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이면에는 또다른 요인이 있는데, 바로 전쟁이었다. 사진이 발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벌어진 크림전쟁(1854〜1856)과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은 사진술 발달의 전환기를 마련해 주었다. 크리미아에서는 영국의 로저 펜튼, 미국에서는 매튜 브레디와 알렉산더 가드너가 전쟁의 참상을 사진에 담았다. 특히 조지 버나드는 공식 종군기자 자격으로 남부군의 윌리엄 셔먼 장군을 따라다니며 전쟁의 생생한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들에 의해 ‘르포르타주’라는 새로운 영역이 생겼고 ‘리포터’라는 새로운 직업도 생겼다.
사진이 실제 장면을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게 되자 윌리엄 프리스(William Frith)와 같은 영리한 화가들은 사진을 찍은 후 그것을 정밀하게 베껴 그려서 관중들로부터 탄성을 받았다. 반면 사진에 대한 거부감도 적지 않았다. 예술비평가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는 사진을 다음과 같이 평가절하했다.
‘사진은 예술이 아니며 사진의 임무는 과학과 예술의 하인이다. 문학을 창조하지도 않으며 보완하지도 않는 인쇄나 속기처럼 대단히 비천한 하인이다.’
보들레르를 더욱 분노케 한 것은 사진이 포르노 작가들의 애용물로 사용된다는 점이었다.
이처럼 중요한 발명이 대중화되는 초기에는 예측할 수 없는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한다. 사진사는 당대 최고의 기술자였는데, 그런데 그들은 수은 증기를 직접 취급해야 했기 때문에 심한 수은중독으로 고통을 받았고 대부분 일찍 사망했다. 지금에야 수은 중독의 위험성이 잘 알려져 있지만, 평균 수명이 길지 않았던 당시에는 사진사들이 수은중독이라는 직업병 때문에 일찍 사망하는 것은 큰 이슈가 되지 못했다.
물론 다게레의 은판 사진술에도 약간의 단점이 있었다. 우선 한 번 노출에 하나의 금속판을 사용해야 했으므로 가격이 비쌌다. 또한 은판 사진술은 실제의 대상물에서만 상이 만들어지므로 각각의 사진이 단 한 장의 유일한 사진이었고 재생이나 복사가 불가능했다. 더욱이 복사된다 해도 거울에 비친 상처럼 반전되어 나타났다.
이 문제점에 도전한 사람이 영국의 탈보트(William Fox Talbot, 1800~1877)이다.
그는 다게르가 은판에 영원한 영상을 담는 작업에 성공했다는 말을 듣고 영국의 탈보트(William Fox Talbot)는 질산은을 바른 종이로 감광지를 만드는 작업에 돌입했다. 은판을 사용한 다게르의 기술은 사진의 선명도가 뛰어났지만 탈보트가 사용한 감광지는 양화( 음화를 인화지나 셀룰로이드 따위에 박아 나타낸 화상으로 색상, 명암 등이 피사체와 같다)가 가능하고 사진을 여러 장 현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바로 이 네거티브 영상이 오늘날의 필름에 해당하는 것이며 1844년에 탈보트는 석판 인쇄와 음각을 통해 사진 삽화가 들어 있는 『자연의 연필 Pencil of Nature』이란 책을 처음으로 인쇄했다. 탈보트의 사진은 네가티브 필름에서 포지티브 프린트를 얻는 일반적인 사진 프로세스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후 사진의 필름으로 셀룰로이드가 사용되기 시작했고 다게르와 탈보트의 장단점을 보완한 각종 개발품이 뒤를 이었다. 특히 감도가 높은 카메라들이 개발되었기 때문에, 노출 시간을 짧게 조절할 수 있는 셔터가 카메라에 장착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당시 사진사들은 사진을 찍기 위해 보통 고생하는 것이 아니었다. 10~15킬로그램에 이르는 카메라에다 무거운 삼각대, 해로운 현상 정착액, 두꺼운 유리 감광판까지 들고 다녀야 했다. 또 사진사들은 가정집이건 전장이건 현장마다 암실을 설치해야 했다.
사진 찍을 사람이 자리를 잡으면 사진사는 암실에 들어가 독한 냄새가 나는 감광유제를 섞어서 유리판 위에 바르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 후 사진사는 자신의 머리 위에 검은 천은 덮은 채 약 30초 동안 움직이지 말라고 요구한다. 일반인이 30초 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 것이다. 노출이 끝나면 사진사가 사진판을 들고 암실로 들어간다. 이것이 1870년대까지 사진을 찍는 방법이었다.
<사진기를 일반인에게 준다>
1888년에 미국의 은행원이었던 이스트먼은 전문 사진가들이 아니라 아마추어 사진가들을 겨냥해 연필처럼 쓰기 편한 카메라 개발에 착수했다. 그는 손에 쥘 수 있을 만큼 작은데다가 단추 하나로 작동할 수 있으며 한 번에 1백 장의 두루마리 필름을 내장시킬 수 있는 카메라를 개발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추어들로부터 사진 현상에 따른 짐을 덜어주는 것이었다. 그 당시는 사진 한 장을 찍으면 곧바로 사진관으로 달려가거나 무거운 카메라와 함께 각종 현상 장비들을 항상 갖고 다녀야 했다. 게다가 필름의 현상, 인화 과정은 사람의 몸에 해로운 여러 가지 화학 약품을 써야 했다 그는 이러한 문제점을 일거에 해소했고 가격도 대폭 낮추었다.
그가 바로 오늘날 세계 최대의 사진기 업체인 코닥사를 설립한 장본인이다. 이스트먼의 코닥 카메라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단추만 누르세요. 뒷일은 저희들이 맡겠습니다’라는 유명한 광고 카피와 함께 사진의 대중화에 크게 공헌했다. 곧바로 어린이들도 사용할 수 있는 브라우니(Brownie) 카메라도 개발되었다.
1900년 브라우니 카메라 값은 1달러, 필름 한 통에 15센트였으므로 어느 가정에서도 카메라를 구입할 수 있었다. 브라우니의 재질은 처음에는 두꺼운 마분지였는데 후에 나무로 만들었고 커버는 검은 인조가죽으로 덮었다.
이스트먼이 카메라에 브라우니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동료 기술자 프랭크 브라우넬(Frank Brownell)에 대한 감사 표시라고 한다. 이스트먼은 꼬마요정 ‘브라우니’라는 만화를 그린 화가 파머 콕스(Palmer Cox)에 감사하는 의미로 카메라 본체에 이 그림을 넣거 브라우니 광고물에 언제나 등장하도록 했다.
<사상 최악의 노벨상>
당시까지의 사진들은 모두 흑백 사진이었다. 요즈음도 작품 사진에는 흑백사진이 좋다고 흑백사진만을 고집하는 작가들도 있지만 일반인들이 자연색을 그대로 보여주는 천연색 사진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로 이 컬러 사진의 개발에 리프만이 등장한다.
‘사진 감광층으로 덮은 감광판을 수은을 함유하고 있는 용기에 넣는다. 노출시키는 동안 수은은 거울 형태의 감광층과 반응한다. 노출이 끝난 후 감광판을 평범한 방법으로 현상한다. 그것이 마르면 색깔이 나타나는데 반사에 의해 보여지며 영구적이다.’
리프만이 1908년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수여식에서 천연색 사진을 만드는 방법을 설명한 것이다.
그는 색상 필터나 염색 물감을 사용하지 않은 채 흑백 감광제로만 컬러 사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감광제를 금속 유리로 비추면, 반사 빛이 들어오는 빛과 180도 각도를 이뤄 빛의 색상(파장)을 결정하는 간섭무늬가 생긴다. 감광제에 있는 은염은 두 개의 파장이 지속적으로 간섭하는 곳을 어둡게 하면서 3차원을 만들어, 파장에 따른 굴절 무늬를 필름에 기록한다. 그 후 금속 거울에서 떼어낸 필름을 인화한 후, 하얀 광원을 비추어 화면에 영상을 띄우면 다양한 색상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컬러 사진을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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