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 노벨상이 만든 세상/비날론

석회석과 무연탄으로 만든 세계 2번째 화학섬유, 비날론(3)

Que sais 2020. 10. 6. 06:56

youtu.be/sMkE4I_2Ksw

<우여곡절의 비날론 생산>

남한에서 올라간 많은 학자들이 북한의 화학 공업과 섬유 공업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북한의 연구 진행도 예상대로 되지는 않았다. 한국전쟁의 전황이 변하면서 북한군이 전면적으로 퇴각하자 그의 연구실도 평안북도 최북단인 청수로 옮겼다. 청수는 지역적 안정성과 실험재료로 사용될 카이드와 아세틸렌블랙 생산공장이 있었다.

그는 연합군의 폭격을 피해 지하 방공호에 연구실을 설치한 후 본격적인 비날론 대량 생산 공정을 계획하였고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부터 본격적으로 연구원들을 투입하여 비날론 생산에 박차를 가한다.

 

오늘날 플라스틱(합성수지)의 핵심적인 물질 중 하나인 염화비닐(통칭으로 비닐)인데 비닐화합물 중 초산비닐(아세트산비닐)이 비닐론의 원료이다. 그런데 염화비닐과 PVC는 석유화학산업의 계열적(stream)인 산물이다. 즉 정유공장을 가장 정점(upstream)으로 하는 계열적 석유화학산업의 아랫계열(downstream)에서 나오는 생산물인데 1950년대에 북한에는 석유가 없었다. 즉 석유화학산업이 없으므로 비닐화합물 특히 초산비닐을 확보하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결론은 리 박사가 염화아연법으로 제조한 활성탄을 가지고 초산비닐 합성에 성공했다.

 

이를 토대로 1954년 하루 20킬로그램, 1957년에는 하루 200킬로그램을 생산하는 파이로트 플랜트가동에 성공했다. 북한에서 전 국민을 총동원하여 경제 기반 건설과 생산 증대를 독려하던 이 당시를 상징하는 단어가 바로 천리마였다. 천리마시대는 북한이 전후 복구를 대체로 완료하고 본격적인 경제 건설에 돌입한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을 말하는데 이때는 북한에서 외교적, 경제적으로 소련과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립을 강구하는 독자 노선이 추진되었다.

당시에 소련은 북한에게 독자적인 공업 건설 등을 포기하고 사회주의국제분업체제에 편입되는 것을 강요했다. 이것은 소련과 동구권에게 원료를 공급하면 대가로 공산품을 주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북한의 자체적인 발전을 가로막는 것이나 다름 아니었다.

 

천리마 운동(비날론)

마침 중소 분쟁 등으로 사회주의권에서 소련의 주도권이 약해지자 북한은 자주 노선을 표방한다. 즉 정치적으로 독자 노선을 채택하고 경제적으로도 자립적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소련이 제안한 사회주의국제분업체제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생존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천리마 시대의 대표적 성과가 바로 1961년에 1차적으로 완공된 2·8 비날론기업소이다. 961년부터 북한에 풍부한 석회석과 무연탄, 전기를 이용해 만든 카바이드를 기본 원료로 삼아 생산되는 연간 50,000(20,000톤이라는 말도 있음)의 비날론이 생산되기 시작했고 이를 주체섬유로 발표했다. 당시 김일성은 비날론의 생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비날론 공업은 완전한 우리의 주체적 공업입니다. 그것은 첫째로 비날론을 발명한 것도 조선 사람이고 그것을 생산하는 공장을 설계하고 건설한 것도 조선 사람이기 때문이며, 둘째로 우리나라의 풍부한 원료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북한에서 얼마나 중요시 되었는지는 연건평 40,000제곱미터의 공장 설계를 6개월에 작성한 후 19609월에 본격적인 공사에 착공하여 완공된 것이 19615월이므로 공사기간이 고작 7개월이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연간 50,000톤이라면 북한 주민을 2,500만 명으로 볼 때 단순 계산하더라도 1인당 약 2킬로그램의 비날론을 공급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는 북한 주민 모두에게 두툼한 겨울철 외투를 지급할 수 있는 양이다. 물론 얇은 옷이라면 10여 벌을 공급할 수 있으므로 파급효과가 얼마나 큰지 이해할 것이다. 비날론의 성공이후 주체과학은 여러 부분에서 시도되는데 무연탄을 이용하여 가스를 생산해 내는 공장이 건설되는 것은 물론 한의학과 서양 의학의 접목도 이루어졌다.

현재 비날론(비닐론)2/3는 산업자재로서 사용된다.

비날론은 비중이 1.26으로 자연섬유에 비해 매우 가볍고 질기다. 그러므로 어망(漁網육상망·밧줄·범포·천막·포장재료(비료·곡물·야채 부대), 바가지와 물통, 농업용 천, 컨베이어 벨트, 자전거의 타이어코드나 복합재료로서도 활용된다. 높은 강도, 양호한 내후성(耐候性), 뛰어난 내약품성과 내부패성 등의 성질을 이용한 것이다.

비날론이 큰 효용도를 보이는 곳은 옷감 재료이다. 비날론은 합성섬유이면서도 전통 섬유인 무명과 특성이 비슷하여 특히, 양털 등의 자연섬유와 혼직하면 섬유 간의 성질이 유기적으로 결합돼 고품질의 외투천, 양복천들을 만들 수 있다. 또한 흡수율이 5%로 다른 비닐계 섬유보다 높다. 흰색을 띠고 윤기가 나며 내구성이 길며, 열전도성이 낮아 보온성이 좋은 것이 특징으로 작업복·학생복, 이불감·목도리 등은 물론 메리야스를 만드는데도 사용된다.

더불어 산, 알카리에 견디는 성질이 좋고 20도에서 20% 류산에 견디고 묽은 가성소다용액에는 침식되지 않는 성질을 지녔다. 대부분의 유기용매에 안정하며 바다물속에서도 썩지 않는다. 따라서 비날론은 매우 질기고 따뜻할 뿐 아니라 곰팡이를 비롯한 미생물의 침입을 거의 받지 않아 옷감에서 공업용에 이르기까지 넓은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비날론이 화학약품에 강다는 것이 오히려 단점으로 상황에 따라 염색이 잘 안 되는 경우가 있다. 특히 나일론보다 생산비용이 높은 것으로 알려지는데 이것은 효율이 좋은 원유보다 석탄을 사용하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원유가 아니더라도 석탄과 석회석만으로 원료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장점이었다.

북한에서 비날론 생산이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1961년부터 실 생산에 성공하여 세계를 놀라게 한 북한의 2·8 비날론기업소는 생산 중단의 위기를 맞는다. 제조 과정에서 많은 폐기물이 나오는 것은 물론 생산과정에서 전기가 막대하게 소모되는데 수력발전만으로도 전기가 남아돌던 19501960년대에는 그야말로 대량으로 전기를 사용해도 무방하지만 전력 부족이 문제가 되자 결국 1994년 각종 에너지 공급 부족으로 가동을 멈췄다. 당시 평남 순천에 100억 달러가 드는 연산 10만 톤 규모 비날론 공장을 짓다가 이마저 외화난으로 공사를 접었다는 말도 돌았다.

 

그런데 북한은 20102월부터 현대화 공사를 거쳐 연산 15만 톤에 달하는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2012년에는 비날론을 이용해 만든 담요, 양복천, 외투천, 목도리 등 다양한 제품들을 북한에서 시판되는데 흡습성이 좋고 질기기 때문에 시민들의 호평 속에 판매된다고 주장했다. 일부 학자들은 북한에서 비날론의 실용화가 매우 큰 변화를 갖고 왔다고 설명한다. 북한에서 의복 등은 정부의 지급품인데 과거에 북한인들이 입는 옷의 색깔이 대체로 우중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비날론이 생산된 이후 북한인들의 옷이 적어도 과거보다는 화려해졌다고 말한다. 이는 전적으로 비날론의 대량 생산 때문으로 추정하는데 앞으로 기술 개발의 추이에 따라 보다 업그레이드된 제품들이 출시될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북한의 비날론 생산에 대한 발표는 북한의 체제 유지를 위한 선전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2012년 강성대국 건설의 상징성과 김정은으로의 3대 세습 선전을 위해 비날론을 선전하고 있다는 주장인데 이 문제는 앞으로 상세 내역이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참고적으로 일본에서도 PVA 섬유(비닐론)을 산업용 고부가가치 섬유로 부상시키는데 성공했다. 고강도, 고탄성화가 가능해짐에 따라 건축재료, 고무보강용으로서 뿐 아니라 산업용 섬유 전 분야에 다량 사용되며, 특히 석면의 대체품으로 PVA 섬유가 각광을 받고 있다. 이는 일본에서 PVA 섬유의 중요성을 알고 꾸준한 기술개발을 거친 것으로 앞으로 PVA 시장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추정한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의 PVA 생산은 석탄이 아니라 석유를 주원료로 사용한다.

 

<국장으로 치러진 장례식>

북한이 오늘날에도 비날론을 중요하게 평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박성래 교수는 적었다. 일본에서는 비날론(일본식 이름은 비닐론)을 의복용보다는 산업용으로 많이 연구했지만 북한에서는 주로 의복용으로 연구하여 실제적인 활용도를 높였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는 소련, 1980년대에는 몽골에 비날론 생산 기술을 수출하기도 했으므로 주체 섬유에 대한 평가가 높아지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북한의 비날론 생산은 남한에서도 큰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한국에서는 미국에서 생산된 나일론이 기적의 섬유라 불리며 스타킹, 양말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나일론을 생산해 낼 수 있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 외국에서 실을 들여와 직물을 짜거나, 완제품을 수입해야 했다. 1965년에 비로소, 동양나이론(지금의 효성)이 나일론 원료를 만드는 데 성공하여 북한의 주체 섬유에 대항할 수 있었다.

 

비날론 공장

 

비날론 공장 준공 후 리승기가 국내외에서 받은 포상과 훈장은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리승기는 1961년 비날론 공장의 준공과 함께 노력 영웅의 칭호를 받았으며 다음해에 공산주의권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소련의 레닌상 수상자가 되었다. 1966년에는 북한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소련과학아카데미명예원사(원사는 소련과 북한의 학제에서 박사보다 높은 단계) 칭호를 받았다. 1980년 김일성의 생일에 국산 원료와 자재로 비날론 공업을 창설하고 인민 생활에 공헌한 공로로 김일성상을 받았으며 1986년 중국으로부터 인민과학자칭호와 국기훈장제1급을 받았다. 저서로 자서전인 어느 조선 과학자의 수기가 있다.

 

그는 1960년 이후 과학계 대표로서 1990년까지 최고인민회의 대위원도 지냈으며 망명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이 1967년 영변원자력연구소가 설립되어 원자력 연구를 시작했을 때 초대 연구소장을 맡았다. 그가 병으로 누웠을 때 김일성이 그에게 100년 된 산삼을 보냈다는 일화가 있다. 19962월까지 91세라는 보기드믄 장수를 했는데 1995년의 생일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생일상을 올렸다고 한다. 그에 대한 특출한 예우는 1996년 그가 사망했을 때 국장(國葬)으로 치룬 것으로도 알 수 있으며 현재 평양 신미리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리승기의 전력을 보면 그야말로 천재 과학자라기보다는 애국자라는 표현이 알맞다. 나일론과 더불어 합성섬유 분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비날론을 발명하였음에도 일제에 항거하다 투옥되었고 각가지 회유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감옥에서 버텼다. 그의 발명이 세계적임을 감안하면 과학자로서 실제 자기의 아이디어가 생산되는 것 자체가 큰 영광일 수 있음에도 그는 끝까지 조선인으로서의 긍지를 꺾지 않았다.

 

그의 발명이 탁월했다는 것은 전쟁이라는 변수가 있지만 일본이 탐이 나는 기술임에도 이를 실용화하지 못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와 일본인이 공동으로 개발했다고 알려지지만 핵심 기술은 리승기가 갖고 있으므로 일본인이 전쟁 말기에 실용화에 그렇게도 혈안이 되었지만 성공치 못한 것이다. 한마디로 리승기가 갖고 있는 정확한 공정을 몰랐기 때문이다.

 

여하튼 리승기는 일본이 패망하자 비로소 석방되었다. 그야말로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과학 천재임에도 불구하고 해방된 고국에 귀국하여 한국의 화학공업에 헌신을 하려했지만 여건은 그를 월북케 만들었다는 시각이 팽배하다. 그러나 그가 월북했다는 사실은 한국에서 그를 경원하는 단초가 되었다. 사실상 그의 월북이후 다른 월북자들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에서 그에 대한 언급조차 금기였다. 그러므로 그가 세계적으로 과학기술 분야에서 절대적인 공헌을 했음에도 분단이라는 현실이 그의 업적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2000815일 서울의 이산가족상봉행사에 참여한 북쪽 인사 중에는 리승기의 부인 황의분 여사가 있었다. 당시 북측 방문단의 최고령자인 황 여사는 올케 강순악씨와 조카 황보연씨 등을 만났다. 이를 계기로 남한의 언론에서도 리승기에 대해 그의 업적을 다루는 계기가 되었다.

 

리승기 박사 묘(애국열사릉)

 

역사에서 만약이란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광복 이후 남한에서 과학자를 우대했다면 리승기 박사가 서울대 응용화학과에서 길러낸 제자들과 함께 집단으로 월북하는 일은 없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는 미군정이 한국을 일본의 영토로 간주해 서울대의 학제개편을 미국식으로 강요하자 담양으로 낙향했을 때도 아편쟁이가 아편을 잊지 못하듯 비날론을 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한국인 과학자의 해외 두뇌유출을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과학자에게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일은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한편 박성래 교수는 리승기의 복권이야말로 남한에서는 북한의 과학 기술과 과학기술자를, 북한에서는 남한의 과학 기술과 과학 기술자를 온전하게 평가할 수 있게 되는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적었다. 그러므로 리승기 박사가 과학기술인 명예의전당에 헌정되는 것도 결코 무리한 일이 아니라는 시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참고문헌 :

숨겨진 북한의 최고 과학자, 리승기 , 서금영, 과학향기 SCI-FUSION, 2007.10.10.

[씨줄날줄] 비날론의 역설/구본영 논설위원, 구본영, 서울신문, 2010.03.09.

, '주체섬유' 비날론제품 판매 시작, 안윤석, 노컷뉴스, 2012.01.25

두 사람, 같은 시대 다른 길(1), 이규태와 리승기, 김재정, 네이버 사이트

http://www.rfchosun.org/program_read.php?n=7106

http://sonnet.egloos.com/4389149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2529&cid=46637&categoryId=46637

리승기, 공동철, 학민사, 1995

과학, 그 위대한 호기심, 서울대학교 자연대 교수 외, 궁리, 2002

우리 과학 100, 박성래, 현암사, 2003

진정일의 교실 밖 화학 이야기, 진정일, 양문, 2006

우리 지역을 빛낸 발명위인! 발명품!, 한국발명진흥회, 특허청, 2006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김육훈, 휴머니스트,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