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대중화>
패러데이가 남다른 성공을 거둔 것은 그의 탁월한 홍보 즉 대중화 능력에도 기인한다. 그는 자신의 발견을 일반 대중들에게 알려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므로 그는 당대에 높은 명성을 갖고 있는 화술교사 벤자민 스마트를 고용하여 1826년부터 ‘금요일 저녁 강연’이라고 명명한 유명한 대중강연시리즈를 시작했다. 패러데이의 강연은 놀랄 정도의 효과적인 시연과 실험이 함께 펼쳐졌다. 한 번은 자신을 강철로 만든 새장에 가두고 밖에서 전기 스파크를 만들어냈다. 패러데이는 새장이 자신을 보호해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일반 대중들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는 엄청난 인기를 누렸으며 특히 상류층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아 많은 돈을 벌었다.
그의 시연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것은 크리스마스강연시리즈에서 펼친 ‘초의 화학적 역사’였다. 이 강연에서 그는 초를 사용하여 화학 원소에서 인간의 호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과학적 개념을 소개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연 철학의 세계로 들어가는데 초의 물리적 현상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보다 더 훌륭하고 더 활짝 열려 있는 문은 없습니다.’
그는 어린아이들에게 ‘집에서 실험해보라’고 강조했다. 그의 강연 이후 화학용품 세트는 ‘화학놀이상자’로 알려지며 큰 인기를 끌었다. 런던의 거의 모든 상점들이 화학놀이상자를 구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패러데이 실험실은 왕립연구소의 지하실에 있었고 1층과 2층에서 대중에게 강연했고 그 위층에서 부인과 함께 살았다. 개인이 콧대 높은 왕립연구소 건물에 거주할 수 있다는 것은 당대에 그의 존재감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물론 그에게도 약간의 좌절은 있었다. 1840년대 내내 패러데이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는데 이는 소수집단인 샌더먼 교파의 열성적인 신자였기 때문이다. 이 교파는 종교 규율을 엄격히 준수했는데 여왕이 일요일에 초청하자 패러데이가 이에 응했다고 장로 자격을 정지할 정도였다. 또한 패러데이는 그에게 내려지는 작위를 포함해 자신에게 내려진 모든 서훈을 받지 않았는데 이는 샌더먼 교파의 무언의 압력 때문이다.
패러데이의 인간성에 대한 일화가 있다. 1856년 크리미아 전쟁의 절정기에 영국 정부는 패러데이에게 전쟁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독가스’의 대량 생산의 가능성과 그것이 가능할 경우 계획의 지휘자로 연구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 즉시 그 계획은 분명히 가능하지만 자신은 관여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정부의 독가스 제조를 거절했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그의 과학에 헌신한 공헌을 인정하여 1858년 햄프턴코트 궁전에 있는 그레이스앤페이버 저택을 하사했다. 패러데이는 이곳에 이사온 9년 후인 1867년 8월 26일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런던에 있는 하이게이트 묘지에 묻혔는데 화학자 틴달이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의 위대함의 일부는 그의 과학 속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과학 속에 나타나 있지 않은 것 바로 그것은 그의 숭고한 정신과 순진한 마음이었다.’
패러데이를 유명하게 만든 일화는 자신이 발견한 전자기 유도현상을 당시 재무장관으로 후에 총리가 되어 영국의 의회민주주의를 확립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윌리엄 글래드스톤(William Gladstone, 1809~1898) 앞에서 시연을 보일 때였다. 패러데이의 설명을 들은 글래드스톤은 지겹다는 듯이 “대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요”라고 질문했다. 패러데이는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나중에 이것으로 세금을 매길 날이 올 겁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전기로 엄청난 세금을 걷고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패러데이는 ‘과학자’라는 말을 처음으로 탄생케 한 장본인으로도 유명하다. 1840년에 영국의 자연철학자 윌리엄 훼엘(W. Whewell)은 자연과학 분야의 지식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로 과학자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가 과학자라는 말을 만든 것은 자신의 절친한 친구였던 패러데이의 탁월한 능력에 감명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패러데이를 위해 ‘이온’, ‘양극’, ‘음극’이란 말을 만들어 주었다.
<전자기연구의 전진>
19세기 중순부터 말까지 세계 각지에서 그야말로 하루가 달리 새로운 발견들이 이어졌다. 일반적으로 원자물리학은 독일의 물리학자 게리케(Otto von Guericke, 1602〜1686)의 진공펌프 발명으로부터 출발했다고도 알려진다. 그는 1650년 ‘이론에 치우쳐 있는 자연과학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당시의 진공에 대한 철학적 논쟁을 비판하고 그 실험적인 해명을 시도하였다. 진공을 만드는 일은 곧 배기(排氣)라는 것에 착안하여, 펌프에 의한 배기실험을 하여 공기펌프를 개발했고 곧이어 진공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와 관련하여 배기 전후의 구(球)의 무게가 달라지는 점에서 공기의 무게를 산출하였고, 공기 중에서는 물체에 부력(浮力)이 작용한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그의 진공은 수많은 학자들로 하여금 수많은 흥미 있는 연구와 실험에 도전토록 했는데 전천후 과학자인 패러데이도 이 분야에 주목했다. 그는 유리관에서 공기를 뽑아내고 그 양쪽에 금속 필라멘트로 된 전극을 각각 연결한 후 고압 전류를 흘려주자 음극과 양극 양쪽에서 이상스런 빛이 희미하게 나타나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이 전자기에 대한 연구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된다.
1858년 독일의 율리우스 플뤼커(Julius Pücker, 1801~1868)는 자력이 기체 방전에 미치는 영향을 실험하던 중 자석 근처에서 기체 방전이 어느 정도 휘는 것을 관찰했다. 다음해에는 방전광의 음극 근처에서 밝은 녹색의 발광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관찰했지만 당시의 진공관은 진공도가 그다지 높지 않아 더 이상 정밀한 실험을 하지 못했다.
한편 1855년에 독일의 하인리히 가이슬러(Heinrich Geiβler, 1814~1879)가 기체방전관내의 진공도를 대기압의 만분의 1정도로 낮추는 진공펌프를 개발했다. 또한 1864년에 독일 태생의 룀코르프(Heinrich Daniel Rühmkorff, 1803~1877)가 불꽃유도 코일을 개발하여 1피트 이상의 거리에서 불꽃을 일으킬 수 있는 고전압을 발생시켰다.
1869년 빌헬름 히토르프(Johann Wilhelm Hittorf, 1824~1914)는 가이슬러의 수은 진공펌프와 륌코르프의 고전압 발생장치를 이용해서 고진공 방전관 속에서 ‘글로우 광선(Strahelm Glimmens)'을 발견했다. 그는 이 광선이 고체 뒤편에 그림자가 생기게 하는 등 음극에서 직선으로 전파된다는 것과 자장에 의해서 휘어지고 유리에 닿으면 발광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1875년 영국의 물리학자 윌리엄 크룩스(William Crooks, 1832〜1919)는 자신이 만든 진공관(크룩스관)에 전류를 통하면 관의 벽이 엷은 녹색 형광을 뿜는 것을 보고 그것이 진공관의 음극으로부터 나오는 음극선(여기에서 ‘선’은 일종의 전자기파를 의미함) 탓이라고 생각했다.
1886년 독일의 오이겐 골트슈타인(Eugen Goldstein, 1850〜1930)은 이 광선을 실험할 때 양극에서도 방사선이 나온다는 것을 발견하고 ‘커낼선’이라 명명했다. 커낼선은 운하와 비슷한 ‘구멍’이라는 의미다. 이 실험을 할 때 그는 구멍을 뚫은 음극을 사용하여 실험했기 때문으로 이후 음극선(Kathodenstrahlen)이라 부른다.
음극선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밝힌 과학자는 영국의 물리학자 J. J. 톰슨(Sir Joseph John Thomson, 1856〜1940)이다. 그는 1897년 음극선이 음전기를 가진 입자의 흐름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그것을 전자(electro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음극선관의 음극에서 전자가 나오는 이유는 진공 속에 남아 있던 약간의 기체 분자가 강한 전기장에 의해 이온화된 결과다. 이온화 된 입자 중에 ‘+’이온 입자는 ‘-’극으로 끌려가 음극과 충돌하게 되고 이때 음극의 금속에서 전자가 나와 ‘+’극으로 간 것이다. 이때 튀어나온 전자는 공기 분자의 방해를 거의 받지 않으므로 매우 빠른 속도(광속의 1/5)로 흐른다.
<우연이 만든 세계적 발견>
음극선은 현대 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X선의 발견으로 이어지며 이는 궁극적으로 방사능 시대를 여는 단초가 된다. X선이 뢴트겐(Wilhelm Röntgen, 1845~1923)에 의해 우연히 발견됐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뢴트겐은 1845년 독일 라인 강변의 렌넵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의 영향으로 독일에서도 혁명이 일어나자 불안을 느낀 뢴트겐의 아버지는 프로이센의 지배하에 있던 라인란트 지방을 떠나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그는 네덜란드 국적을 얻어 네덜란드인이 되었지만 얼마 후 그들 가족이 다시 위트레흐트로 돌아갔기 때문에 빌헬름 뢴트겐은 위트레흐트 공업학교에 다녔다.
그런데 1862년 학교로부터 엉뚱한 사건에 연류되어 퇴학처분을 받았다. 기계 만지는 것을 유별나게 좋아하였고 학교수업에도 충실했지만 어떤 선생님을 풍자한 만화가 문제였다. 원래 만화는 그의 반 친구가 그린 것인데 교장이 그를 불러 누가 그렸는지 고자질하라고 종용했다. 그가 끝까지 이 요구를 거절하자 결국 자신이 그린 것으로 오해받아 퇴학당한 것이다. 이 같이 올곧은 성격은 평생 동안 그를 따라 다녔는데 당시 학생기록부에 의하면 대체적으로 성적이 좋았지만 물리학 성적이 특히 나빴다. 그의 행실에 대한 평가는 ‘개선 요망’이었다.
학교에서 퇴학당하여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으므로 일반적으로 종합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불가능하였지만 위트레흐트대학은 다소 달랐다. 한마디로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어도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으므로 이수하지 않은 학과목은 개인교습을 통해 보충하면서 위트레흐트대학의 입학에 도전했다. 그러나 정규 과정으로의 입학시험에 불합격하였으므로 청강생 자격으로 물리학, 화학, 동물학, 식물학 등을 공부했다.
그런데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도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어도 시험 성적만으로 입학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응시했는데 이번에는 합격했다. 1865년, 취리히공업대학의 기계공학과 학생이 된 것인데 그가 예상 외로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위트레흐트 공업학교에서 물리학 성적은 나빴지만 수학 성적은 월등히 좋았기 때문이다.
1868년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고 1969년, 대학을 졸업한 지 단 1년 만에 열역학 분야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단 1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것은 그의 자질이 남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뢴트겐은 실험물리학자인 아우구스트 쿤트(August Adolph Eduard Eberhard Kundt, 1839~1894) 교수의 조교가 되어 평생 그를 존경하면서 지도받았다. 쿤트가 뷔르츠부르크 대학의 교수로 가게 되자 그도 동행하여 교수 자격시험 논문을 작성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다는 것이 그의 발목을 잡아 탈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뢴트겐은 쿤트 교수를 떠나지 않고 계속 보필했는데 쿤트가 슈트라스부르크로 옮기자 비로소 교수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사실 독일에서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교수자격증을 얻었다는 것은 뢴트겐의 능력이 남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하튼 그는 30세의 나이에 호엔하임 농업아카데미에서 수학ㆍ물리학 분야의 교수가 되었다. 이후 잠시 슈트라스부르크로 돌아갔다가 기센대학에 초빙 교수로 들어갔다. 이어 실험물리학에서의 그의 업적을 인정받아 당대에 가장 유명한 대학 중에 하나인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실험물리학과장 교수가 되었다.
<불가사의한 X선>
1892년 하인리히 헤르츠(Jeinrich Hertz, 1857~1894)는 음극선이 얇은 금박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의 제자인 레나르트(Philipp Eduard Anton von Lenard, 1862~1947)에게 이 실험을 계속해 볼 것을 권유했다. 레나르트는 음극선이 눈에 직접 보이지는 않지만 형광물질이 칠해져 있는 스크린에 비추면 스크린 상에 형광이 발생하므로 검출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편 뢴트겐도 형광 현상을 재현하는 실험을 하면서 1894년 5월 4일, 후일 세계적인 발견의 단초를 제공할 두 통의 편지를 썼다. 첫째는 레나르트에게 대기 중에서의 음극선에 관한 그의 실험들을 보기 원한다는 내용이고 둘째는 뮐러 웅켈에게 레나르트에게로 가는 음극선 관을 주문하고 며칠 후 그 가격으로 36마르크 50페니히를 지불한다. 이 때 레나르트는 뢴트겐에게 ‘레나르트 창(음극선관의 한쪽 끝에 얇은 알루미늄판을 댄 것)’에 사용되는 금속박편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막상 실험 준비가 되었지만 연구를 위해 시간을 낼 수 없었다. 1894년과 1895년에 대학 총장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895년 10월 말부터 실험을 계속할 수 있었다. 총장직에서 벗어나 연구원으로 돌아가자 그는 실험에 필요한 기계들을 모두 자신이 직접 설치한 후 형광 현상을 재현하려고 했다.
1895년 11월 8일 뢴트겐은 산란된 형광이 유리관의 벽면에서 유출되는 것을 철저히 막기 위해 검고 두꺼운 종이로 크룩스관을 덮었다. 뢴트겐은 실험실의 불을 끄고 크룩스관의 전원을 켰다. 동시에 가까이에 두었던 백금시안화바륨을 바른 스크린이 도깨비불처럼 희미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크룩스관과 스크린 사이에 두툼한 책을 두거나 스크린을 더 멀리 놓아도 여전히 방전 때마다 형광이 관찰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뢴트겐이 관찰하려고 했던 음극선은 아니었다. 음극선의 위력은 책을 관통할 만큼 강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전에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무언가가 크룩스관에서 나와서 1미터 이상의 공기를 통과하여 형광 스크린이 빛나게 한 것이다. 이 놀라운 현상을 목격한 뢴트겐은 추후에 다음과 같이 신문기자에게 설명했다.
“그날 나는 검은 종이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는 히토르프-크룩스관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백금시안화바륨 종이 한 묶음이 놓여 있었다. 관에 전류를 흘려보내고 나자, 종이 위에는 이상한 검은 선이 비스듬하게 생겼다. 당시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빛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러나 전기 아크등에서 나오는 빛조차 이렇게 뒤덮인 종이를 통과할 수 없기 때문에 관에서 빛이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뢴트겐은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방사선을 X선이라고 불렀다. 그는 실험을 계속하여 X선이 1,000페이지에 달하는 책도 통과하는 것은 물론 나무, 고무 그 외의 많은 물질들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반면에 이 X선을 차단하려면 적어도 1.5mm의 두께의 납으로 X선의 진로를 막아야 함도 발견했다.
여기서 뢴트겐은 과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보통 광선이 사진 건판에 감광되어 사진이 찍히는 것을 볼 때 X선도 건판에 감광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X선이 통과하는 길에 사진 건판을 놓고 자신의 아내를 설득하여 손을 그 사이에 놓도록 하였다. 건판을 현상한 그는 예상대로 손가락뼈가 똑똑히 나타난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뼈 둘레의 근육의 모습은 희미하게 나타났다. 산 사람의 뼈가 사진으로 찍힌 것은 역사상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의 아내는 자신의 손가락뼈를 사진으로 보는 순간 매우 놀라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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