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 노벨상이 만든 세상/원자력

원자폭탄 탄생의 비사(2)

Que sais 2020. 10. 15.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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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22일 모든 준비가 끝나고 오전에 연구진과 참관단이 스쿼시 코트의 북쪽 끝에 있는 발코니에 모이자 페르미는 곧 보여줄 작업에 대해 설명했다.

 

지금은 중성자를 흡수하는 카드뮴 봉이 안에 들어 있어 원자로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봉은 하나만 있어도 연쇄반응을 막기에 충분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처음 할 일은 조지 와일(Jeorge Weil)이 맡고 있는 하나만 빼고는 모든 제어봉을 제거하는 겁니다. 다른 봉들과 같이 빼낸 이 봉은 자동으로 제어됩니다. 만일 반응의 강도가 정해진 한계가 넘으면 이 봉은 자동으로 원자로 속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이제 실험이 시작됩니다. 조지 와일은 제어봉을 조금씩 빼낼 것이며 우리는 측정을 통해 원자로가 계산대로 작동되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페르미는 계속 지시를 내렸고 그에 따라 와일이 제어봉을 조금씩 뽑아냈다. 작업은 천천히 이루어졌는데 점심때가 되자 아무도 배고프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매사를 규칙적으로 살아온 페르미인지라 유명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점심 먹고 합시다.”

 

참석자 모두들 긴장하고 있었는데 식사하자는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안도의 숨을 쉬게 했다. 그의 이 말이야말로 실험이 성공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식사를 하고 다시 실험이 시작되었는데 오후 320, 조지 와일이 마지막 제어봉을 빼냈다. 연쇄반응이 시작된 것이다. 마침내 인류 최초의 원자로가 임계에 도달했다. 인공방사능의 생성을 최소화하고 1/2와트의 출력 상태가 28분간 지속했다. 페르미의 부인인 로라 페르미는 연쇄반응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다음 에피소드를 적었다.

 

실라르드, 아인슈타인과 더불어 1939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우라늄 핵분열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헝가리 태생의 물리학자 유진 위그너(Eugene Wignet)는 페르미에게 이탈리아산 포도주 한 병을 선물했는데 위그너는 실험이 계속되는 내내 이 포도주를 등 뒤에 감추고 있었다고 한다. 참석자 모두 침묵 속에서 종이컵으로 축배도 없이 포도주를 함께 마셨다. 그리고는 포도주 병을 싸고 있던 짚으로 만든 덮개에 모두 서명했다. 그것이 그날 스쿼시 쿼트에 있던 사람들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다.’

 

이 소식은 곧바로 워싱턴에 전해졌다. 통신보안을 위해 다음과 같은 말이 오갔다.

 

그 이탈리아의 항해자가 신대륙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주민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매우 좋았습니다.”

 

페르미의 실험이 성공하였음을 알리는 암호였다. 곧이어 알곤원자력연구소에 출력 100kW의 제2원자로, 그리고 워싱턴 주의 핸포드에 폭탄 제조용 플루토늄을 본격적으로 생산하는 원자로가 건설되었다. 여기에서 생산된 플루토늄으로 만든 원자폭탄 제3호가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된 것이다.

참고적으로 플루토늄은 자연계에 극미량 존재하기 때문에 발견조차 어렵다. 그러나 1940년 캘리포니아 대학의 시보그(Glenn T. Seaborg, 19121999)와 맥밀런(Edwin McMillan, 19071991)이 우라늄238에 중수소를 충격시켜 합성시키는데 성공했고 이후 인공합성으로 대량 생산이 가능하여 결국 원자폭탄으로 제조된 것이다.

플루토늄239는 느린 속도로 중성자를 충격하면 강력한 방사선(감마선)과 중성자를 방출하면서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플루토늄239의 반감기는 24,110년이고 우라늄235로 변한다. 시보그와 맥밀런은 이에 대한 공로로 1951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페르미의 실험이 성공하자 본격적인 원자폭탄을 제조하는 계획이 착수되었다. 계획은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뉴멕시코 사막 로스앨러모스에 건설된 원자탄 연구소에서 진행되었다. 오펜하이머(John Robert Oppenheimer, 19041967)가 소장인 이 연구소에서 진행된 원자탄 개발 프로젝트가 바로 유명한 '맨해튼 계획'이다.

맨해튼 계획을 실무적으로 총괄 주도한 사람은 전기공학자 베너버 부시(V. Bush)였다. 부시는 전미국방개발위원회(NDRC)의 초대 의장이었는데 1941년에 신설된 대통령 직속 과학연구개발국(OSRD)의 장으로서 미국의 전쟁연구개발 체제를 총괄하고 있었다. 부시의 주도아래 194111월 원자폭탄 개발 방향이 제시되었는데 마침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있자 10일 후에 당시 부통령 월러스가 참석한 회의에서 부시가 제안한 원자폭탄 개발 계획이 승인되었다.

 

맨하튼 계획에는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노벨상 수상자들이 참여했다. 보어(1922년도 물리학상), 제임스 프랑크(1925년도 물리학상), 콤프턴(Arthur Holly Compton, 1927년도 물리학상), 유리(Harold Clayton Urey, 1934년도 화학상), 채드윅(1935년도 물리학상), G. P. 톰슨(Sir George Paget Thomson, 1937년도 물리학상), 페르미(1938년도 물리학상), 로렌스(Ernest Orlando Lawrence, 1939년도 물리학상), 라비(Isidor Issac Rabi, 1944년도 물리학상) 등등이다. 그러나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을 촉구하였던 아인슈타인은 참여하지 않았다.

 

4,500여명의 과학자들이 참여한 맨해튼 계획은 많은 노벨상 수상자들이 참여했지만 노벨상의 등용문으로도 유명하다. 블래킷(1948년도 물리학상), 맥밀런(1951년도 노벨 화학상), 코크로프트(1951년도 물리학상), 세그레(1959년도 물리학상), 리비(1960년도 화학상), 위그너(1963년도 물리학상), 파인먼(1965년도 물리학상), 베테(1967년도 물리학상), 아게 닐스 보어(1975년도 물리학상), 램지(1989년도 물리학상) 등은 로스앨러모스연구소 출신의 노벨상 수상자들이다.

원자폭탄 개발 계획이 승인되자 '맨해튼 계획'은 실무책임자로서 육군성의 그로브즈 장군이 임명되었다. 극도의 기밀 유지를 위해 각 개인들의 이름이 사라졌고 이 연구소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더라도 6개월이 지난 뒤 그곳을 나갈 수 있다는 서류에 서명해야 했다. 그래서 이 연구소는 노벨상 수상자의 강제수용소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모든 사람의 가슴에 붙은 배지 번호가 이름을 대신했는데 오펜하이머 소장의 번호는 '47'이었다.

주소도 암호로 사용했다. 로스앨러모스라는 지명은 대통령의 명령으로 미국에서 사라졌다. 우편물은 모두 한 곳에 모아졌고 전부 개봉되었다. 전화가 도청되는 것은 물론 모두 녹음되었다. 비밀은 철저하게 지켜졌다. 실제로 원자폭탄 개발이 성공한 이후에도 자신들이 원폭 개발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직원들도 있었다.

 

<급박한 원자폭탄 개발>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전의 상황을 보면 미국에서 원자폭탄이 만들어지게 된 것은 그야말로 여러 가지 행운이 겹쳤기 때문이다. 우선 당시 미국에는 원폭을 실제 개발할 수 있는 동 분야의 수많은 과학자들이 망명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핵폭 제조에 관한 한 비밀리에 당대의 거의 모든 전문가들을 동원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두 번째는 미국도 유럽의 전투 즉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있으므로 독일은 적국이었다. 그런데 많은 과학자들과 전문가들이 독일이 이미 원자폭탄 개발에 착수했다고 판단했는데 이는 미국에도 치명상을 안길 수 있는 중대한 정보였다. 그것은 앞에 설명한 오토 한과 또 한 명의 천재로 불확정성 원리를 창안한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때문이다. 하이젠베르크도 1939년부터 1940년에 걸친 연구에서 이미 원자로와 원자폭탄의 기본적인 차이를 이해하고 원자폭탄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194110월 하이젠베르크가 독일 점령 하에 있던 코펜하겐을 방문하여 탈출하기 직전의 스승인 보어를 만난 적이 있었다. 나치의 엄중한 감시 때문에 두 사람은 은밀하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중요한 이야기는 집 근처를 산보하면서 이야기했는데 하이젠베르크는 핵반응에 대해 언급하면서 원자로의 윤곽을 설명했다. 그는 원자폭탄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기술적 장애가 있는 것은 물론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독일에서는 원폭을 개발할 수 없다며 특히 보어에게 전시에 물리학자가 우라늄 관련 연구를 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질문했다. 이 당시 비밀리에 미국의 연구에 관여하고 있었던 보어는 하이젠베르크의 질문을 역으로 생각했다. 독일이 원폭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많은 진전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으로 파악했고 결국 미국이 원자폭탄을 개발하는데 보어의 견해는 큰 역할을 했다. 즉 보어로부터 하이젠베르크의 질문을 전해들은 원자폭탄 관련자들은 후끈 달아올랐다. 그들 역시 하이젠베르크가 보어와 만나서 원자폭탄 개발 가능성에 관해 질문했다는 자체를 독일에서 원자폭탄을 제조하고 있다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설명한다.

세 번째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원자폭탄 개발에 관한 정보를 모두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1939년에서 1941년 사이 영국의 원자탄 개발 연구는 그 어느 나라보다 앞서 있었다. 그러나 영국에서 원자폭탄을 실제로 만드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선 핵분열반응의 연료인 우라늄235을 분리하는 방법이 확립되지 않았고 특히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최소의 임계질량의 값이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문제의 돌파구를 연 사람이 1940년 영국에 망명 중이던 프리시와 파이얼스다. 그들은 이론적으로 약 10킬로그램 정도의 우라늄 235만 있으면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는 임계질량이 되며 더욱 정책입안자의 입맛에 맞는 것은 원폭을 항공기에서 투하할 수 있다고 계산한 것이다. 그들은 가장 당면한 문제점인 우라늄235를 분리하는 방법도 제시했고 원폭을 제작하는데 약 2년 밖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영국정부는 그들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원자무기 개발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이것이 모드 위원회이다. 이 위원회가 모드위원회(MAUD)로 알려진 것은 19417월에 비밀리에 보어가 영국에 보낸 전보에 MAUD양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했는데 영국 물리학자들은 이 전문이 암호로 독일이 원폭을 개발하고 있다는 내용이라고 착각했으므로 모드위원회로 붙인 것이다.

여하튼 위원회에서는 원폭을 제작 중인 독일이 먼저 원폭을 제작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국은 기초 연구의 기반을 갖추고도 원자탄 생산 공정을 향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특히 영국은 독일의 공격에 취약했다. 독일은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로켓을 확보하고 있는데 이들의 사정거리 안에 있으면서 원자탄 제조공장 같은 거대한 시설을 갖추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영국은 우라늄뿐만 아니라 플루토늄으로도 원자탄을 개발할 수 있다는 내용 등이 잠긴 1급 비밀들이 담긴 모드위원회 보고서를 미국에 넘겼다.

영국으로부터 자료를 넘겨받은 미국은 크게 자극받아 원폭 개발에 관심을 기우리고 있는데 마침 새로운 발견이 줄을 이었다. 버클리 대학의 로렌스는 자신이 만든 입자가속기 사이클로트론으로 우라늄235와 우라늄238을 분리하던 중 예기치 않게 우라늄238이 플루토늄으로 변환되는 것을 확인했다. 이 발견은 우라늄238도 원자탄의 원료로 사용할 수 있다는 획기적인 군사상의 발견으로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정책 책임자들을 설득시키는데 문제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