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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망하는 일본에 군수용품을 만들어 줄 수 없다>
리승기의 일정이 마냥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일제강점기 막바지에 태평양전쟁이 격화되면서 리승기의 업적은 조선인이라는 정체성과 마찰을 일으켰다. 특히 전쟁말기에 리승기가 합성1호의 연구 방향을 군수용으로 전환되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고 연구에 열의를 보이지 않는데다 일본이 패망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조선인 헌병에게 한 것이 빌미가 되어 체포되었다.
그가 체포된 진상은 간략하게 알려져 있다. 일제가 그의 발명을 공업화하는데 혈안이 되었지만 리승기는 군부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비날론이 생산된다면 자신이 오히려 전쟁의 종료를 지체시킬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이런저런 핑계를 대가며 실제로 공업화 완료를 지체시켰다는 것이다. 비날론 제조에 문외한인 군부이지만 상당한 시일이 지나도 아무런 진전이 없자 리 박사를 이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1944년 5월 보고서에 공업화 준비가 거의 끝났다고 보고했는데도 생산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군부는 결국 한국인 헌병을 스파이로 리 박사의 연구실에 투입했다. 스파이는 리 박사를 넌즛이 치켜세웠다. 일본군 졸병으로 왜놈들에게 굽신거리고 있지만 리 박사가 일본인 제자와 조수들을 부리면서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정말로 위안을 받는다는 것이다. 리 박사는 그가 스파이라는 것을 모르고 조선인으로 정을 느끼고 진심을 털어 놓았다. 한마디로 일제강점기의 수모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일본군의 군수물자가 될 화학섬유 공업화를 일부러 지체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곧바로 체포된 리승기는 민간인임에도 1944년 말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오사카 군형무소의 투옥되었고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위의 설명을 보면 합성1호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본격적인 대량생산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로 전쟁에 따른 물자부족도 거론하지만 리승기의 미온적 태도가 보다 크게 역할했음을 알 수 있다. 당대에 비날론의 생산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었음에도 일제가 이를 실용하지 못한 것은 발명의 핵심 아이디어를 리승기가 머리에 갖고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리승기의 동료 연구원인 사쿠라다 이치로 등이 있었으므로 그들이 절대 핵심을 알고 있었다면 일본에서 실용화에 박차를 가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는 뜻이다.
리승기는 해방이 되자마자 1945년 11월 마형옥, 리창직 등 대학에서 함께 연구하던 동료와 학생들과 귀국했다. 다음해 경성대학 이공학부 교수에 취임한 리승기는 자신의 주전공에 대한 강의와 연구를 계속했다.
해방을 맞이했지만 당대의 연구여건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는데 마침 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國立大學校案, 국대안) 파동이 일어난다. 당시 남한을 접수한 미군정은 한국을 구 일본 영토로 간주하여 독립국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학제 개편 등의 중요 사안에서 기존의 체제를 무시하고 미국식 체제를 전면적으로 강요했다. 이와 같은 사태가 일어난 것은 국대안에 총장과 이사진을 미국인으로 임명한다는 등 식민지적 조항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교수들과 학생들이 국대안 반대운동을 하고 동맹휴학을 결의하여 다른 대학과 중고등학교까지 소위 동정 맹휴에 들어갔다. 또한 당시에 많은 지식인들이 조선반도를 포함한 일본권에서 교육을 받았음에도 이들의 의견은 무시하고 영어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인사들의 의견을 우선적으로 반영했다. 일본에서 세계적인 학자로 성장한 리승기와도 자연적으로 멀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많은 학생들과 교수들이 학교를 떠나는데 1947년 결국 리승기 박사도 사표를 내고 전남 담양으로 낙향한다. 그후 미국인 임명 원칙을 철회하겠다는 군정장관의 발표로 교수와 학생들이 복귀하고 리 박사도 1948년 서울대에 복귀하고 대한화학회 부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공과대학 학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남한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월북했기 때문이다.
리승기의 월북 배경에 대해 그가 사상적으로 공산주의에 기울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지만 박성래 교수는 이런 설을 부인했다. 그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몇 차례의 월북 제의가 있었는데도 계속 거절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리승기의 월북은 사상 때문이 아니라 연구 여건 때문으로 적었다. 당시 북한의 일부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 여건은 남한보다 상대적으로 좋았다. 남한은 국대안 파동 등으로 혼돈 상태에 있으므로 지식인들이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지만 북한은 재빠르게 정치적 혼돈을 잠재워 연구 여건이 남한과 상당히 달랐다. 특히 당시 남한은 과학자에 대한 지원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반면 북한은 해외에 거주한 조선 과학자까지 초빙해서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적극 지원했다. 리승기 박사의 월북이란 현상에 대해 당대의 남북한 정황을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으로 접근한 김성칠 교수, 공동철, 김재정 박사 등의 글을 기본으로 설명한다.
북한이 이렇게 일찍부터 과학기술을 중시한 것은 북한이 중요하게 내세우고 있던 식민지 잔재의 청산과 사회주의 사회 건설에 과학기술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선 과학기술은 일제강점기 동안 가장 억압한 분야였으므로, 그를 발전시키는 일은 식민지 폐해로부터 하루 빨리 벗어나는 중요한 조치로 여겨졌다. 그리고 과학기술은 사회주의 체제건설에 요구되는 ‘과학적 사상’의 증진과 물질 생산력의 발전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로 인해 과학기술자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사상적 구속을 덜 받으며 활동할 수 있었다. 북한의 체제상 사회 전반적으로 정치사상이 매우 강조되었지만 당시 북한의 현실이 과학기술계에 대해서만은 그 적용을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다. 북한은 과학기술자를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적극 옹호했는데 이는 공산체제에 대항세력이 될 가능성은 없었던 대신 절대 필요성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과학기술 분야의 전문가들이 적었으므로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사람들은 한 명이라도 소중한 자산이었다. 그러므로 부족인력을 단기간에 메울 방법으로 당시 남한에 있던 과학기술자들에게도 눈을 돌린다.
어느 분야보다도 과학기술계 인사들이 월북을 많이 했는데, 이는 북한의 유인과 남한의 배척이 상호작용을 한 결과였다. 남한에서는 ‘국대안 파동’으로 많은 과학기술자들이 대학을 떠났고 북한은 이를 놓치지 않고 공작전담반까지 만들어 그들의 월북을 조직적으로 추진했다.
당시 남한에 있던 리승기는 북한에서 유치 대상으로 삼은 주요 인물 중 하나였다. 몇 안 되는 박사학위 소지자였던 데다가 해방 전에 일제에 대한 비방과 비협조적인 태도가 문제가 되어 투옥된 적도 있어 북한에서 영입할 주요 명분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리승기는 북한에서의 집요한 월북 제의와 권유에도 불구하고 응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남한에서 좌익에서 그렇게도 문제시하던 국립서울대학교의 공과대학 학장을 역임하고 국가의 과학기술 정책을 논의하는 주요 회의에 참여하는 등 오히려 남한 정부에 상당 기간 협조적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많은 것을 변하게 했다. 전쟁 때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서울에 머무르고 있던 그에게 김일성의 위임을 받은 북조선공업기술연맹의 책임자인 리종옥이 1950년 7월말 방문하여 비날론연구소 설립을 보장하면서 월북을 권유하였고, 그는 소달구지를 타고 북으로 갔다. 그리고 북한의 9⋅28 퇴각 때 가족들까지 모두 데려갔다.
많은 사람들이 사상 때문이 아니라 등에 떠밀려서 38선을 넘은 사람들이 많다는 설명도 있지만 여러 정황을 볼 때 리승기 박사는 강제 월북이 아니라 자진 월북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북한에서 흥남 화학 공업단지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발전시킬 수준급의 화학자가 시급해 필요했고 더욱이 리승기 박사의 딸이 이미 흥남 내의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리승기 박사의 큰 딸은 자신의 모교이자 근무지였던 교토대학에 진학시켜 자신의 길을 걷게 했는데 그 딸이 졸업 후에 흥남연구소 갔다는 설명이다.
리승기 박사가 월북한다고 하자 일본과 서울대학교에서 배출한 제자와 동료 거의 모두 합류했다. 이 당시 ‘서울대학교 응용화학과가 통째로 넘어갔다’고 할 정도였다. 리승기 박사의 월북 사건은 한국이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후 곧이어 한국전쟁이 포함되므로 월북 사건 자체로만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세계 역사상 볼 수 없는 한국전쟁은 이상과 현실의 양면성을 갖고 있다는데 더욱 설명이 어려워진다. 북한이 일으킨 명분은 조국해방과 인민해방이라는 이상이었지만 저지른 결과는 처참한 동족상잔이었다는 점이다.
<조선과학자들의 월북>
리승기의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은 매우 복잡하게 엮어진다. 여수순천반란사건, 4⋅3제주항행, 지리산 공비토벌 등 이남에서는 이미 전쟁에 준하는 상황으로 많은 무고한 양민들이 대량 살육된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 친일세력들도 활개를 치고 있는 상황에서 여하튼 한국전쟁이 일어났는데 전쟁의 현실은 엄청난 규모로 확대된 살육과 동족끼리의 어처구니없는 극도의 적대감 그리고 외세의 개입으로 이어진다. 현재도 가장 첨예한 문제는 북침이냐 남침이냐는 문제인데 이 문제는 1994년 7월 러시아로부터 한국전쟁에 대한 극비문서들이 공개되면서 한국전쟁은 북한측의 치밀한 계획에 의한 남침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인정된다. 김성칠 교수는 북한이 남조선 해방이라는 선전을 공공연히 해 온 가운데 소련의 지원을 받은 치밀한 전쟁 계획에 의해 남침하였다고 못 박았다.
북침설이 완전히 의미를 잃었지만 남측에서 북한의 침략을 유도했다는 남침유도설과 연계되는 조국해방전쟁이라는 시각도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김성칠 박사는 이런 주장이 나오게 된 연유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대한민국 요로에 있는 분들이 항상 북벌을 주장하고 또 일부는 우리의 손목을 붙들고 말리는 사람만 없다면 우리는 1주일 안으로 평양을 석권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남한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허황된 북벌론을 떠벌렸다는 점이다. 김성칠 교수는 남북 모두에 유감의 표시를 적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남한과 북한에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는 인민을 채찍질하여 밤낮으로 침공의 준비에 전력을 기우린 반면 다른 하나는 큰소리만 뻥뻥 하였을 뿐 침략에 대처할 수 있는 준비도 게을리 하였다. 또 한편의 종주국(소련)은 졸개야 어느 지경에 가든 한 번 씨름해보라고 무책임한 지령을 내렸고 또 다른 편의 종주국(미국)은 사려 깊게도 결코 선손을 걸어서는 안 된다고 손목잡고 말렸다.’
바로 이 부분에서 리승기 박사의 월북이 거의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적었다. 당시에 재능있는 많은 인물들이 남한의 현실에 절망하고 있던 차에 북한의 선전과 회유로 월북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의 이공계 여건은 남한보다 좋았다. 북한에도 일본강점기에 세운 공업 설비가 남아있었지만 이를 운영할 사람이 없었다. 월북을 권유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유인책으로 제시한 것이 안정적인 연구 여건이었다. 남한에서 과학 지식인들을 푸대접하는 상태에서 리승기 박사처럼 유명한 지식인에게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는 제안처럼 솔깃한 것은 없었다는 설명이다.
리승기를 더욱 솔깃하게 만든 것은 북한의 월북조건이었다. 그의 관심사는 PVA 섬유 즉 합성1호였는데 북한은 흥남의 질소 비료공장에서 일하도록 주선하겠다는 것이다. 흥남의 질소 비료공장은 일제강점기에 건설되었는데 당시에는 세계적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생산하는 제품 가운데 카바이드, 아세틸렌, 아세트산, 아세트알데히드 등은 곧바로 PVA를 만드는 원료였다.
자신이 원하는 연구 조건을 북한 측에서 충분히 배려할 수 있다는 말에 그는 경도제대와 서울대학교에서 길러낸 제자와 동료들과 함께 자진 월북했다. 이 당시 많은 학자들이 그와 같은 길을 택했는데 김성칠 교수는 이들이 처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많은 지식인들이 오랫동안 일제의 가혹한 압제 밑에서 신음해오다가 해방 후 큰 기대를 가졌지만 당시 남한의 여러 정책 등이 하도 빈곤하여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그후 벌어진 남한에서의 여러 여건으로 마침내 남한에 대한 반발심이 북한에 대한 동경심으로 변했고 또 북한의 활발한 선전공작이 주효하고 있던 판에 한국전쟁을 맞았다.
글줄이나 쓰고 그림폭이나 그리던 사람들 심지어 음악가⋅영화인에 이르기까지 재주있다는 사람들이 많이 북으로 가버렸다. 학계로 말하면 신진발랄한 사람이 많이 가고 남한에는 무기력한 축들이 지천으로 남아 있다. 월북한 그들이 모두 볼셰비키였다면 모르지만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던 사람들 또는 양심적인 이상주의자들이 죄다 가버렸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깊이 반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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