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보다 더 밝다>
‘맨해튼 계획’ 팀은 1945년 7월, 핵폭탄을 만들기에 충분한 우라늄235와 플루토늄239를 정제하여 세 개의 원자폭탄이 완성되었다. 그들은 로스앨러모스(우라늄 농축 및 관련 연구는 테네시 주 오크리지 국립연구소에서 담당)로부터 300킬로미터 떨어진 뉴멕시코 주 앨러모고도 트리니티사이트에서 원폭 1개를 실험키로 했다. 폭탄은 강철 탑 꼭대기에 설치되었고 그 주위에는 과학적 감시 장비들이 설치되었다. 원래 7월 15일 폭발 시험을 하기로 했는데 기후가 나빴다. 이례적으로 소낙비가 퍼붓고 강풍이 몰아쳐 연기되었다.
다행하게도 다음날인 7월 16일 일기가 호전되자 오펜하이머와 그의 팀은 그곳으로부터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통제실에 있었고 그 밖의 과학자들과 관찰자들은 16킬로미터 떨어진 벙커나 방공호로 피신했다.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고 마침내 ‘나우(Now)'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29분 45초의 일이었다. 이때의 폭발 장면을 목격한 과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류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광경이었다."
페르미는 지하실에서 나와 방사성 낙진의 위험을 무릅쓰고 호주머니에서 작은 종이 조각들을 꺼내 하늘로 뿌린 후 종이조각들이 떨어진 곳까지 걸어가면서 거리를 측정했다. 그는 폭발 강도를 어림잡아 TNT 2만 톤 정도라고 말했다. 추후에 정밀하게 폭발 강도를 측정했는데 페르미의 말과 별로 자이가 없었다. 원자폭탄의 위력이 알려지자 페르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 개의 태양보다 더 밝다.”
이 실험을 현장에서 목격한 1965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Phillips Feynman, 1918〜1988)은 이 당시 장면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전했다.
‘나는 폭발 현장에서 20마일 떨어진 곳에서 실험을 관찰할 때 착용할 검은 안경을 지급받고 대기하고 있었다. 20마일 떨어진 곳에서 검은 안경을 쓴다면 실험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 거리에서 나의 눈에 해로운 것은 자외선밖에 없었다. 나는 트럭의 앞 유리 뒤로 갔는데 자외선은 유리를 통과하지 못하므로 그곳은 안전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끔찍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드디어 시간이 되었고 엄청난 섬광에 너무 눈이 부신 나는 얼른 머리를 숙였다. 트럭의 바닥 위에서 이 진홍색의 오점을 보았지만 나는 ‘이게 아니야. 이것은 잔상일 뿐이야’라고 중얼거렸다. 다시 고개를 든 나는 백색광이 노란색으로 변하고 다시 오렌지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충격파의 압축과 팽창에 의해 구름이 형성되고 다시 사라졌다.
마침내 중심이 매우 밝은 커다란 오렌지색 공이 위로 떠오르며 조금씩 소용돌이치기 시작했고 바깥쪽은 약간 검게 변했다. 그리고 내부의 열이 밖으로 나오면서 섬광과 함께 연기로 변하는 커다란 공을 볼 수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은 약 1분 가량 걸렸다. 그것은 밝음에서 어두움으로의 연속적인 변화였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봤다. 아마도 내가 이 위대한 실험을 실제로 본 유일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검은 안경을 착용했고 6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바닥에 엎드려야 했기 때문에 이 광경을 제대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침내 1분 30초 정도 후에 갑자기 ‘꽝’하는 엄청난 굉음이 들렸다. 그리고 천둥과 같이 우르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는 나를 안심시켰다. 20마일이나 떨어진 거리에서 이 정도의 소리가 난다는 것은 정말로 폭탄이 터졌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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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뉴멕시코 주 경찰에 한 화물트럭 운전기사가 이상한 제보를 했다. 새벽 5시에 지평선 위로 해가 솟았는데 조금 후에 다른 해가 또 다시 솟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해가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인 오펜하이머는 그 순간 힌두교의 경전인 『바가바드기타』의 두 구절이 문득 머리를 스쳐갔다고 다음과 같은 구절을 말했다.
‘나는 이제 세계의 파멸자가 되었다. 죽음의 운명이 무르익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원자폭탄의 위력은 엄청나 원폭 개발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만든 원폭이 정말로 투하된다면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것을 감지하고 원폭 투하 반대 운동을 펼쳤다. 그 선봉장이 원폭 개발을 제일 먼저 주창한 실르르드다. 그는 자신이 원폭 개발을 주도했다는 책임감 때문에 독일에서 망명한 물리학자 제임스 프랑크와 함께 1945년 6월 11일 「프랑크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핵무기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인류의 미래를 위해 핵무기 사용이 통제되어야 한다고 적었다. 그러므로 실라드르는 핵폭탄을 인명 살상용으로 사용하지 말고 무인도 실험을 통한 자료를 일본에 보여주어 일본의 항복을 유도하자고 제안했다. 또한 원폭을 다른 나라에서도 개발할 수 있으므로 국제적인 통제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보고서를 읽은 과학자들은 그의 제안을 받아드리지 않았다. 원폭이 치열하게 격화되고 있는 일본과의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으며 이는 결국 미국인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원자폭탄의 실험이 성공하자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15분30초, 서태평양 티니안섬 기지를 출발한 B29 ‘에놀라 게이(Enola Gay)’가 히로시마 상공 9,600미터 지점에서 원자폭탄 1호를 투하, 인구 30만 명의 이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에놀라 게이’는 B29 조종사 티베츠 대령의 어머니 이름에서 딴 이름이고, 원폭1호는 지름 71센티미터, 길이 3.05미터, 무게 4톤으로 ‘리틀 보이(little boy)’로 불렸다.
히로시마 시민들은 도시가 주요 군사기지인데다 보급기지이기도 했기 때문에 공습이 있을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 특히 연합군이 소이탄으로 공격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시골로 피난 갔기 때문에 원래 약 40만이었던 도시는 29만여 명으로 줄었고 여기에다 일본 군인들 약 4만 명을 합하여 모두 33만 명이 있었다.
이 당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방송을 통해 일본인들에게 만약 일본이 연합국의 평화조약을 수락하지 않으면 지구상에서 아직까지 보지 못했던 대 재앙이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영국의 처칠도 같은 내용의 방송을 했다. 그러나 일본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오전 7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 히로시마 상공에 미국의 기상 관측기가 나타났기 때문에 경계경보가 울렸다. 경계경보는 흔히 있는 일이므로 대부분의 시민들은 방공호로 대피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8시15분에서 몇 초 정도 지났을 때 두 대의 비행기가 다가와 그 중 한 대가 폭파 기록 장치를 실은 세 개의 낙하산을 떨어뜨렸으며 ‘에놀라 게이’는 550미터 상공에서 폭발하도록 조절되어 있는 원자폭탄을 터트렸다.
폭탄은 강한 섬광을 발하며 폭발했고 이어서 고열의 불덩이가 퍼져 나갔다.
학자들은 핵폭탄의 중심 온도는 100만도, 땅 지면의 온도는 3,000도까지 끓어올랐다. 폭발로 방출된 에너지의 35퍼센트는 뜨거운 열, 50퍼센트는 폭풍, 15퍼센트는 방사능 열로 터져나왔다. 히로시마 중심부에 있던 수천 명은 곧바로 재가 되고 말았으며 4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던 사람들도 화상을 입었다. 이어서 시속 900킬로미터의 충격을 동반한 폭풍이 불면서 반경 3킬로미터가 넘는 지역 안의 거의 모든 것을 파괴하였다. 도시의 60퍼센트가 파괴됐고 폭심지(爆心地)로부터 반경 500미터 이내의 모든 생명체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폭탄이 투하된 다음날 세이조 아리수에 장군이 히로시마에 도착하여 폭탄의 피해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비행기가 히로시마 상공에 접어들었을 때 눈에 띄는 것은 검게 타죽은 나무 한 그루뿐이었다. 마치 이 도시에 까마귀가 한 마리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 나무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공항에 내려 보니 잔디가 마치 구워 놓은 것처럼 붉었다. 도시 자체가 완전히 지워 없어진 상태였다.”
히로시마에 살던 한 목격자의 증언이다.
‘거기엔 마치 죽은 개와 고양이처럼 시체들이 둥둥 떠 가고 있었다. 옷 조각들이 넝마처럼 그들 몸에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나는 둑 근처 모래톱에서 얼굴을 위로 하고 떠내려가는 한 여인을 보았다. 잘려나간 그녀의 가방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끔찍한 모습이 있을 수 있는가?’
원폭이 투하될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트루먼이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급사로 부통령이 된지 82일 만에 갑작스럽게 대통령직을 인수하였기 때문이다. 트루먼에게 원자폭탄 관계자들은 원폭이 터지기 전인 1945년 4월 25일,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우리는 도시 하나를 단번에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역사상 가장 무서운 무기를 4개월 이내에 가지게 될 것입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첫 번째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투하되자마자 놀라운 성명을 발표했다.
‘지금부터 16시간 전에 미국의 항공기 1대가 일본의 중요한 군사기지인 히로시마에 폭탄 1개를 투하했다. 이것은 TNT 화약 약 2만 톤 이상의 위력을 갖고 있다. (중략) 일본은 진주만 습격으로 전쟁을 시작했으며 이제 와서 그 수십 배의 보복을 받는 것이다. (중략) 그것은 원자폭탄이다. (중략) 우리는 일본 국내의 어떤 도시의 기능도 여지없이 신속하게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다.’
트루먼은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성공적으로 폭발했다는 것을 보고받자 히로시마 폭탄은 경고에 지나지 않는다며 8월 9일 나가사키에 플루토늄239로 만든 두 번째 원자폭탄 ‘뚱뚱한 사람(fat man)’을 떨어뜨리는 것에 동의했다. 두 개의 원자폭탄이 가진 위력은 TNT 3만 5천 톤과 맞먹는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희생자 수는 정확하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히로시마에서 폭탄이 터진 후 연말까지 14만 명이 사망하고 1950년 10월까지 추가로 6만 명이 사망했다. 나가사키에서는 연말까지 7만 명이 사망하고 방사능 피폭으로 후에 수만 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한다. 단 두 개의 폭탄으로 최소한 30여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이다. 한편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7만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는데 히로시마에서 3만 명, 나가사키에서 1만 명, 모두 4만 명이 희생되었다.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성공적으로 폭탄을 투하한 후 제3탄을 준비했다. 제3탄은 8월 15일 경에 완성될 예정이었다. 이때 일본이 무조건 항복할 의사가 있다는 내용이 스위스 정부를 통해 미국에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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