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 노벨상이 만든 세상/비날론

석회석과 무연탄으로 만든 세계 2번째 화학섬유, 비날론(1)

Que sais 2020. 10. 6.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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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회석과 무연탄으로 만든 세계 2번째 화학섬유

일제강점기의 일본의 한반도 정책 중 하나는 중국 침략을 뒷받침하는 전쟁 물자 제공다. 이를 위해 한반도 남쪽에서는 일본의 완제품을 공급하는 경공업에 집중했고 북쪽에서는 만주로의 확장을 염두에 둔 전력 산업과 중공업에 치중했다.

이러한 일본의 편재된 정책은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양측에 심각한 문제점을 안겨주었다. 남쪽의 대한민국은 중공업 설비와 전력 등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북쪽은 경공업 설비와 일상 제품이 부족했다. 특히 남한에 섬유와 방직 산업 설비들이 모여 있으므로 분단 후 북한에서는 섬유와 의류의 부족이 심각했다.

 

1940년 당시 방직 산업의 85퍼센트가 남쪽에 있었는데 얼마 안 되는 북쪽의 시설도 한국전쟁 동안에 집중적으로 폭격을 받았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어느 쪽 체제가 국민의 윤택한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가를 두고 경쟁하고 있는 상황에서 섬유의 안정적인 공급은 북한에서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우선 과제였다.

원칙적으로 목면을 재배하여 옷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지만 북한은 워낙 경작지가 부족하여 식량 증산이 보다 급선무였다. 당대에 목화 재배 면적을 늘리는 것은 식량 생산을 희생해야 하므로 이들 정책을 수행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천연 섬유보다는 합성 섬유 공장을 우선적으로 건설하여 이를 해결해야 했는데 북한에서 이 문제를 주도한 사람이 비날론(한국에서는 비닐론 또는 비닐)을 개발한 리승기(李升基, 19051996) 박사이다.

 

20170911<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매우 놀라운 결의를 발표했다. 북한이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5형 발사 등으로 도발 수위를 높이자 유엔안보리는 결의 2371(2017.08.05.)’로 북한산 석탄 철광석 수산물 수출을 전면 금지하더니 결의 2375(2017.09.11.)로 북한에 사상 첫 원유 공급 제한과 섬유·의류제품 수출에 대한 금지 조치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유엔에서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은 리승기 박사가 개발한 비날론이 본격적으로 생산을 시작하여 중국의 총 의류의 30%를 북한에서 공급한다는 루머도 있을 정도로 북한의 효자 수출상품이라는 설명이다.

 

리승기 박사는 한국에서는 잊혀졌지만 그의 명성을 엿볼 수 있는 것은 북한에서 세 번에 걸쳐 우표의 모델로 등장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2011년 유엔은 마리 퀴리가 노벨상을 수상한지 100돌이 되는 2011년을 국제화학의 해로 규정할 것을 정하고 그 주제를 화학-우리의 생활, 우리의 미래로 정했는데 북한은 이를 기념하는 우표도 발행했다. 액면 50원의 우표에는 리승기 박사와 라듐을 발견한 마리 퀴리의 화상이 새겨져있을 정도로 우대 받았다. 리 박사는 1960년대 초반까지 남북한을 통틀어 가장 크게 이름을 떨친 과학자로 북한에서는 이례적으로 그에 관한 대중용 전기가 출판될 정도다.

 

리승기 박사 우표

이뿐이 아니다. 노벨상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서양권의 지존으로 볼 수 있는데 공산권에서는 이와 버금가는 상으로 레닌상을 꼽는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현 지구상에서 과학부분으로 한정한다면 레닌상이 노벨상보다 더 받기 어렵다고 말한다. 노벨상은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등 3부분으로 나뉘며 대체로 각 분야에서 매년 3명이 수상하는데 레닌상은 단 한 명에게만 수여되기 때문이다. 리승기 박사가 바로 한국인으로 레닌상을 수상하였다는 것은 그의 업적이 어느 수준인지 가름 할 수 있다. 큰 틀에서 리승기 박사는 노벨상 수상자 반열에 들었다 해도 무리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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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론과 비날론>

리승기의 두드러진 업적은 세계최초의 합성 섬유인 나일론에 이어 합성섬유로는 두 번째로 비날론을 실용화했다는 점이다. 1961년 흥남에서 <2·8 비날론기업소>가 완공되었다. 박성래 교수는 이 공장을 북한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를 다음 세 가지로 들었다.

 

해외 원조의 도움이 거의 없이 북한의 자체 기술로 건설

비날론이라는 섬유가 흡습성이 좋아 전통 옷감인 면의 대용으로 사용 가능

공장 건설의 책임자가 한국인 리승기 박사이다.

 

한마디로 2·8 비날론기업소는 1960년대 북한 과학기술의 자립을 선포하는 상징물 같은 구실을 했다. 이러한 이유로 비날론은 추후에 주체 섬유라는 이름이 붙어 다닌다. 북한에 비하면 남한 사람들에게는 리승기라는 이름은 물론 비날론이란 이름도 매우 낯설다. 남북으로 분단되어 체제가 독자적으로 유지되는 통에 북한의 과학기술과 기술자들 특히 월북 과학자들에 대한 평가가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리승기는 1905년 전라남도 담양에서 개화사상가 이송(二松, 아호) 아들로 태어났다. 이송은 아들 이승기에게 우리나라 명헌들의 언행록이나 자신이 손수 엮은 해동명시선이란 시집을 가르치곤 했다. 문학을 즐겼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의 리승기의 꿈은 문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학문에 대한 열의로 1921년 서울로 올라와 4년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다닌 후 1925년 일본의 마츠야마(松山) 고등학교를 거쳐 교토(京都)제국대학(현 교토대) 공학부 공업화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리승기의 집안은 양반 가문이기는 하지만 경제적으로 유복한 편이 아니므로 가정교사를 하면서 힘들게 공부했다. 그가 쓴 자서전에 의하면 한때 집세를 내지 못하고 쫓겨나기도 했으며 여러 달 동안 점심을 굶어 결핵에도 걸렸었다고 한다. 이러한 경제적 곤란 속에서도 리승기는 1931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원래 리승기가 원한 연구 분야는 합성 섬유 연구였으나 조선인 출신이 일본에서 직장을 얻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지도 교수였던 기타(喜田)는 아스팔트를 연구하는 회사의 연구원으로 추천했다. 선천적으로 연구에 자질을 갖고 있는 리승기는 아스팔트 연구에서 일본 특허를 취득하는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렸고 마침 오사카 북동부에 있는 다카츠키(高槻)<교토제국대학부설일본화학섬유연구소>가 설립되자 일본 섬유 연구의 권위자인 사쿠라다 이치로(櫻田一郞) 교수의 지도를 받는 연구 강사로 임용되었다. 이것이 세계적인 학자로서의 리승기가 태어나는 계기였다.

 

그는 이곳에서 교토제국대학 시절 연구주제로 삼았던 합성섬유 연구를 다시 시작했다. 이때 교토제국대학에는 1931년에 화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태규(李泰圭) 박사가 있었다. 당시 이태규는 화학과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으며, 1937년에 교토제국대학의 조교수가 되었다. 따라서 이승기와 이태규는 여러 해 동안 교토제국대학에서 친교를 맺었다.

 

당시 일본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비단과 면직물 수출국이었다. 1938년 자료에 의하면 일본(조선 포함)의 생사 생산량은 세계의 82퍼센트에 달했으며 면직물 산업도 영국, 미국, 독일에 이어 세계 4위였다. 그런데 1930년대 후반부터 일본의 천연섬유산업은 커다란 위기에 봉착했다. 우선 1929년 대공황으로 미국의 견사시장이 붕괴하자 일본산 생사의 판로가 좁아졌고 일본의 중국 침략이 열강들의 경계심을 자극해 일본으로의 면화 수출도 기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의 대외 관계 악화는 원면의 수입뿐만 아니라 견직물의 수출도 막아 총체적으로 섬유산업이 위기를 맞는데 또 한 번의 강타가 일본에 날라 왔다. 미국의 듀퐁사가 1935년 나일론의 합성에 성공한 것이다. 나일론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했으므로 이곳에서는 한국의 경우에 한 해 간략하게 설명한다.

 

나일론은 그야말로 세계를 놀라게 했는데 한국도 1950년대에 미국의 원조물자로 도입되기 시작했고 1960년대에 국산제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일론이 출시되면서 우리의 의류생활에 혁명을 가져와 서민들의 옷차림을 갑자기 말쑥하게 바꾸어 놓았다. 나일론이 폭발적인 인기를 끈 것은 무명, 비단, 삼베, 모시 등에 비해 대단히 질기면서도 값이 저렴했기 때문이다. 워낙 질겨서 잘 낡아 떨어지지 않으므로 좀 과장한다면 입는 사람이 짜증을 낼 정도다. 끈질긴 사람을 나일론같은 사람이라는 말이 나온 이유다.

 

나일론이 물과 친하지 않다는 성질 또한 신기한 것이다. 비를 맞거나 물속에 빠졌어도 툴툴 털어내면 물기가 하나도 없었다. 따라서 비옷으로도 제격으로 우산 없이 비옷만 입고 빗속을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워낙 나일론이 많은 분야에 사용되었으므로 나일론이란 단어가 가짜라는 뜻으로도 전의되었다. 나일론을 나일롱으로 변형되었는데 이 단어는 거의 가짜 또는 사이비라는 뜻의 접두어로 사용되었다. ‘나일롱 군인’, ‘나일롱 신사’, ‘나일롱 주부’, ‘나일롱 대학생심지어는 나일롱 처녀라는 말도 생겼다. 화투놀이에도 나일롱이 사용되어 나일롱뽕이란 놀이는 대단히 유행했다. 나일론이 한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만 비날론은 그렇지 못했는데 이는 비날론과 나일론의 태생이 다르기 때문이다.

 

당시 과학기술에 관한 한 미국, 독일, 일본이 남다른 자신감을 보이고 있었는데 미국이 나일론으로 인공섬유에 선수를 치고 나갔다. 그런데 미국의 캐러더스가 나일론을 발명하자 인공섬유의 축은 급속도로 미국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바로 이때 리승기가 1938년 비닐론(비날론) 제조에 성공한 것이다.

그의 발명은 한마디로 일본의 자존심을 세워준 것으로 일본의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세계를 상대로 하는 전쟁에 돌입한 일본으로써 가장 중요한 것은 군인들에게 입힐 전투복인데 비날론은 적격한 물질이었다.

미국의 합성섬유인 나일론과 일본이 개발코자하는 합성섬유는 기본이 다소 달랐다.

 

미국의 나일론은 폴리아미드 계열의 고분자 화합물인데 반해 일본의 비날론은 폴리비닐알콜(polyvinylalcolho, PVA로 비닐론으로 알려짐) 계열의 고분자 화합물이다. 폴리아미드 계열의 화합물은 원유를 원료로 합성하므로 석유가 나지 않는 일본에서 산업화하기에는 적합지 않았다. 반면에 PVA는 일본의 동맹국이던 독일의 화학자 헤르만(W. O. Herrmann)1924년 합성하는데 성공했고 1927년 노벨상을 수상하는 스타우딩거(H. Staudinger)가 이들 구조를 발표했고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이미 수술용 실로 활용되고 있었다.

 

나일론 발명자 캐러더스 박사

 

2차 세계대전 당시 주축국의 일원으로 기술 교류도 유리했으므로 일본으로서는 비닐론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193910, 교토제국대학(현 교토대) 연구팀인 리승기는 사쿠라다 이치로, 카와카미 히로시. 등과 함께 합성1또는 폴리비닐알콜계의 합성섬유란 이름으로 개발했는데 이것은 본격적인 합성 섬유로 전환을 의미한다. 이 합성1호가 후일 북한에서 대량 생산되는 비날론의 전신이다. 즉 나일론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합성섬유의 실용화에 성공한 사람이 바로 리승기로 이를 토대로 작성한 섬유소 유도체 용액의 투전적 연구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다.

 

리승기는 합성1호로 박사학위를 취득하면서 일본에서 확고한 지위를 다지자 조선인의 긍지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과학잡지 <과학조선>은 조선인 과학자의 대표적인 인물로 리승기를 지목했고 종합잡지 <조광>세계의 학계에 파문을 던진 합성1호의 기염-리승기 박사의 고심연구 달성(193912월호)이라는 제목으로 합성1호 개발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해방 때까지 조선인 출신으로 이공학박사를 받은 인물은 우장춘, 이태규, 리승기를 포함해 12명에 불과했으며, 일본에서 제국대학 박사를 딴 인물은 이태규, 리승기 2명 뿐이었으니 그에 대한 기대는 높지 않을 수 없다.

 

리 박사의 연구가 공업화의 가능성을 열어주기는 했지만 완전한 실용화를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았다. 우선 합성섬유 1호는 뜨거운 물에 닿으면 쉽게 수축됐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열처리를 하는 경우 착색되는 문제점이 있었다. 리 박사는 제조 공정 중에 포르말린 대신 아세트알데히드를 넣는 방법을 고안해 1942년 무렵까지 합성섬유 1호의 대부분 문제를 해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