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학의 등장>
멘델의 중요성은 유전의 기본적인 원리를 발견했고 그의 결과를 바탕으로 세포생물학과 결합된 유전학이라는 학문을 태동시켰다는데 있다. 이를 다시 설명한다면 멘델의 법칙은 형질의 유전은 절대로 변형되거나 사라지지 않는 유전 요소에 의하며 이것은 일정한 수로 표현할 수 있는 규칙에 따라 자손에게 유전된다는 것이다. 다윈은 부모의 형질이 자식의 몸 안에서 완전히 융합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빨간 꽃에서 얻은 씨로 흰 꽃을 피우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다. 이 문제를 멘델이 매끄럽게 해결해 준 것이다.
진화론에서 제기된 다윈의 고민을 다시 한 번 설명한다.
유전자라는 단어조차 태어나지 않은 시대의 다윈은 흑인과 백인이 결합하면 융합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했다. 금발 속에서 한 명의 흑발 돌연변이가 나타났다고 가정하자. 다윈은 세대가 지나면서 ‘흑발’ 형질이 물통에 떨어뜨린 잉크 한 방울처럼 퍼질 것이고 모든 이의 머리카락이 전보다 다소 검은 색을 띨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처음 나타난 후 다른 돌연변이가 생길 때까지 진짜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멘델은 무질서하게 보이던 유전 속에 숨어있는 규칙성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 원형 형질은 처음 나타난 그대로 후대에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멘델의 이 발견이 생물학 사상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공헌을 한 획기적인 것임에도 1865년에는 게재를 거부당하기도 했으며 1866년에야 겨우 <브륀자연사학회>에서 발표를 승낙했다. 당시의 학자들에게 식물의 육종(育種)은 지대한 관심사였지만 멘델의 설명을 들은 청중들은 아무런 감동도 받지 못했다.
멘델은 자신의 논문 사본을 스위스의 저명한 식물학자 카를 빌헬름 폰 네겔리(W. W. Von Ngeli)에게 보냈다. 자신의 이론이 알려지기 위해서는 그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네겔리는 멘델이 발견한 사실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고 조밥나물을 연구해보도록 추천했다. 네겔리가 멘델의 논문을 꼼꼼하게 읽어보지 않았거나 아니면 전혀 읽어보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멘델은 실망하여 유전에 대한 연구를 포기했다. 더구나 그가 1868년 봉직하던 수도원의 수도원장에 임명되자 더 이상 연구에 종사할 수도 없었다.
멘델이 시골의 수도자였고 그의 발견은 대체로 우연에 의한 것이라고 소개되지만 사실 멘델은 교육을 받은 과학자였다. 멘델은 1822년 7월 오스트리아 제국의 하이첸도르프로 현재의 체코공화국의 힌치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멘델은 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자연 과학에 큰 관심을 보였지만 1843년 모라비아의 부륀, 현재의 체코공화국의 브르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 수업을 받기 시작했고 1847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제 교육을 받으면서 혼자서 과학을 공부했고 1849년 인근 중등학교에서 수학 과목 대리 교사로도 잠시 일했다. 다음 해 그는 교사 자격시험에서 떨어졌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생물학에서 최저 점수를 받았다는 점이다. 1851년 수도원원장은 멘델을 빈 대학교로 보내 물리학, 화학, 수학, 동물학, 식물학을 공부하게 했다. 대학교에서의 학업이 끝나자 부륀에 돌아와 고등학교에서 자연공학을 가르쳤다.
그는 수도원원장으로 선출된 1868년까지 계속 고등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쳤지만 평생 자격시험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가 1843년부터 봉직했던 수도원은 당대에 연구하기 좋은 곳으로 2만권의 장서가 있었다. 또한 수도원이므로 매우 지루하고 어려운 완두를 교배하여 그 특성을 연구하는데도 더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물론 그에게도 선배는 있었다. 18세기 후반 독일의 식물학자 케로이터(Josef Gottlieb Kӧlreuter)는 식물들 간의 상호교배(reciprocal cross)에서 얻어진 자손을 연구하여 자손에게 유전된 형질에 양친이 모두 동일하게 기여한다고 발표했다. 상호교배는 식물들이 성을 바꾸어 교배하는 것으로 예를 들면 한편의 교배에서는 흰 꽃의 수그루와 붉은 꽃의 암그루가 부모가 되고 반면에 상보적인 교배에서 붉은 꽃의 수그루와 흰 꽃의 암그루가 부모가 된다. 켈로이터는 실험에서 상호교배는 항상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양친이 동일하게 기여한다는 개념은 매우 중요한 발견이지만 양친이 정확하게 무엇을 기여하는가에 대한 본질, 즉 유전 단위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해한 유전의 법칙은 융합설(blending)이다. 다시 한 번 설명하지만 붉은 꽃의 형질을 지닌 식물과 파란 꼿의 형질을 지닌 식물을 교배했을 때 양친의 형질이 섞인 자줏빗 꽃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 개념에 따르면 한 번 유전적 요소들이 결합되면 마치 섞인 잉크가 분리되지 않듯이 이들은 다시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들이 당대의 상식으로 알려지고 있는 와중에서 라마르크(Jean Baptiste Pierre Antoine de Monet Chevalier de Larmarck, 1744~1829)가 당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파격적인 가설을 발표한다. 획득형질 즉 습득되 어떤 것이 유전된다는 것이다.
라마르크는 식물이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했는데 멘델이 그의 이론을 시험해보려고 한 것이다. 멘델은 수도원의 관상용 식물 중에서 특이한 변종 하나를 발견했다. 멘델은 그것을 전형적인 품종 옆에 다시 심은 뒤 그 자손들을 연구했는데 자손들은 부모의 기본 형질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뜻했다.
멘델의 완두콩 실험은 두 가지 면에서 과거의 연구와 차별이 있었다.
첫째 식물 전체의 특징을 관찰하는 대신, 멘델은 둥근 씨앗 대 주름진 씨앗, 자주 꽃 대 흰색 꽃 등과 같이 분명하게 가시적이고 차별적인 한 가지의 형질에 초점을 맞췄다. 둘째 멘델은 각각의 형질을 지니고 있는 식물의 수를 정확하게 셌다. 생물학 과정을 이해하고 예측하는 수단으로 수학과 통계학을 이용하려는 시도는 멘델 이전에 그 누구도 하지 못했다. 그의 이러한 발상 전환에 부수되는 수량 자료 덕분에 그는 과거의 연구자들이 놓쳤던 통계학적 유형과 비율을 볼 수 있었다.
여하튼 멘델은 유명한 일련의 실험을 계속했다. 유전자 법칙을 발견하게 되는 지루한 길로 들어선 것이다. 우선 그는 순종을 얻기 위해 2년여의 시간을 들여 표본을 준비했다. 각각의 표본은 키가 크거나 작은 것, 씨앗 색깔이나 꼬투리 형태, 줄기에 달린 꽃의 위치 등의 특징을 갖도록 재배했고 이를 토대로 유명한 논문을 작성한 것이다.
<유전자의 기적>
멘델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의 논문은 실망스럽게도 곧바로 사장되었다. 멘델은 자신의 연구가 인정을 받지 못해 매우 상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멘델은 언젠가 자신의 때가 오리라는 것을 믿었다. 1883년 죽기 몇 달 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과학 연구는 내게 큰 기쁨을 안겨 주었다. 머지않아 전 세계가 내 연구 결과를 인정하리라 확신한다.’
그의 장담처럼 그의 논문이 일시적으로 잊혀 졌지만 학자들이 그가 제출한 논문 자체를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멘델의 중요한 연구는 일반 학자들에게는 거의 잊혀 졌지만 그의 논문은 당대에 이미 120개 도서관에 소장되었고 그의 연구 내용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게재되고 있었다. 또한 당대의 저명 학자인 빌헬름 올버스 포케가 여러 번 자신의 논문에 인용한 적도 있었으므로 언젠가 다시 발견될 소지는 충분했다.
멘델의 연구는 빛을 보지 못했지만 종이 가진 특이한 성질의 전달에 대해 과학자들이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연구를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한 학자가 19세기 후반 독일의 발터 플레밍(Walter Flemming, 1843〜1905)과 아우구스트 바이스만(August Weismann, 1834〜1914)이다.
플레밍은 세포 관찰에 사용하는 염료의 성능을 향상시켜 1879년 세포핵에서 실 모양의 물질을 발견했다. 그는 세포 분열 과정 중에 훗날 염색체라 부르는 이 실타래가 굵어지고 짧아져서 세로 방향으로 갈라진 후 각각의 갈라진 반쪽(염색 분체)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이동해 2개의 새로운 세포(딸세포)가 된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가 발견한 세포 분열 과정은 실 모양의 물질이 보인다고 해서 지금도 유사(有絲) 분열이라고 한다. 그에 의해 세포 단계에서 유전에 관련된 물리적 과정이 알려진 것이다.
플레밍은 멘델의 유전법칙을 몰랐기 때문에, 자신이 연구와 유전을 연관짓지는 못했다. 20여년이 지난 후에야 자신이 발견한 것이 멘델의 법칙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유사분열과 염색질을 발견한 것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100대 발견 중의 하나라 꼽히며, 세포생물학의 10대 주요 사건으로도 선정될 정도로 중요성을 부여받았다. 또한 ‘세포유전학의 창시자’라는 별명을 얻는다.
세포 기구의 상당 부분이 유사 분열에 활용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다세포 동식물이 자연사했거나 손상된 세포를 대체하고 단세포 생물이 자기 복제를 하는 수단이 바로 유사 분열 과정이기 때문이다. 유사 분열의 각 단계를 일어나게 하는 요인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분자생물학자들에 의해 세포의 성장과 분열을 촉발시키는 중요한 사건들을 자세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생물의 세포 분열 과정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원래 세포와 똑같은 새 세포를 만들어내는 것이 세포 분열의 궁극적 목적이기 때문이다. 세포의 일생은 다음 다섯 단계로 나누어진다.
① 간기 : 세포는 일생의 대부분을 이 단계에서 보내는데 간기 동안에 세포는 복제를 하지 않고 특정 단백질을 만들거나 지질(脂質)을 분비하거나 몸의 각 부분을 지탱해주는 결합 조직 물질 등을 만든다.
② 전기 : 세포는 간기 때 분열하라는 외부 자극을 받으면 전기로 들어선다. 세포핵 속에 흩어져 있던 긴 DNA 가닥은 응축되면서 염색체라는 조직적인 구조를 갖추고 분열할 준비를 한다.
③ 중기 : 중기에서 모든 염색체가 세포 중앙의 ‘적도판’에 정렬해 양극으로 끌려갈 준비를 한다.
④ 후기 : 복제된 새 염색체와 원래의 염색체가 갈라지면서 염색체 분리가 시작된다.
⑤ 염색체가 각자의 세포에 도착하면 새로 만들어진 두 세포 사이에 새 세포막이 생긴다.
1887년에는 벨기에의 베네덴(Edouard van Beneden, 1846〜1910)이 같은 종의 세포는 모두 같은 수의 염색체를 가진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염색체는 핵산에 단백질이 결합되어 있는 구조로 세포 분열시 절반씩 나뉘어 진 후 분열된 세포 모두에게 전달된다는 점에서 유전 물질의 운반체로 의심될 만도 했으나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바이스만은 플레밍이 발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는데 플레밍의 설명만으로는 난세포와 정세포라는 특별한 세포의 분열은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에 멘델의 실험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바이스만은 동물의 정세포와 난세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종이 핵심을 이루는 어떤 물질, 즉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잘 보존되면서 전달해야 하는 물질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바이스만의 ‘생식질’ 설로 그는 모든 생물은 특이한 유전 물질을 지니고 있다고 결론내렸다. 그는 또한 양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유전 물질이 수정란 속에서 합쳐진다면 유전 물질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서 결국에는 세포가 그것을 다 담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바이스만은 유전 물질은 플레밍이 명명한 염색체에 의해 전달되고 각 딸세포의 핵이 양 부모의 세포핵으로부터 한 쌍의 염색체 가운데 절반씩만 물려받는 독특한 형태의 세포 분열(감수 분열)을 거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인간의 경우, 인체의 다른 모든 세포 안에는 23쌍(46개)의 염색체가 들어 있는데 비해 난세포와 정세포에는 염색체가 23개만 들어 있다.
<멘델의 재발견>
19세기가 끝날 무렵 많은 학자들이 바이스만의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 연구를 계속했는데 1901년 네덜란드의 드 브리스(Hugo de Vries)가 1892년부터 1896년까지 양귀비의 자주빛 꽃이 피는 품종과 흰 꽃이 피는 품종을 교배시킨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잡종 1세대는 전부 자주꽃이 피었으나 잡종 2세대에서는 전체의 77.퍼센트가 자주꽃을 피우고 22.5퍼센트는 흰꽃이 피었다. 잡종 제2대에서 자주꽃을 피운 양귀비만을 교배시킨 결과 잡종 제2대의 양귀비 중 30.8퍼센트는 모두 자주꽃이 피는 잡종 제3대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자주꽃이 피는 잡종 제2대의 나머지 69.2퍼센트의 그루에서 태어난 잡종 제3대에서는 75.5퍼센트가 자주빛의 꽃을 피우고 24.5퍼센트는 흰 꽃을 피웠다. 이것은 멘델의 결과와 같았다. 드 브리스는 자신의 발견을 기반으로 '돌연변이'가 바로 새로운 종의 형성기원이며 돌연변이에 의해 형성된 새로운 종이 살아남는 것은 생존경쟁과 자연도태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드디어 돌연변이란 단어가 드 브리스에 의해 탄생된 것이다.
독일의 코렌스(K. E. Correns)도 옥수수와 완두 등을 사용하여 교배 실험한 결과 멘델과 드 브리스와 같은 결과를 얻었다. 그는 자신의 실험 결과를 보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몰랐는데 갑자기 입자가 유전한다는 생각을 섬광처럼 떠 올렸다고 했다. 빈의 체르마크(Von S. E. Tschermak)도 완두를 가지고 같은 발견을 했다.
그러나 멘델이 재평가된 것은 코렌스가 우연하게 포케의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코렌스는 어버이의 형질이 입자에 의해 자식에게 전승될지 모른다고 생각한 후, 수 주일 후에 포케의 책에서 멘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코렌스는 앞에 설명한 네켈리의 제자로 멘델의 실험을 그로부터 들은 것이 있었다. 코렌스가 논문을 쓰고 있는 동안 드 브리스로부터 논문의 카피를 받았다. 두 명은 1900년 5월 모두 멘델이 자신보다 소위 유전 분야에서 앞섰다는 것을 인정하고 「잡종 품종의 자손의 행동에 대한 멘델의 법칙」이라고 멘델을 앞세운 논문을 발표했다. 체르마크도 멘델의 연구를 알고 다음 달 논문을 발표했다. 34년 동안 어느 누구도 깨닫지 못한 멘델 연구의 중요성이 불과 몇 달 사이에 3편의 논문에 의해 세계에 알려진 것이다. 드 브리스는 멘델의 연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멘델의 연구는 거의 인용된 적이 없기 때문에 내가 직접 실험을 수행하여 위에서 언급한 명제들을 독자적으로 이끌어낼 때까지 그의 연구 결과에 친숙해지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 3명의 학자들은 ‘우성의 법칙'과 ’분리의 법칙‘은 연구했지만, 멘델의 ’독립의 법칙‘을 이끌어내는 실험을 한 것은 아니다. 멘델의 개념이 과학계에 소개되자 플레밍의 유사 분열과 바이스만의 감수분열의 의미가 명확해졌다.
1902년 미국의 유전학자 월터 서턴(Walter S. Sutton, 1877〜1916)은 바이스만의 예견대로 염색체가 유전 단위를 전달하며 쌍으로 나타난다는 최초의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했다. 감수분열은 난세포와 정세포의 염색체(유전자)의 내용물이 자손의 유전적 조성하고만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유사분열과 다르다. 즉 유사분열은 다양한 종류의 세포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일상 생활과 관련이 있지만 감수분열은 유전학이나 진화의 기본 과정과 관련이 있다. 감수분열에 대한 서턴의 실험은 염색체상에 존재하는 이러한 입자들(유전자)이 유전 인자라는 것을 확인했다.
감수분열을 이해하면 유전의 본질은 유전자의 복제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난세포가 수정되는 순간부터 유사분열 과정이 시작되어 하나의 난세포가 결국 수조 개의 세포로 분열되어 나간다. 유전자의 지시에 따라 세포들은 각각 특별한 기능을 갖는 수백 종류의 세포로 분화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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