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 노벨상이 만든 세상/나일론

석유, 공기, 물로 만든 비단, 나일론(2)

Que sais 2020. 10. 6.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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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론의 역사>

모사 비단인 나일론이 결국 20세기 중반에 태어났다고 하지만 이들의 탄생하기까지에는 과거의 학자들의 발판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합성섬유가 태어나게 된 시초는 앞에서 설명한 쉔바인의 발견이다. 이때 영국의 스완(Sir Joseph Wilson Swan)은 에디슨과 전등 개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전등의 필라멘트 개량에 열중했는데 쉔바인이 발견한 물질이 필라멘트에 유용한 성분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오랜 연구 끝에 그는 에디슨의 전구보다는 못하지만 그런 대로 빛을 발생시킬 수 있는 필라멘트를 만들어냈다. 이 필라멘트는 질산셀룰로오스에서 뽑아낸 섬유를 여러 겹으로 꼰 것으로 이것으로 오늘날 사용되는 화학 섬유 제조법의 토대를 거의 마련한 셈이다.

 

이보다 조금 앞서 파스퇴르의 제자로 프랑스의 귀족인 샤르도네(Louis Marie Hilaire Bernigaud, Comte de Chardonnet) 백작이 쉔바인의 연구를 계승하여 면화를 알코올과 황으로 완전히 녹인 뒤 여기에서 레이온이라는 섬유를 뽑아내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것과 1890년에 스완이 필라멘트를 연구하던 과정에서 찾아낸 실의 제조법과 결합하면서 암모니움레이온, 비스코스레이온, 아세테이트레이온 등 레이온 섬유를 탄생한다.

 

레이온의 1889, 파리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 출품되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1891년 공장을 건설하여 생산을 시작했다. 당시까지 누에로만 만들 수 있었던 비단을 인공으로 만들었다고 알려졌으며 이름도 샤르도네 비단이라 불렸다.

 

그러나 샤르도네 비단은 폭발적인 처음의 반응과는 달리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원료인 질산셀루로오스 때문이다. 질산셀룰로오스는 폭발성이 강해 앞에서 설명했지만 종종 면화약이라고 불리는데 질산과 반응을 적게 시키면 폭발성은 줄어들지만 인화성을 계속 남는다. 알려지기는 시가를 피우던 한 신사가 담뱃재를 샤르도네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던 여인의 옷에 떨어뜨렸다고 한다. 그러므로 샤르도네 비단옷을 입었던 이 여인에게 어떤 일어 벌어졌을지는 쉽사리 짐작할 수 있지만 그 여인의 운명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여하튼 샤르도네는 당대의 귀족에다 부호이었음에도 결국 비단 사업을 접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프랑스의 부호 중의 한 명인 샤르도네가 이런 일에 좌절할 리 없는 일이다. 1895년 샤르도네는 나이트로화를 없애는 약품을 공정에 포함시켜 훨씬 더 안정적인 셀룰로오스 기반의 인조 비단을 생산했다.

1901년 영국의 찰스 크로스는 잘 알려진 비스코스(viscose)라는 인조비단을 개발했다. 비스코스는 높은 점도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비스코스의 등장 즉 레이온은 폭발적으로 천연비단이 추억속의 직물로 포함될 정도였다. 현재도 비스코스 공정은 사용되고 있는데 이후 레이온 섬유는 나무의 펄프를 녹여서도 뽑아낼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되어 오늘날 양복의 안감이나 한복 등에 사용하고 있는 매끄러운 섬유가 태어난다. 물론 아직도 레이온은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는 재료이다. 펄프를 녹이는 과정에서 유독 가스가 발생시키기 때문으로 우리나라에서 발생하여 공해의 위험성을 단적으로 알려 준 원진 레이온 직업병 사태는 바로 이 유독 가스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레이온의 문제점은 학자들에게 목표를 세워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레이온의 장점만 취하고 단점은 없앨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인조비단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끈 사람이 캐러더스이다.

캐러더스는 1896년에 미국 아이오와 주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몸이 허약한데다가 가정 형편도 어려워 공부를 계속할 처지가 아니므로 아버지가 근무하고 있던 캐피탈대학의 상과대학에 입학하여 속성 부기 등을 배웠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그 대학의 부학장으로 승진하면서 집안 형편이 나아지자 1915년에 대학을 졸업한 후 타키오대학에서 조교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화학과에 등록한 뒤 학생들의 실험 조교로 일하면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여 1924년 분자결합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6년에 하버드 대학에서 유기화학을 강의하면서 당시 첨단 분야였던 중합체(polymer) 연구에 중점을 두고 있었는데 뒤퐁사의 스타인이 그를 적극 영입코자 했다. 1927년 듀퐁사는 스타인의 주도하에 순수연구에만 투입하는 예산으로 무려 20만 달러를 배정받았는데 그는 순수연구가 성공하려면 각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을 채용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이미 안정된 직장을 갖고 있으므로 그들을 스카우트하는 것이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 대안으로 스타인은 GE나 벨연구소와 같은 방식 즉 아직 큰 명성을 쌓지는 못했지만 뛰어난 과학적 잠재력을 가진 사람에 목표를 두었다.

스타인은 15명의 연구원을 채용하는 비용으로 예산의 거의 절반을 책정했다. 이때 많은 전문가들이 하버드대학의 유기화학 강사인 31세의 캐러더스를 추천했다. 그런데 캐러더스는 아무리 듀퐁에서 연구를 보장한다고 하더라도 자율성이 저해될 수 있다며 5번의 영입 제안을 거절했지만 결국 뒤퐁연구소 유기화학부장이라는 직함과 강사 봉급의 2배를 지급하겠다고 강력한 로비를 하여 1928년에 뒤퐁사로 자리를 옮겼다. 물론 그가 하버드 대학에서 자리를 옮긴 것은 가르치는 일에 열의를 느끼지 못하고 있던 차에 여하튼 무제한의 자유와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발표할 권한을 보장한다는 뒤퐁사의 약속에 마음이 끌렸기 때문이라고 알려진다.

 

1929년에 세계적으로 대공황이 닥쳤을 때, 뒤퐁사에서는 오히려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공격적인 경영방법을 택했다. 신제품 개발만이 대공황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우수한 젊은 과학자들을 뽑아 예산을 최대한 지원하고 무제한의 실험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면 훌륭한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사실 이런 결정은 듀퐁으로서도 큰 도전이었다. 당시에 기초 과학 연구는 대학교에서 주로 했으므로 기업에서 전망이 반드시 보장되지 않는 연구에 투자한다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었다.

 

놀라운 것은 뒤퐁사가 약속대로 다른 곳의 투자는 모두 축소하였지만 캐러더스의 연구에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와 같은 회사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캐러더스는 나일론과 같은 인조 섬유를 개발하기 위해 그야말로 엄청난 인원과 물량을 투입하였다. 캐러더스 휘하의 연구원만 230명이었고, 예산은 1930년대에 이미 2,000만 달러를 넘어섰다.

그는 조수인 아널드 콜린스(Arnold Collins)와 함께 아세틸린에서 얻은 천연 그대로의 혼합물을 기존 방식대로 정제했더니 이상한 소량의 액체가 분리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부가생성물은 이소프렌과 유사성에서 클로로프렌이라고 명명되었으며 추후에 네오프렌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 물질은 이소프렌과 유사하나 중합되는 네오프렌을 조수인 아널드 콜린스(Arnold Collins)와 함께 합성했다. 그들은 DVA라는 특이한 화합물을 중합하다가 고체물질을 포함한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희색 액체가 생긴 것을 발견했다. 콜린스는 이 물질을 스폰지처럼 눌러서 짜보았는데 그 물질은 흰색의 고무 같은 물체가 되었으며 테이블 위에서 공처럼 튀어 다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물질의 형태를 변형시켜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발견된 최초의 합성고무인 네오프렌은 천연고무보다 더 단단한 것으로 밝혀졌고 제2차 세계대전떄 매우 중요한 군수품이 된다.

 

나일론은 발명부터 판매까지 그야말로 현대기업이 누릴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판촉에 들어갔다. 캐러더스가 발견한 세계 최초의 합성 섬유를 폴리머 6-6’이라고 명명한 후 섬유, 코팅 재료, 필름, 플라스틱 등으로 가공해 본 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자 발표까지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했다. 그들은 실험재료에서 떨어져나간 부스러기 한 조각도 남김없이 회수하여 무게를 달아, 한 조각의 나일론도 회사 밖으로 유출되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감시했다. 그러면서 수 킬로미터에 이르는 스타킹을 생산하는 편물 기계들을 설치했다

뒤퐁사는 19381027일에 나일론 스타킹을 연금술과 비유하여 발표하자 대중들은 충격과 환호했다. 대중의 열광은 1년 후에 열린 세계 박람회까지 계속되었고 한 소비자는 다음과 같이 열광했다.

 

제 다리의 느낌이 달라졌어요. 마치 하늘을 나는 것 같아요.”

 

나일론의 발명은 관련 산업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그 전에는 여성들이 신는 스타킹은 얇지도 않았고 속이 비치지도 않는 실크, 무명, 레이스사(꼰 무명실), 레이온 등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여성들은 다리의 털을 면도할 필요도 없었지만 나일론 스타킹 때문에 면도기 산업이 호황을 맞을 정도였다. 나일론 스타킹이 나온 첫해 무려 6,400만 족의 나일론 스타킹이 제조되어 판매되었다는 것으로도 그 열광을 알 수 있다.

나일론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수많은 인명을 구하기도 했다. 명주보다 단단한 나일론은 낙하산에 사용하기에 적격이었기 때문이다. 나일론이 전략물자로 선포되자 나일론 스타킹의 생산이 금지되었다. 나일론은 항공기 타이어, 방탄복, 텐트, 구두끈, 해먹, 화약포, 다양한 종류의 밧줄 등을 만드는데 사용되었고 미국 전역에서 수백만 명의 여성들이 자신들의 스타킹을 기부하여 낙하산을 만들도록 주문했다.

 

1945년 다시 나일론 스타킹의 판매가 허용되자 미국은 그야말로 혼돈의 세계로 들어갔다. 피츠버그에서는 13,000켤레의 스타킹을 사기 위해 4만여 명이 줄을 서기도 했으며 스타킹을 먼저 사겠다고 여자들끼리 머리채를 꺼들며 싸우는 일조차 벌어졌다. 신문에서는여성들은 나일론을 위해 치열한 공방을 하느라 목숨을 건다라고 기사까지 게재하여 나일론이 곧 다가올 패션혁명의 막을 열었다.

 

블라우스와 낙하산의 재료로 출발한 나일론은 양말, 스타킹, 속옷, 혼방, 어망, 로프 등으로 그 영역을 점차 확대했다. 이 새로운 합성고무는 천연고무와 달라서 기름이나 가솔린, 오존 등에 놀라울 정도로 내성이 강하다. 1960년대 이후에는 나일론 페이퍼와 나일론 플라스틱으로 응용되어 포장지필터절연체 등과 같은 종이 제품과 베어링밸브패킹과 같은 기계 부품을 제작하는 데 필수적인 재료로 사용된다. 공업용 호스나 벨트, 구두창, 창문의 개스킷, 전선케이블의 커버로 사용되고 있으며 동맥 수술을 할 때 없어서는 안 될 인공 혈관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참고적으로 나일론의 이름에는 매우 재미있는 해프닝이 있다고 진정일 박사는 적었다. 나일론(nylon)이란 이름의 제품이 시판되자 일본이 발끈한 것이다. 당시 비단은 일본의 농림성이 주도하고 있었는데 미국 측이 농림성의 코를 납작하게 해 놓았다는 뜻에서 농림의 영어 발음(Nolyn)을 거꾸로 하여 나일론(Nylon)으로 명명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도쿄의 한 일간지가 Nyoln이란 상품명이 'Now, you lousy old Nipponese(. 보아라. 바보 같은 늙은 일본놈들아)‘라는 영어 표현의 첫머리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라고 생떼를 쓰자 더욱 더 미일간의 분쟁 요소가 되었다. 물론 뒤퐁사는 그런 주장은 전혀 근거 없는 트집이며 나일론은 사내 전체 공모를 통해 결정된 이름이라고 해명하여 가까스로 진정되었다.

 

비단과 나일론은 비슷한 유산을 공유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둘 사이의 화학 구조가 비슷하다는 차원이 아니다. 두 중합체 모두 자기만의 방식으로 당대의 세계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비단에 대한 수요 때문에 세계 무역로와 새로운 무역 협정 등이 맺어졌고 비단으로 도시와 무역이 성장했다. 한마디로 비단처럼 지구촌 곳곳에 엄청난 부와 변화를 안겨준 물품은 거의 없다.

 

근래에 태어난 나일론도 마찬가지이다. 비단을 모사하려는 학자들의 꿈은 이루어져 수많은 현대 직물과 소재의 도입으로 현대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과거에는 식물이나 동물이 옷을 만드는 데 필요한 원재료를 공급했지만 오늘날에는 원유를 정제할 때 나오는 부산물이 수많은 직물의 원재료가 된다. 한마디로 상품으로서 원유가 과거 비단이 맡았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과거에 비단이 그러했던 것처럼 원유에 대한 수요가 새로운 무역 협정을 맺게 했으며 무역로를 열었고 기존 도시들을 새로운 시대에 맞게 변모시켰다. 누에, 비단. 원유, 인조비단 만만세라 아니할 수 없다.

 

<우울증으로 자살>

뒤퐁사의 전폭적인 지원과 홍보로 나일론이 세상을 바꾸는 물질로 변했지만 캐로더스는 자신이 발견한 제품이 전후 최대의 상품이 될 것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1937년에 시안화물을 마시고 자살했다.

이유는 그의 상관인 볼튼이 그의 발명품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제품을 생산하겠다고 통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캐러더스의 상관이었던 스타인은 캐러더스를 비롯한 연구원들의 신제품 개발이 잇달아 성공하자 부회장으로 승진했. 그의 후임으로 온 사람이 볼튼인데 그는 기초연구에 특권을 주었던 스타인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소유자였다. 그는 오직 상업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성과만 중요시하여 캐러더스 연구팀에게 자유로운 기초연구보다는 상업성이 있는 연구에 몰두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캐러더스 팀이 발견한 나일론이 당시에는 매우 불안정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상업적으로 가치가 있는 좀 더 안정된 섬유를 개발하라고 요청했다.

캐러더스가 처음에 개발했던 나일론은 질기지 않아서 상업적 가치를 가지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송성수 박사의 글에서 인용한다.

나일론이 생성되는 과정에서 물방울이 부산물로 나오는데 그 물방울이 반응 용액으로 다시 들어가 중합 작용을 억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34년 캐러더스는 레이온 섬유를 가공하는 방법에 착안하여 폴리아미드를 압축시킴으로써 나일론 실을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문제는 볼튼이 다른 제품을 선호했다는 점이다. 캐러더스는 1935년 봄에 5,10폴리아미드를 최적의 나일론 후보로 추천했다. 그러나 볼튼은 5-10폴리아미드를 만드는 데 필요한 물질의 값이 비쌀 것으로 판단하고 벤젠화합물로부터 나일론을 값싸게 제조할 수 있는 6-6 폴리아미드를 선호했다(5-106-6이라는 것은 구성 분자의 탄소 수가 각각 5-10인 화합물과 6-6인 화합물이라는 뜻). 연구개발을 실제로 담당하는 사람과 연구개발을 관리하는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긴 것이다.

볼튼이 6-6폴리아미드를 중점적으로 개발하라고 요구하였음에도 캐러더스는 자신의 연구 스타일을 계속 고집했다. 원래부터 약간의 우울증이 있었던 캐러더스는 1936년에 결혼한 뒤 더욱 심해져 신경 쇠약으로 발전했다. 결국 1937429일 필라델피아의 한 호텔에서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 6-6나일론에 대한 특허를 신청한지 3주일이 지났을 때이다.

그의 발명품이 사상 최고의 상품으로 성공한 것을 보면 상관과의 알력에 의해 자살을 했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고 의아해 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울증 치료에 사용되는 약은 1950년대에서야 비로소 개발되었다. 캐러더스가 살던 당시에는 아무리 명예와 부를 갖고 있는 사람도 자살의 충동을 막을 수 없었다.

 

학자들은 네오프렌과 나일론이 두 제품이 현대 인류에 미친 영향을 감안할 때 여러 사람이 각각 개발했다고 하더라도 그들 모두 노벨상의 수상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953년 슈타우딩거가 중합체에 관한 연구로 노벨화학상을 받았다는 점을 볼 때 더욱 그렇다. 노벨상도 우울증에는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나일론이 공전의 성공을 거둔 신화의 배경에는 이와 더불어 두 가지 획기적인 상업적 전략이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나일론 섬유를 뽑아내는 방법으로 레이온 섬유를 뽑아내는 건식방사법이나 아세테이트 섬유를 뽑을 때 사용하는 습식방사법이 아니라 새로운 용융방사법을 선택했다.

둘째는 나일론을 처음 상품화하면서 여성용 블라우스에 사용되던 값비싼 비단을 대체하려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1940년부터 나일론이 시판되기 시작했는데 때마침 태평양전쟁으로 일본으로부터 비단 수입이 단절되는 바람에 듀퐁은 나일론을 가지고 더욱 급속도로 여성용 고급 의류시장을 잠식할 수 있었다.

결국 원 발명자는 우울증으로 자살했지만 나일론의 성공은 탁월한 기술로 발명된 제품을 적절한 상품화 전략으로 성공한 것이다. 이들은 제품을 개발하면서 파이로트 플랜트(Pilot plant), 벤치 플랜트(Bench Plant), 상업적 생산단계로 진행하는 단계별 연구 개발전략을 채택하여 단계별로 규모에 맞는 실험과 생산 공정을 차질 없이 추진했으며 이 방식은 현재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할 때에도 거의 똑같이 진행된다.

참고적으로 상업적인 차원으로만 생각한다면 듀퐁사의 볼튼이 5-10 폴리아미드가 아니라 6-6 폴리아미드를 선택한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임경순 박사는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