뢴트겐은 X선을 발견한 후 뷔르츠부르크 물리의학협회에 자신의 발견에 대해 「신종 방사선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10페이지짜리 논문을 제출했다. 그의 논문을 접수한 협회는 논문의 중요성을 알아차리고 곧바로 협회기관지에 게재하도록 서둘렀다. 더욱이 이 기간 동안에는 크리스마스와 신년휴가 등이 끼어 있었다. 이 사이에 논문이 심사되고 발간이 결정된 후 10페이지에 달하는 논문의 인쇄가 준비되고 교정을 거쳐 실제 인쇄에 들어가고, 저자에게 우송함과 동시에 신문에 발표되기까지 한 것이다. X선의 발견이 준 충격은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X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전 세계로 확산되기까지는 불과 15~20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특히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의 언론들이 이 놀라운 발견을 대서특필해서 뢴트겐은 일약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는 수많은 강연과 초대의 대부분을 거절 했으나 1896년 1월 9일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로부터 그의 발견을 치하하는 축전을 받고 1월 13일 황제 앞에서 시연을 요청받았다. 이것만은 거절할 수 없었는데 그가 정작 황제 앞에서 시연한다는데 고민한 것은 당시의 시연장치 때문이다. 그가 적은 고민을 보자.
‘황제께서 행운이 있으시면 좋겠다. 왜냐하면 이 관은 쉽게 깨질 수 있는 데다가 만약 새것을 만들어 이를 진공으로 만들려면 최소한 4일은 걸리기 때문이다.’
당시에 진공을 만드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황제 앞에서의 시연은 무사히 끝났고 뢴트겐은 훈장을 받았다. 그러므로 뢴트겐이 1896년 1월 23일 물리의학회에서 자신의 논문을 발표했을 때는 이미 전 세계의 학자들이 그의 발견 내용을 알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음은 그가 제출한 논문의 발췌문이다.
‘이 현상의 가장 인상적인 특징은 대단히 밝은 형광을 가능케 하는 영향이 태양이나 아크등의 자외선을 투과시키지 않는 검은 마분지 덮개를 통과할 수 있다는 점이고 나는 즉시 다른 물체도 이런 특징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얼마 후 모든 물체가 이 영향에 의해 투명해지지만 그 정도는 다르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는 몇 가지 예로 충분하다. 종이는 매우 투명했고 1000페이지 책 뒤에 걸린 형광판은 여전히 환했다. 인쇄 잉크는 큰 장애가 아니었다.’
‘형광은 카드 두 벌 뒤에서도 눈에 띄였다. 장치와 판 사이의 카드 두 장에는 현저한 차이가 없었다. 한 장의 알루미늄박은 거의 두드러지지 않는다. 몇 층이 위에 놓인 후에야 판에 영상이 뚜렷하게 보인다.’
‘단면 20x20밀리미터에 하얗게 칠하고 한 쪽에 납 도료를 바른 나무 막대는 독특하게 반응한다. 이 막대를 장치와 판 사이에 두면 엑스레이가 칠한 쪽과 나란히 통화할 때 거의 아무런 효과가 없지만 X-ray가 도료를 가로질러 가면 검은 영상이 생긴다. 금속과 흡사하게 고체든 용액이든 그 자체가 소금이다.’
마지막 문장에서 뢴트겐이 소금이라고 말한 것은 마리 퀴리에 의해 그 진상이 밝혀진다. 바로 소금이 방사능이었다. 뢴트겐이 논문을 발표한 학회장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특히 발표장에서 당시 80세인 스위스의 해부학자이자 동물학자로 추밀고문관인 쾰리커(R. Kölliker)가 실험대상이 되겠다고 자청했다. 쾰리커는 현미경을 이용하여 난자나 정자가 세포임을 확인하였고, 신경섬유가 가늘고 길게 뻗은 세포임을 밝힌 사람이다. 쾰리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48년 동안 참석해왔던 회의들 중에서 이번이 가장 중요한 회의로 생각합니다. 저는 이 발견이 실험을 기초로 하는 자연과학에서, 어쩌면 전 의학 분야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뢴트겐은 그의 손을 X선으로 찍어서 사람의 손뼈가 똑똑하게 나타난 것을 보여주어 청중들을 경탄케 했으며 쾰리커는 자신의 손을 찍은 ‘X선'을 뢴트겐선으로 부를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큰 박수 갈채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한 언론은 이렇게 논평했다.
‘X선의 발견은 과학의 여러 경이로운 업적에 또 하나를 추가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사진이 찍히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불투명한 물체를 통과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이후 단 1년 동안에 X선에 관한 논문이 1,000종, 단행본은 50권 가량이 출판되었고, 1897년에는 〈뢴트겐협회〉가 결성되었다. 그 해 11월 5일 〈뢴트겐협회〉에서 톰프슨(Elihu Thompson)이 발표한 내용은 이 당시의 상황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발견의 역사상 이것만큼 즉각적이고 널리 과학적 응용된 전례는 없다.”
<X선에 대한 오해>
뢴트겐이 사람을 해부하지 않은 채 살아있는 사람의 뼈를 보았다는 소문은 대중과 공공매체에서 많은 두려움과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그라츠의 체르마크 교수는 자기 머리의 X선 사진을 보고는 너무 놀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적었다. 그가 본 것은 자신이 시체가 되었을 때의 머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장기를 볼 수 있다는 점은 사생활의 침해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뉴저지 주의 한 정치가는 오페라 극장의 쌍안경에 X선 사용을 금하는 법안을 제출할 정도로 X선이 개인의 사생활에 종식을 가져올지 모른다는 우려가 널리 퍼졌다. 런던의 란제리 제조업체는 ‘X선이 통과하지 않음을 보증하는 속옷’을 광고했다.
이러한 두려움은 근거 없는 것이었고 곧 X선의 유용성이 나타났다. 뉴햄프셔 주의 한 병원에서 X선으로 골절을 진단하는 데 사용했고 베를린의 어느 의사는 손가락에 꽂힌 유리 파편을 X선으로 찾아냈다. 리버풀의 의사는 X선으로 소년의 머리에 박힌 탄환을 확인했고 맨체스터의 교수는 총 맞은 여자의 두부를 촬영했다.
이후 X선이 응용된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X선이 갖고 있는 과학과 의학에서의 잠재력을 파악한 노벨상 위원회에서 1901년 제1회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뢴트겐을 선정한 것은 최초의 수상자라는 명예에 걸맞은 것이었다. 뢴트겐의 X선의 발견이 얼마나 획기적인가는 다음의 설명으로도 알 수 있다.
‘의학에도 몇 번의 전환점이 있었다. 하나는 마취의 발견이고 그 다음에 항생제의 발견이지만 제일 큰 파장을 몰고 온 것은 X선의 발견이다. 의학에서는 환자라든가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몸속을 보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그 전까지는 마취를 하고 배를 열어보는 방법뿐이었다. 그러면 환자에게 고통이 당연히 따른다. 그런데 X-ray는 몸에 전혀 고통과 해를 주지 않고 몸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최초의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획기적인 X선의 발견도 뢴트겐이 아닌 다른 과학자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미국의 굿스피드는 뢴트겐보다 5년 전에 우연히 기체방전을 통해 사진건판을 검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 현상을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고 사진 건판을 치워버렸다.
특히 크룩스나 레나르트는 X선 발견 직전의 상황까지 도달해 있었다. 사실 크룩스는 음극선 주변에서 사진 건판이 흐려지는 것을 자주 불평했고 레나르트는 음극선관 부근에서 발광 현상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음극선의 성질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X선을 발견할 기회를 놓친 것이다. 특히 그들은 실험 장치에서 이상한 광선이 발생하자 그 이유를 생각하는 것보다는 실험 장치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실험 장치 제작자에게 항의하곤 했다. 뢴트겐의 가장 큰 공적은 우연에 의해 얻어진 것을 철저하게 추적해 결국은 그것을 해명했다는 점에 있다.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 돌아간다는 예로 자주 인용되는 예이다.
추후에 레나르트는 자신이 X선을 발견하지 못한 것을 매우 애석하게 생각했으며 뢴트겐이 논문에 자신의 도움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물론 레나르트가 음극선을 관외(管外)로 끌어내는 ‘레나르트의 창’의 제작에 성공하여, 음극선 연구에 신기원을 열었고 이 업적으로 1905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으므로 크게 낙담하지는 않았다.
X선 발견으로 뢴트겐은 수많은 명예를 획득했다. 1896년 그의 입학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뷔르츠부르크 대학 의예과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 그해에 레넵 시는 그에게 명예 시민권을 주었다. 그러나 바이에른 섭정(攝政)이 그에게 훈장을 수여하면서 귀족을 뜻하는 ‘폰(von)’이라는 칭호를 수여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정중하게 제의를 거절했다.
최고의 영예는 1901년 최초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것으로 1901년 11월 10일 스웨덴 황태자로부터 직접 상을 받았다. 상금이 50,000크론에 달했지만 그는 이 상금을 뷔르츠부르크 대학의 학문적 연구에 사용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추후에 노벨상위원회는 그의 수상이야말로 노벨상 역사상 가장 걸맞는 수상이라고 말했다.
그가 발견한 X선이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키자 독일의 재벌 중에 한 사람이 그를 방문하여 X선의 특허를 자신들에게 양도해 달라고 했다. 그는 뢴트겐이 틀림없이 X선 발생 장치를 이미 특허로 출원했을 것으로 짐작한 것이다.
그러나 뢴트겐은 X선은 자신이 발명한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것을 발견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X선은 온 인류의 것이 되어야 한다며 특허 신청을 단연코 거절하였다. 그러나 뢴트겐과 같은 저명인사의 대답은 이미 예견될 일이다. 당시에 저명한 독일 대학교의 교수라는 직함과 명예를 감안한다면 세속인들처럼 특허로 재산을 모으려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었다. 뢴트겐은 누구나 유익하게 X선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어느 특정인이 아닌 모든 인류가 공유해야 한다는 신념과 당대의 교수 전통에 따라 특허를 거절한 것이다. 물론 당대에도 그처럼 행동하지 않은 교수들도 있으므로 뢴트겐이 특이한 사람임은 틀림없다. 한마디로 뢴트겐은 과학의 발명이나 발견은 과학자 당사자만의 것이 아니고 온 인류가 공유하여야 한다는 사상을 실천한 것이다. 미국의 발명왕 에디슨이 이런 뢴트겐의 태도에 감동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학에 있어서도, 의학에 있어서도, 또 산업계에 있어서도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이 발견으로부터 금전적인 이익을 바라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1923년 2월 10일 장암에 걸려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지칠 줄 모르고 연구에 몰두했다. 당시 내무부 장관은 뢴트겐 가족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전 독일 민족의 그들의 위대한 아들의 관 앞에서 심심한 애도를 표하고 있습니다.’
한편 X선의 물리적 성질과 효과가 밝혀지면서 X선을 가르키는 ‘미지(未知)의 선’이라는 의미가 약화되자 X선 대신에 처음 쾨리케가 주창한 것처럼 뢴트겐선이란 용어를 쓰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그러므로 독일어권에서는 지금도 뢴트겐선이라고 부르지만 영어권에서는 당초 뢴트겐이 명명한 것과 같이 X선으로 부른다. 그런데 영어권에서 X선으로 고집한 이유를 영국의 한 과학 잡지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발견자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뢴트겐이라는 발음이 영국인에게는 어감이 좋지 않다.’
참고적으로 우주에 있는 많은 별들이 X선을 방출한다는 것이 알려지자 대다수의 위성들은 X선을 탐지할 수 있는 기자재들을 탑재한다. 이 위성들이 우주에서 별들의 탄생과 일생을 연구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음은 물론이다. 뢴트겐의 발견이 전 우주에 통한다는 것이야말로 그의 발견이 얼마나 인간에게 큰 혜택을 주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한 1895년을 근대과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분수령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X선의 진가는 고전물리학 시대에서 벗어나 원자물리학의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는 중요한 발걸음을 내딛게 했다는 점이다.
X선의 효용도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것을 확인한 학자들은 이 불가사의한 X선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수많은 학자들이 X선을 무기로 하여 노벨상을 받은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화학 노벨상이 만든 세상 > X선 : 뢴트겐' 카테고리의 다른 글
X선이 만드는 세상(4) : 뢴트겐 (0) | 2020.10.13 |
---|---|
X선이 만드는 세상(2) : 뢴트겐 (0) | 2020.10.13 |
X선이 만드는 세상(1) : 뢴트겐 (0) | 2020.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