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 노벨상이 만든 세상/컬러 사진

먹튀 노벨상 대명사, 컬러 사진(1)

Que sais 2020. 9. 30. 17:04

youtu.be/IlAq8XeSfBw

링컨 대통령18631119게티스버그에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이라는 단 272 단어의 짤막한 말로 민주주의가 무엇이냐를 단적으로 설명한 연설을 했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많은 역사가들이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그 유명한 연설 장면을 찍은 사진이 단 한 장도 없다는 것이다그가 연설할 당시에도 사진기는 있었지만 링컨의 연설문은 겨우 272단어에 불과하여 사진사들이 사진을 찍기 전에 이미 연설이 끝났기 때문이다.

현재 같으면 사진을 찍겠다고 포즈를 취해달라고 하겠지만 당대에는 그것이 쉽지 않았다.사진 한 장 찍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므로 대통령몇 십 분을 다시 연단에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는 어떠한가. 관광지에서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자신이 직접 방문하고 목격한 장면을 후에 다시 보고 또 타인에게 설명해 주기 위해서 부지런히 셔터를 누르고 있다. 특히 핸드폰이 등장한 이후 축구나 야구를 비롯한 스포츠 게임에서 중요한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다. 그들의 말은 대동소이하다.

 

남는 것은 사진뿐이다.’

 

그러므로 커다란 카메라를 갖고 사진 찍기에 좋은 장소를 찾으려고 경쟁하는 사람은 언론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참여한다. 이제 현대인들에게 있어서의 사진은 생활에서 떼어낼 수 없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유용한 물건을 발명한 사람에게 노벨유언한 노벨상이 돌아간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천연색 사진으로 1908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리프만(Gabriel Lippmann)에게는 노벨상 사상 최악의 수상, 먹튀 수상자중에 하나라는 수식어가 계속 따라다닌다. 사진기 개발을 먼저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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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반할 수 있는 어두운 방>

사진, 포토그래피(Photography)의 어원은 그리스어'Photo', 'graphy'쓰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가 늘 접하고 당연히 생각하는 사진의 뜻인간의 손 대신 빛으로 기록된 그림을 뜻한다.

 

사진기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어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아리스토텔레스 안을 어둡게 한 뒤 한 쪽 벽면에 바늘구멍을 뚫어 놓으면, 밖에 있는 물체의 영상이 비록 거꾸로 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바늘구멍을 통해 방 안의 벽면에 비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일식(日蝕)이 있을 때 이런 방법을 이용하여 해의 일그러진 모습을 확인했다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방법은 900년 전 아라비아이븐 알 하이삼(Abu Ali al'Hasan Ibn al'Haitham)도 기록했다. 서유럽에서는 알하젠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 그는 빛과 눈에 관한 연구에서 어둡게 한 방의 창문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태양의 빛을 들어오게 해서, 태양을 직접 보지 않고도 벽에 비친 태양을 통해 일식의 모양을 자세히 볼 수 있다고 적었다.

그는 빛의 반사와 굴절의 법칙도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여러 색으로 분해하는 실험도 했다. 그리고 그림자가 생기는 원리, 일식 현상, 무지개 등에 대해서도 상세히 연구하여 서유럽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광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이 현상을 이용하면 태양의 형태뿐만 아니라 야외의 경치도 비치게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을 나타나게 하는 방을 라틴어어두운 방(카메라 옵스큐라, camera obscura)이라고 불렀는데, 현재 쓰이는 카메라라는 단어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옵스큐라빛이 차단된 상자 한쪽 면에 작은 구멍을 뚫으면 바깥 풍경의 상이 상자 안의 반대쪽 벽면에 거꾸로 맺혀지게 만들어진 기구이다.

 

이탈리아의 과학자인 포르타(Giambattista della Porta)는 그의 저서인 자연의 마법에서 카메라 옵스큐라의 여러 가지 재미있는 성질을 소개하고 그것을 이용하면 사생화의 윤곽을 쉽고 정확하게 잡을 수 있으므로 화가들이 그것을 사용하면 유용할 것이라고 권장했다. 실제로 카메라 옵스큐라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비롯한 화가들에 의해 밑그림의 윤곽을 그리는 도구로 발전했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진짜로 어두운 방이었으므로 운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들어오는 입구 역시 그저 작은 구멍일 뿐 렌즈 같은 것이 붙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구멍이 작은 경우에는 벽에 비치는 상이 어두웠고 구멍이 큰 경우에는 상이 희미해져 확실하게 보이질 않았다.

 

우리나라에도 이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세종대왕 당시 태양의 고도 측정을 위해 만든 동표(銅表)가 이러한 방법을 이용한 것이다. 동표미세한 구멍을 뚫어 놓고 이 구멍을 통과한 태양빛카메라 옵스큐라와 비슷하게 만들어 놓은 장치에 상이 맺히도록 하여 태양의 일식, 형태, 빛의 강도 등을 관찰했다.

정약용칠실관화설(漆室觀畵說)이란 글에서 어두운 방 안에 앉아 방문에 뚫어 놓은 바늘구멍을 통해 들어온 빛이 벽면에 비치도록 함으로써 바깥의 경치를 감상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런 현상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이를 실용화시키지는 못했다.

 

한편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카르다노(Girolano Cardano)1550구멍 부분볼록 렌즈를 붙이면 밝은 상이 생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볼록렌즈을 모아서 종이에 초점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밝은 상을 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발견이었다.

베네치아의 귀족인 바르바로(Danielo Barbaro)카르다노의 발명을 더욱 개량하여 렌즈 앞에 조리개를 부착하여 빛의 양을 조절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러나 단순하게 구멍을 내거나 렌즈를 붙인 경우 벽에 비치는 경치는 항상 거꾸로 보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불편하였다. 1573이탈리아의 단티(Egnatio Danti)볼록렌즈 대신에 오목렌즈을 붙이면 상이 똑바로 보인다는 사실을 알았다.

 

학자들은 곧바로 크기가 작고 운반할 수 있는 어두운 방을 만들려고 시도했다.

처음에 개발된 것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것으로 매우 불편했다. 독일카스팔 숏트(Kaspar Schott)두 개의 상자를 연결시켜 그것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게 함으로써 렌즈의 초점을 맞출 수 있게 하여 크기를 오늘날의 카메라처럼 작은 상자 수준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독일의 스트룸(Johann Christoph Strum)최초의 반사식 카메라를 만들었는데 이 카메라는 렌즈의 축에 직각으로 장치된 거울을 이용하여 카메라 위의 기름종이에 상을 비추도록 했기 때문에 매우 편리했다.

 

<실용적인 카메라 등장>

학자들은 보다 실용적인 카메라 개발에 도전했다.

우선 화학의 발전광학분야보다 늦게 이루어졌지만 1725년 독일의 천문학자 슐츠(Johann Heinrich Schultz)는 우연히 사진화학의 기본이 되는 빛과 은의 반응을 발견했다. 그는 은 화합물이 든 플라스크 표면종이도형을 붙여놓고 이를 햇볕에 두었을 때 종이도형에 가려졌던 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 플라스크검게 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800웨지우드(Thomas Wedgewood)카메라 옵스큐라와 은 화합물을 연결시켜 상을 만드는 방법을 고안했다. 웨지우드는 과학자로 잘 알려진 데이비(Humpry Davy)와 함게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하여 질산용액바른 종이 위에 상을 기록할 수 있었으나 이때 만들어 진 상을 영구히 정착시키지는 못했다.

 

프랑스의 니엡스(Joseph Nicephore Niepce)프랑스 혁명 때 재산을 몰수당한 귀족의 아들로 나폴레옹 군대에서 복무하다가 제대한 후 샤롱쉬르손(Chalon-sur-Saone)에 있는 그의 저택으로 돌아와 과학에 몰두했다. 1807 그는 동생 클로드(Claude)와 함께 초기 모형의 피스톤-실린더 내연기관을 개발하는 등 남다른 과학적 자질을 보였다. 1813 사진기라는 새로운 분야로 연구 방향을 전환한 니엡스는 스스로 사진 제판법 혹은 태양을 끌어들이는 법이라고 부르는 실험에 성공했다. 염화은으로 감광된 종이를 오랜 시간 노출시켜 이미지를 입힐 수 있었지만 그 역시 이미지를 고정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1820년 니엡스질산은을 흠뻑 묻힌 종이빛에 노출되면 검어지는 현상을 목격하고 사진의 건판으로 사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으나 빛이 닿지 않은 질산은도 결국에는 검게 변하기 때문에 질산은 대신 아스팔트의 일종비튜멘(bitumen, 역청)이라는 물질에 눈을 돌렸다. 백색에 가까운 이 물질은 이 닿지 않으면 물렁물렁하고 라벤더 기름에 잘 녹지만 을 많이 받으면 딱딱해지면서 어떤 종류의 용매에도 잘 녹지 않는 성질을 갖고 있었다. 감광지 대신 금속판비튜멘을 발라 빛을 쬔 다음 이것을 라벤더 기름으로 처리하면, 이 닿은 부분은 비튜멘이 남아 있어 희게 되고, 빛이 닿지 않은 부분은 비튜멘이 녹아 없어져서 금속판의 검은 바탕이 나타난다. 니엡스비튜멘을 칠한 금속판카메라 옵스큐라의 벽면에 세워 인류 사상 최초의 사진을 찍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소위 양화(陽畵, positive)1826의 일이었다. 니엡스는 이것을 햇빛 그림이란 뜻의 헬리오그라피(Heliography)로 명명했다.

 

그러나 비튜맨빛에 반응하는 시간이 매우 느려서 사진 한 장을 찍는데 무려 8시간이나 걸렸고 형체도 불분명하여 제품 상태가 만족스럽지 못한 단점이 있었다. 태양을 찍으면 사진을 찍는 8시간 동안에 태양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므로 2개의 태양이 나타났다. 풍경은 그런 대로 찍을 수 있었지만 사람을 찍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어서 모델들은 카메라만 보면 도망갔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의 비튜멘 사진 기법은 훗날 발명될 성공적인 인쇄판 방식의 기초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공개하는 것을 꺼렸다. 런던의 학술원에서 자신이 개발한 아이디어에 관한 논문을 발표할 때도 기술적인 면을 모두 생략했기 때문에 회원들은 도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화가를 포기하고 사진 개발에 투입>

니엡스의 사진 기술 개발이 답보 상태에 있을 무렵, 프랑스의 다게레(Louis J. M. Daguerre, 17871851)도 사진에 매료되어 있었다. 다게레는 원래 극장 무대를 장식하거나 배경에 풍경화를 그리는 유명한 화가였다. 다게레화폭에 담을 풍경을 스케치하기 위해 자주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 불편한 점을 해결하고 싶었다. 그는 니엡스포지티브 촬영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 함께 공동 연구를 하자고 설득했다.

 

화가의 길을 던져버리고 과학자의 길로 들어서겠다는 다게레의 설득이 주효했던지, 니엡스영국 학술원에서조차 공개하지 않았던 아이디어다게레와 공유하기로 계약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니엡스는 얼마 안 있어 사망하고 말았다. 니엡스의 아들특허권을 상속받았지만 따분하고 전망도 불분명한 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아 다게레 혼자 연구를 진행시켜야 했다.

 

다게레니엡스의 헬리오그라피가 갖고 있는 결정적인 단점긴 노출시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우선 빛에 분해되기 쉬운 것으로 알려진 은염(銀鹽)을 연구했다. 으로 도금한 동판을 닦아내고 요오드의 증기를 씌워 표면에 얇은 요오드화은(Agl)의 층을 만들고 이 판을 햇빛에 노출시키면 희미한 형상이 생겼다. 다게레는 이 형상을 짙게 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시도했지만 진척이 없었다. 해결의 실마리는 우연한 데서 풀렸다.

 

어느 날 그는 희미하게 형상이 나타나 있는 판을 씻어서 약품 선반 위에 넣어 두었는데 며칠 후 다시 그 판을 꺼냈을 때 놀랍게도 형상이 뚜렷해져 있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선반 속의 약품 가운데 어떤 것이 형상을 진하게 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모든 상황을 세밀히 검토한 결과 선반 밑에 있던 깨진 온도계에서 흘러나온 수은 몇 방울이 형상을 짙게 한 원인이라고 추정하고 즉시 실험에 착수했다.

 

수많은 실험을 거친 끝에 빛을 쬐지 않은 은판에는 수은이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빛을 쬔 은판에는 기화된 수은의 입자들이 달라붙어 오늘날의 흑백사진과 같은 포지티브 영상이 나타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것이 바로 1839년 은판사진이 탄생하게 된 계기이다. 다게레는 곧바로 다게레오타이프(daguerreo type)라는 최초의 사진기를 제작했다. 이 당시의 정황을 다게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이미 수은화합물 실험을 하고 있었으므로 금속 수은의 증기는 바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행운은 내가 그것을 잡을 수 있도록 인도했다.”

 

그후 사진사들은 사진을 찍은 후 섭씨 75 정도의 가열한 수은이 들어 있는 컵 위에 햇볕을 쬔 판을 놓고 잠상(潛像)을 현상하기만 하면 되었다. 요오드화은에 빛이 닿으면 그 부분이 광화학적 현상을 일으켜 변질되며, 원소 상의 은과 수은이 결합하게 되면 아말감이 생성된다. 또한 변화되지 않은 요오드화은을 제거하기 위해 처음에는 소금물만 사용됐으나, 곧바로 티오황산나트륨이 보다 좋은 정착액임이 알려졌다.

사진기를 발명한 뒤 다게레는 많은 오해와 비난을 시달려야 했다. 신의 형상비슷한 인간의 모습을 포착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신에 대한 모욕이라는 비난을 받은 것이다.

 

신의 형상과 같은 인간의 모습을 포착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신에 대한 모독이다. 이런 기계를 만들었다고 떠드는 다게르는 분명 바보 중의 바보다.’

 

1839프랑스다게르가 사진기를 발명했다고 했을 때 당시 유럽의 언론들이 신문에 게재했던 기사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다게레오타이프를 확인한 파리의 몇몇 저명한 과학자들은 새로운 제품이 가져올 놀라운 파급 효과를 예상했다.

 

그의 발명가장 큰 관심을 가진 사람이 바로 당대의 저명 천문학자이자 물리학자이며 당시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사무국장아라고(Dominique Franoçis Jean Arago, 17861853)였다. 다게레의 사진기가 갖고 올 파장을 잘 알고 있던 그는 프랑스를 위해 다게르가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허라는 제도를 이용하여 다게르모든 기술을 독점할 경우 관련 기술의 개발은 물론 보급에도 지장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라고사진의 급속한 보급을 위해 특허를 내지 않고 공표(公表)하는 대신 프랑스 정부다게레와 니엡스의 자손에게 연금을 지불할 것을 제안했다. 다게레매년 6천 프랑, 니엡스의 상속자매년 4천 프랑을 받는다는 조건이었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금액이지만 사진기의 판매로 인한 특허료를 생각하면 적은 금액이었다. 그러나 다게레는 이를 받아들였다.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갖고 있다고 해도 국가를 위해 희생해 달라는 아라고의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1839819 다게레사진 기술 발표회에서 주최자인 아라고는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다게레 사진술에 까다로운 이론은 하나도 없습니다. 기계도 간단하여 설명대로 조작하면 누구라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림에 대한 소양, 뛰어난 솜씨, 숙련, 경험 이런 것들이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발표회가 끝나자마자 참석한 사람들은 곧장 카메라 상점으로 몰려갔다. 그리고 1시간 후에는 이미 공원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다게레오타이프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바로 이날 1839819사진술발명된 기념일로 정해진다.

 

사진은 곧바로 전 분야에서 그 효용성을 인정받고 폭발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종의 기원>에서 진화론을 주장하여 유럽을 논쟁 속으로 몰아넣은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은 과학에서 사진의 중요성을 초기에 인식한 사람으로, 1842에 찍은 그의 사진이 지금도 남아 있다. 다게레오타이프는 특히 미국에서 인기의 절정을 이뤘다. 1853 대략 만여 명이 다게레오타이프 사진사로 활동했고 300만 개가 넘는 다게레오타이프가 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