상에서 벌어졌다. 700명이 넘는 청중이 강당에 빽빽하게 찼고 중앙 부분은 검은 성직자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상당수 차지하고 있었다. 『종의 기원』이 발간된 지 6개월 후이다.
처음에는 뉴욕 대학에서 초빙된 존 윌리엄 드레이퍼 교수가 「다윈의 견해를 중심으로 살펴본 유럽의 지적 발달」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그것은 사실상 다윈의 진화론과 사회의 진보를 주제로 한 것으로 『종의 기원』이 발간된 지 6개월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진화론이 사회 각계에 널리 알려지고 논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날의 ‘메인 이벤트’는 드레이퍼 교수의 강연이 아니었다. 바로 진화론에 대한 공개토론이었다. 진화론을 옹호하는 편에서는 다윈의 옹호자인 생물학자 헉슬리가, 반대파에서는 당시 영국학술원의 부원장이자 옥스퍼드대학의 주교인 사무엘 윌버포스 주교가 나왔다. 그는 소피샘(Soapy Sam)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비누처럼 미끌미끌하고 번드르르한 말투나 태도 때문으로 사람들을 언변으로 취하게 만드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월버포스 주교는 당대에 유명한 조류학자로서 노예해방에 앞장 설 정도로 혁신사상을 갖고 있는데다 다윈과도 두터운 교분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월버포스는 자신이 다윈의 진화론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적에 대한 충분한 자료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당시 최고의 비교해부학자로 인정받고 있는 리처드 오언 경으로부터 다윈을 공격하기 위한 사전 지식을 충분히 받았다.
다윈의 진화론을 옹호하기 위해 나선 사람은 토머스 헨리 헉슬리로 동물학․지질학․인류학의 대가로 명쾌한 문장으로 유명했고 뛰어난 연설가이기도 했다. 그가 다윈을 옹호하는 데는 진화론을 옹호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동료인 성직자 찰스 킹슬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을 위한 것이든 악을 위한 것이든 거대하고 강력한 도구인 영국국교회가 밀려와 과학의 물결을 산산조각 나도록 하는 것을 막으려면(특히 월버포스 같은 사람들이 그 운명을 이끈다면 필연적으로 봉착하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교회의 행동과 과학의 정신을 결합하는 방법을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한마디로 헉슬리는 진화 과학과 종교는 공존할 수 있지만 극단주의자들의 공격이 난무하는 상황에서는 공존할 수 없으므로 자신이 다윈을 옹호하는데 나섰다는 것이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헉슬리 자신은 다윈의 자연 선택 과정을 결코 믿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는 와전된 이야기로 보인다.
다윈보다 16살이 어린 헉슬리가 다윈을 지지하는 대표선수가 된 것은 다윈의 진화론이 그야말로 세상을 혼돈스럽게 만들자 다윈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나이는 어리지만 다윈을 존경하고 평소에도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선생님의 생각에 반대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바보 같은 사람들이 아우성치고 있는데 저는 그들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 편지를 읽고 감동한 다윈은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이제 마음이 놓인다. 나는 지금 죽어도 억울하지 않다.’
다윈에게 직접 편지를 쓰면서 다윈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다짐한 헉슬리가 다윈의 진화론을 진정으로 믿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할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드레이퍼 교수의 강연이 끝나고 자신에게 발언권이 돌아오자 윌버포스는 처음에 “과학적인 오류를 과학적인 근거에 입각해서 지적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오류가 창조주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라는데 심각성이 있다.”고 말하면서 다윈이 그런 오류를 저질렀으며 그는 허황한 가설을 토대로 자연선택이라는 설을 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다윈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다음과 같이 대안을 제시했다.
“모든 피조물은 신의 마음 속에 영원히 존재하는 생각이 발현된 것으로, 피조물 사이의 완벽한 질서가 신의 창조 작업을 채우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은 신의 마음 속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중략) 만약 누가 동물원의 유인원이 자신의 조상이라는 것을 증명한다면 얼마나 불쾌하겠습니까.”
연설을 마치면서 친 월버포스는 농담으로 진화론에 대해 익살스럽고 비꼬는 말투로 헉슬리에게 공손하게 물었다.
“원숭이의 자손이라고 주장한다면 당신 할아버지와 할머니 중 어느 쪽을 말하는 건가요?”
폭소와 박수갈채 속에서 윌버포스 주교가 자리에 앉자 헉슬리는 무릎을 치며 “신은 그를 내 손에 넘겨주셨다”고 옆 사람에게 속삭이고 일어섰다. 그는 다윈의 이론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고 다음과 같이 말을 마무리했다.
“마지막으로 원숭이의 후손에 관한 이야기인데 나는 조상으로 원숭이를 갖는 것을 창피하게 여기진 않지만, 진실을 흐리게 하기 위해 자기의 위대한 재능과 영향력을 겸손한 탐구자의 명예를 더럽히고 조롱하는데 사용하는 ‘인간’보다는 차라리 ‘비천한 원숭이’의 후예가 되겠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주교님께서 다윈의 책을 한 페이지도 읽어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따라서 식물학에 대해서는 전혀 모를 것입니다.”
헉슬리가 과학계에서는 만만치 않은 실력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당시 월버포스와 같이 유명한 주교에게 모욕을 가한다는 것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청중의 반응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청중으로 참석한 성직자들은 분노하여 고함을 질렀고 다윈의 지지자들은 윌버포스의 공격이 있은 다음 받은 박수만큼 요란하였고 브루스터 부인은 기절까지 하였다. 윌버포스는 그에 대한 헉슬리의 공격에 놀라 마지막 발언마저 사양했다.
25년 전에 다윈과 함께 비글호에 동승하여 다윈의 진화론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장본인인 로버트 피츠로이 선장은 성서를 높이 들고 “성경. 성경. 이것이 진리의 근원이요.”라고 외쳤고 이후 다윈과 완전히 갈라선다(피츠로이는 그후 자신이 개발했던 일기예보 방법이 비판을 받자 60세가 되던 해에 자살했다). 그가 동 회의에 참석한 것은 폭풍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 위해서였다.
다음에는 영국의 저명한 분류학자이자 식물학자인 조지프 돌턴 후커가 마지막 연설을 했다. 그는 윌버포스가 다윈의 책을 잃지 않았음이 분명하며 식물학의 기초도 잘 모르는 것이 명백하다고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정타를 날렸다.
‘나는 이 이론을 15년 전에 알았습니다. 그때 나는 이 이론에 전적으로 반대했습니다. (중략) 그러나 그후 나는 박물학에 매진했고 연구를 위해 전세계를 여행했습니다. 전에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이 분야의 사실들이 하나씩 이 이론으로 설명되었고 거기서 생겨난 확신은 전혀 그럴 의사가 없었던 나를 서서히 개종시켰습니다.’
진화론이 판정승하였음은 물론이지만 양 편은 모두 자신들이 상대방을 이겼다고 주장했다. 정작 다윈은 이 유명한 논쟁 장소에 없었다. 그는 리치먼드에서 지병을 치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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