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수상자 바빌로프의 항복>
카머러가 자살하여 구소련 위정자들을 낙담하게 만들더니 곧이어 제2탄이 터졌다. 사건의 진원지는 1904년 러시아인으로는 최초로 반사작용을 연구하여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이반 파블로프(Ivan Petrovich Pavlov)이다. 파블로프는 공산당 간부들과 여러 면에서 마찰을 빚어 1927년에는 <과학아카데미>에 새로 임명된 ‘적색 교수’들에 대해 자신만이 유일하게 반대투표를 했다는 사실에 비탄하면서 스탈린에게 항의 편지를 보낼 정도의 강골이었다.
‘러시아 지식인들의 기를 꺾고 영혼을 말살하며 타락시키는 당신의 그런 행동 때문에 나는 러시아 인으로 불리는 것이 수치스럽다.’
파블로프는 카머러가 자살하기 전인 1923년 획득된 행동이 흰쥐에서 유전된다는 주목할 만한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이 새로운 실험은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 준 조건반사, 즉 고도의 신경작용이 유전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흰쥐는 벨 소리를 듣고 먹이를 주는 곳으로 달려가도록 훈련되었는데, 제1세대는 300회의 학습이 필요했으나 그 새끼는 불과 100회의 훈련으로 익혔다. 3대째는 30회, 4대 째는 단 10회만으로 충분했다.
“내가 페트로그라드를 떠나기 전에 본 제5세대는 5회의 학습으로도 충분했다. 제6대에 대해서는 귀국한 후에 실험할 예정인데 어느 세대가 되면, 흰쥐는 사전에 학습을 하지 않더라도 벨소리를 들으면 먹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갈지 모른다.”
그러나 6대에 걸친 흰쥐의 실험은 놀랍게도 실험 조수가 조작한 것이 발견되어 파블로프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고백하고 실험 결과를 모두 철회했다. 물론 파블로프는 라마르크주의의 주장이 틀리지는 않았을지 모른다며 습득된 형질변경 이론 자체를 취소하는 것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파블로프와 카머러의 실패는 공산당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형질변경 이론에 사망선고를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카머러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자살했고 노벨상을 수상한 파블로프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한 상태였다. 소련 공산당이 적극적으로 지지하던 단시간 내의 형질변경 이론이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하자 민주 진영은 물론 창조론자들이 쾌재를 불렀음은 물론이다. 한마디로 공산진영이 철저하게 견지하려던 형질변경이라는 중요한 논제는 완전히 폐기처분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혜성처럼 나타난 구원투수가 소련의 유전학자이자 정치가로 볼 수 있는 트로핌 데니소비치 리센코(Trofim Denisovich Lysenko)이다. 그는 카머러와 같이 습득된 형질이 변경된다는 증거를 찾았다고 주장했는데 카머러는 동물에서 찾았다고 주장한 반면 리센코는 식물에서 찾았다고 주장했다. 소련의 공산당이 환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소련의 구원투수>
리센코는 1898년 9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지방 폴타바의 카를로프카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농부였으므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다가 부유한 지주들을 위한 정원사를 양성하는 폴타바 원예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에 우만에 있는 농과대학을 거쳐 1922년에는 키예프 농과대학을 졸업하였다.
리센코는 농학자로 만족하지 않았다. 오르조니키드제 중앙식물품종개량연구소에서 콩의 새 품종을 연구하여 식물이 생장 시기마다 필요로 하는 온도, 빛, 습도가 다르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이들 논문은 학계의 커다란 주목을 받았는데 1928년 밀의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는 ‘야로비 농법’을 발표하여 당시의 집권자들을 놀라게 했다.
원래 야로비 농법이란 겨울철 농작물의 씨앗을 몇 주 동안 저온 처리하여 봄철에 심는다는 것으로 ‘춘화(春花)처리’라는 이름으로 수백 년 동안 농민들이 사용한 방법이다. 소련은 정부가 국민들의 식량을 책임지는 공산주의이므로 농산물 증산이 가능하다는 그의 주장은 곧바로 채택되었고 소련의 많은 지역에서 그의 방식을 채택하여 농사에 들어갔다.
당시 러시아 농업은 관료들마저 넋을 잃을 정도로 엉망이었는데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소맥을 재배하는데 춘화처리를 조직적으로 적용한 결과 과거보다 3배의 수확을 얻었다고 우크라이나인민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보고했을 정도다. 그는 이어서 툰드라 지방에는 토마토, 중앙아시아 지역에는 사탕무를 재배하는 것이 좋다고 제안했다. 리센코의 업적은 워낙 두드러졌으므로 1930년에 오뎃사 유전학연구소장으로 임명된다.
호밀과 밀은 두 가지의 개화 행동 범주로 구분된다. 예를 들어 봄밀은 봄에 파종하여 같은 해에 개화한다. 이것은 일년생 식물이다. 반면에 겨울밀은 이년생으로 가을에 파종되어 다음해 여름에 개화한다. 만약 겨울밀이 첫해 후에 저온에 노출되지 않으면 이들은 다음 해에 정상적으로 개화되지 않는다. 이 말은 러시아와 같이 겨울이 추운 곳에서는 겨울밀이 봄밀보다 더 좋은 작물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러시아의 일부 지역에서는 겨울에 너무 추워서 겨울밀을 재배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겨울밀의 종자를 미리 물에 저온 처리한다면 겨울밀이 봄에 파종되어도 그 해에 정상적으로 자라고 개화했다. 매우 혹독한 지역에서도 고수율의 겨울밀이 재배될 수 있다는 것으로 이와 같은 저온에 의한 개화유도를 ‘춘화처리’라고 한다.
춘화처리는 대략 영하 2도에서 영상 12도의 범위의 저온에서 50일 정도 실시한다. 몇몇 식물 종은 개화를 위해 춘화처리와 장일 조건 모두를 필요로 한다. 겨울의 추운 날로부터 여름의 장일 조건까지 오래도록 기다려야 하지만 춘화처리된 상태가 최소 200일까지는 쉽게 지속되기 때문에 이런 식물은 적절한 밤 길이를 겪음으로써 정말로 개화한다.
이 내용 자체는 그동안 러시아에서 잘 알려진 내용이지만 리센코가 큰 호응을 받은 것은 이전의 농부들이 경험에 의해 야로비 농법을 사용했던 것과는 달리 이론적인 근거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밀의 유전적 성격을 아주 단순하게 변형시킨 야로비 농법이야말로 ‘신라마르크주의’가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주장이 일파만파의 파장을 몰고 왔다.
리센코의 출발은 매우 좋았다. 리센코의 발표는 같은 분야에서 위대한 소련 과학자로 이 장의 주인공 즉 과학의 순교자로 알려지는 니콜라이 아바노비치 바빌로프(Nikolj Ivanovich Vavilov)로부터 ‘소비에트 과학에서의 혁명적 발견’이라는 찬사를 받았을 정도다. 1935년에 리센코는 제2차 ‘콜호즈 전위 농민회의’에서 자신의 이론 즉 단시간의 형질변경이 옳다는 것이 학문적으로 증명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리센코는 자신만 앞세우는 독선만 부린 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접근법을 러시아의 저명한 생물학자인 미추린(Ivan V. Michurin)의 이름을 따 ‘미추린주의’로 표현했다. 미추린은 레닌의 지원을 받아 품종 개량에 큰 성과를 보인 사람으로 리센코가 그의 죽음을 계기로 자신의 논리를 위대한 과학자인 미추린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그의 발표가 나오자 서방측에서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서방 즉 민주진영은 카머러와 바빌로프조차 이미 항복한 사항인데도 불구하고 단기간에 형질변경이 가능한 것이 ‘참’이라고 주장하자 리센코에게 형질변경이 된다는 엄연한 증거를 대라고 다그쳤다. 리센코는 자신이 발표한 내용이 증거라며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았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소련에서도 학자들의 주장이 양쪽으로 나뉜다. 리센코의 주장이 맞는다는 주장과 서방측의 의견처럼 단시간에 형질변경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바빌로프는 처음에 리센코의 주장을 지지했다가 후자로 돌아선 사람이다.
1948년 ‘세계주의’를 표방하는 스탈린의 투쟁이 절정기에 이를 때, 스탈린이 직접 리센코의 「생물학의 입장에 관하여」라는 논문에 주석을 붙이고 수정까지 하였다. 이에 힘입은 리센코는 소련의 과학계를 획기적으로 바꿀 새로운 계획에 착수하며 미추린 주의를 기본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추린 주의는 유일하게 승인할 만한 과학이다. 미추린주의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인민에게 이롭게 변화하는 자연이란 원칙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미추린주의를 학생들에게 가르쳐야하므로 기존에 설립되어 운영되던 유전학 과목의 폐강, 교과서의 개편, 연구소의 폐쇄 등 조치들이 잇달았고 소련 과학계 전체가 커다란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물론 리센코가 정치적인 전투에만 나선 것은 아니다. 그는 기본이 학자이므로 서방측의 요구대로 형질변경의 증거들을 계속 발표했다. 한마디로 리센코는 자신의 주장하는 습득된 형질이 변경될 수 있다는 이론적 근거를 내세우며 서방측 학자들의 지적을 조목조목 반격했다.
논제의 요점은 자연 속에서 자발적인 변형 유전의 예를 발견했다는 것인데 밀 이삭에서 호밀이 자라났다는 것이다. 밀이 보리나 귀리로 변할 수 있으며 나무들도 종을 바꾸어 다른 품종으로 거듭 태어난다는 뜻이다. 봄철에 자라는 마카로니 밀(염색체28)을 보통계 밀(염색체42)로 변형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리센코의 논지는 환경의 조작에 의해 유전적인 변화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으로 염색체가 달라진다는 것이 형질변경의 증거라는 설명에 주목하기 바란다.
리센코가 발표하는 논문을 엄밀히 검증한 학자들은 그를 지지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당시에 습득된 형질이 변경된다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해 안달하던 차에 리센코가 염색체가 달라진다고 주장한 것은 학술적인 면에서 큰 진전을 이루었다는 평가였다.
그의 정치적 성향은 어떻든 리센코는 유전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학자로 부각된다. 서방 과학자인 앨런 모턴은 1951년에 『소련 유전학』이라는 책을 발간하면서 리센코주의는 ‘세계 역사상 혁명적인 사건’이라며 극구 칭찬했다.
문제는 리센코가 서방학자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습득된 형질이 단기간에 일어날 수 있다고 기염을 토했지만 서방세계의 학자들은 이를 공산당의 상투적인 선전으로 일축하면서 리센코가 내세운 내용 자체를 믿을 수 없다고 무차별 공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공산당이 만든 논문이므로 조작이 분명하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결국 형질변경을 둘러싼 진화론은 논문의 진위여부를 떠나 서방세계와 공산세계 학자들 간의 자존심 싸움으로까지 비화되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리센코가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리센코가 불리해지기 시작한 것은 간단하다.
우선 리센코는 스탈린의 강력한 지원 하에 전국 농업과학아카데미 회장에 취임한 후 자신이 주장하는 형질변경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제거하는데 앞장섰다는 점이다. 그의 주장은 간단하다. 자신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 서방학자들은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인데 이데 동조하는 소련학자들도 외국인들의 농간에 놀아나는 반동이며, 새로운 소련의 농업으로 러시아 민족을 먹여 살리려는 계획에 찬물을 뿌리는 매국노라고 규탄했다.
그런데 리센코에게 파국이 찾아왔다. 철의 장막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스탈린의 강력한 지지를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는 없는 일인데 스탈린이 1953년에 사망한 것이다. 리센코에 대한 반대세력들이 벌떼같이 일어났음은 물론이다. 리센코에게 ‘무식한 독단주의자’라며 반발했다. 리센코는 1956년 농학아카데미회장직에서 물러났다.
리센코에게 닥친 두 번째 악재는 그의 이론과 기술을 토대로 소련의 많은 지역에서 그의 주장대로 농사에 적용했지만 식량생산이 획기적으로 증산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밀이 습기에 의해 완전히 썩는가하면 밀이 싹트더라도 파종기 안에서 엉클어지기 일쑤여서 손으로 심어야 했다. 어떤 환경에서는 수확이 늘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수확이 비약적으로 늘어나지 않고 오히려 작황이 나쁜 경우도 있었다.
현장에서 농부들이 춘화 방법을 제대로 접목시키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여하튼 결과적으로 소련의 농산물 수확이 당초의 생각보다 획기적으로 증진되지 않았다. 결국 리센코는 1963년 공식적으로 비판을 받고 유전연구소소장에서도 물러나며 러시아 과학계에서도 매장된 후 1976년 쓸쓸히 눈을 감았다.
리센코주의가 소련에서 큰 파문을 일으키자 이를 반긴 것은 자유진영 학자들이다.
이들은 일사불란한 공산당에서 스탈린이 강조한 논리조차 분란을 일으키는 것을 볼 때 리센코의 이론이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점은 서방에서 계속 물고 늘어져 정치적인 목적에 과학이 영합할 때의 단적인 폐해로 계속 거론되었고 공산주의가 실패하는 근본 요인으로까지 비화되었다. 좀 더 진지하게 말한다면 리센코는 이데올로기와 상충하는 과학을 거짓 틀에 맞추려고 했기 때문에 과학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는 뜻이다.
더구나 공산주의 체계인 소련에서 진화론을 옹호한다는 것은 창조론자들에게 진화론을 공격할 또 다른 빌미를 주었다. 무신론자인 공산주의자가 신봉하는 진화론은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해악을 입힌다는 것이다.
진화론은 과학적인 근거도 미약한데다가 공산당이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을 볼 때 틀린 이론이 틀림없으며 이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창조론뿐이라는 주장이었다. 진화론을 둘러싼 논쟁이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오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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