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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원자폭탄 투하 필요했는가>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게 된 배경으로는 당시의 국제 정세를 무시할 수 없다. 1945년 5월 7일, 독일이 연합군 측에 무조건 항복하자 소련의 일본 참전 기한은 석 달 후인 1945년 8월 8일로 정해졌다. 미국 정부는 이때 이미 전쟁이 종료되면 공산주의 체제인 소련과의 대립을 예상하고 있었다. 종전 후 국제사회에서 우세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미국만의 힘으로 일본이 항복하도록 밀어붙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1945년 6월 1일, 원자폭탄 투하에 관한 임시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제출했다.
① 원자폭탄은 가능한 한 빨리 일본에 대해 사용되어야 한다
② 원자폭탄은 이중목표를 목적으로 민간인 거주지로 둘러싸여 있거나 인근에 있는 군사 시설 또는 군수공장 및 가장 파괴하기 쉬운 다른 건축물에 사용해야 한다.
③ 원자폭탄은 이 병기가 지닌 특수한 성질에 대해 미리 경고하지 않고 사용해야 한다.
이 보고서가 전후에 민간인을 대상으로 원자폭탄을 투하했다는 비난을 받은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그러나 원자폭탄이 예상대로 일본의 즉각적인 항복을 끌어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일본은 패색이 짙어졌음에도 항복을 생각하지 않고 일본 본토에서 결사 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만약 일본의 의도대로 일본 내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면 최소한 연합군의 희생자는 1백만 명 이상이 될 것이며 심지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보다 수십 배 이상의 인명이 살상되었을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다. 원자폭탄 개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과학자 중의 한 사람인 시보오그(Glenn Seaborg)는 원자탄의 사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45년 6월, 일본 참관인이 참석한 가운데 원자탄의 효력을 보여주어 일본 본토에 이 폭탄을 사용하지 않고 항복하게 해야 한다는 건의안이 제시되었다. 이 건의안은 상당한 주목을 받았으나 다른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내막은 잘 모르나 결국 투르먼 대통령이 일본에 폭탄을 사용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중략) 나는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데 대하여 양심의 가책은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당시 나를 괴롭힌 것은 나가사키에 투하된 두 번째 폭탄이다.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히로시마 투하 후 어째서 일본의 반응을 좀 더 지켜보지 않았는가 궁금하다. 나는 히로시마 폭탄으로 결국 일본이 실상을 알아 항복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것이 종전을 당기고 인명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기 때문에 원폭을 투하한 것이 정당하다는 설명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끊이지 않았다. 1986년 3월 일본의 가네코(金子郭朗)는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이유를 철저한 조사를 거쳐 일본 <문예춘추>에 발표했다. 가네코는 미국 국회도서관 자료, 당시 미국 정부에서 발표한 기밀문서, 관련 인사들의 일기, 저술을 참고했는데 결론은 미국에서 발표한 원자폭탄의 정당성 주장은 거짓이라는 뜻이다. 즉 백만 명에 달하는 연합군들이 전사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원자폭탄을 투화했다는 주장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 미군 기밀문서인 「일본 상륙 작전 요강」에는 두 차례의 일본 상륙 작전에 관한 계획이 담겨 있는데 첫 번째 목표 지역은 일본의 규슈(九州)이고 두 번째는 간토(關東) 평원이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규슈 상륙 작전을 진행하면 처음 20일 동안 약 5만 명이 사망할 것으로 추정했고 당시 태평양지역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은 그 숫자도 과장되었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100만 명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원자폭탄을 투하했다는 것은 원폭 투하를 합리화하기 위한 주장일 뿐이라는 의견이다.
그렇다면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진정한 이유는 다소 맥이 빠지지만 실험용이라는 것이다. 또 미국은 만약 일본 열도에 투하하는 원자폭탄이 불발될 경우 기밀이 누설될 것을 두려워해 트루크(Truk) 제도에 있는 일본 함대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계획도 세운 것이 알려졌다. 그러나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하자 오히려 인구가 집중되어 있고 공격을 받은 적이 없었던 도시를 골라 원자폭탄의 기능을 시험하고 그 위력을 파악코자 했다는 설명이다.
인구가 많은 지역을 특별히 선정하여 투하했다는 것이야말로 그동안 원폭 투하의 진정성 여부를 두고 계속 논란이 된 사항인데 원자폭탄이 투하되지 않았더라도 적어도 1945년 말까지는 일본이 연합군에 투항했을 것이라는 얘기도 알려진다. 『태평양전쟁 보고서(Report on the Pacific War)』에 다음과 같이 당대의 상황을 적고 있다.
‘여러 사실을 상세히 조사한 결과와 생존한 일본 지도자의 증언에 따르면, 비록 원자폭탄이 투하되지 않았더라도, 소련군이 전쟁에 추가로 개입하지 않았을지라도, 일본 본토의 공략이 계획되고 숙고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일본은 1945년 12월 31일 이전에 항복했을 것이라는 것이 조사단의 견해다.’
어느 견해가 맞더라도 당대의 전투 상황 즉 일본의 악착같은 전투 의지를 보면 일본이 항복하기 전까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상자 숫자만 보면 일본에 투하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의 피해가 초유의 일은 아니다. 한 도시의 파괴로 보면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한밤중에 무려 13만5천 명이 사망했다. 3회에 걸친 연합군의 동경 대공습 때에도 히로시마와 버금가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남다른 비난을 받은 것은 단 한 개의 폭탄에 의해 수많은 사상자와 방사능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의 지적은 놀랍다.
당시 미국에는 단 세 개의 원자폭탄만 확보되었는데 한 개는 실험용, 두 개는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사용했으므로 당분간, 학자들에 따라 다르지만 적어도 2년 동안은 원자폭탄의 위협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일본이 더 이상 미국에 원자폭탄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리 쉽게 항복하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설은 의미없지만 여하튼 단 두 개의 원자폭탄의 위력에 놀란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다. 단 하루라도 빨리 전쟁이 종식된 것은 원자폭탄의 위력이라는데는 이론이 없다.
<아인슈타인의 후회>
원자폭탄이라는 괴물이 결론적으로 더 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것을 막아주었다는 점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고 있다. 그러나 원자폭탄의 엄청난 파괴력에 놀란 학자들의 놀라움은 매우 컸다.
원자폭탄의 폭발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확인한 일부 과학자들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들이 만든 폭탄의 미래를 점쳐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람이 독일에서 망명한 제임스 프랑크(James Franck, 1882~1964)이다. 그는 질소비료를 만든 하버(Fritz Haber, 1868~1934)와 함께 독가스를 제조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버는 독가스와 같은 새로운 무기가 투입되면 전쟁이 금방 끝날 것이고 따라서 희생자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독가스는 전쟁을 빨리 끝내기는커녕 아무 죄도 없는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바로 그와 같은 상황이 원자폭탄에 의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프랑크의 생각이었다.
그는 『프랑크 보고서』에서 ‘핵무기에 대한 국제적 차원의 통제가 필요하다’는 요지의 글로 원자탄을 전쟁에 투입하는 것을 반대했다. 프랑크를 중심으로 한 원자탄 투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자폭탄은 일본에 투하되었는데 그의 예견과는 달리 일본이 재빨리 항복했지만 무고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원자폭탄 개발에 결정적인 이론을 제공한 아인슈타인은 E=mc2으로 유도된 에너지가 실질적 용도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자신도 원폭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정황이 되었고 일부 언론에서는 그를 사악한 예언자로 그리기도 했다.
물론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효율적인 폭탄은 아니었다. 5톤이나 나갔던 거대한 폭탄 속에는 순도 70퍼센트로 농축된 우라늄235가 45킬로그램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실제로 핵분열을 한 것은 그 1퍼센트인 0.9킬로그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0.9킬로그램밖에 되지 않는 우라늄의 핵분열 과정에서 나온 에너지가 도시 전체를 파괴하고 많은 사람을 살상했다는 것은 원자폭탄의 무서움을 알려주는데 오히려 큰 홍보거리가 되었다.
1946년 7월 1일자 <타임>의 표지에서 아인슈타인의 얼굴이 원자폭탄의 폭발 장면을 배경으로 ‘우주의 파멸’이라는 문고와 함께 실려 있다. 프리드먼과 돈 레이는 『전설과 시적 영감으로서의 아인슈타인』에서 다정다감한 과학자가 현대의 프로메테우스(하늘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기 때문에 제우스의 분노를 산 그리스의 신)가 되었다고 쓰고 있다.
히틀러와 같은 적에게 대항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의해 개발되었다고는 하지만 원자폭탄의 피해를 직접 알게 된 핵폭탄 제조에 참여한 학자들은 심한 동요를 일으켰으며 핵폭탄이 갖고 올 파장을 우려하여 더 이상의 원자폭탄 사용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독일이 원자폭탄을 만들어낼 능력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 아인슈타인도 루스벨트에 원자폭탄 개발을 진언한 것을 후회했다. 1946년 아인슈타인은 1945년 발족된 국제연합(UN)에 보낸 공개장에서 원자무기의 사용금지를 호소했다. 특히 독일이 원자폭탄을 만들어낼 능력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 아인슈타인도 루스벨트에 원자폭탄 개발을 진언한 것을 후회하면서 노벨상 수상자인 라이너스 폴링(Linus Pauling)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생애에서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폭탄을 만들라고 촉구하는 편지에 서명한 것이었네.’
그는 또한 글에서 이렇게 썼다.
‘원자력의 해방은 우리의 사고 방식을 제외한 모든 것을 바꾸어 버렸다. 우리는 현재 이와 같이 전례가 없는 파국의 위험 앞에 놓여 있다. 인류가 살아남으려면, 인류는 새로운 방식으로 스스로의 본질적 여러 가지 문제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 핵폭탄 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보어도 원폭 개발에 관한 한 미국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미국에 망명하면서 휠러(A. Wheeler)와 함께 핵분열의 이론을 세워 핵폭탄 제조에 핵심을 제공했지만 그는 독일군이 핵폭탄을 먼저 개발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연구 결과를 비밀에 부쳐야 한다는 일부 정책기안자들의 주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특히 당초 예상과는 달리 독일에서 원자폭탄을 만들 기술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자 원자폭탄 개발에 반대하는데 적극적이었다.
그는 원자탄 개발 후 세계가 원자탄을 둘러싸고 어떻게 갈릴 것인지를 경고하며 1944년 처칠과 루즈벨트를 찾아갔다. 그러나 처칠의 반응은 지극히 냉담했고 루즈벨트는 동의하는 기미만 보였을 뿐 실질적인 조처는 취하지 않았다. 맨해튼 계획의 수정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자 보어는 핵개발 기술을 소련에도 알려주고 공동으로 기술을 관리함으로써 원폭의 무차별한 확산을 방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것을 보어의 ‘열린 세계(Open World)'라고 한다. 그러나 보어의 이 생각은 채택되지 않았고 결국 전쟁 후 세계는 핵개발 경쟁에 휩싸인다.
그러나 세계 각국은 자국의 안보와 핵 억지력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오히려 보다 강력한 폭탄을 개발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소위 핵융합반응에 기초한 수소폭탄이다. 수소폭탄은 수소의 동위원소인 이중수소와 삼중수소의 핵이 융합할 때 방출되는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 개념은 헝가리 태생의 물리학자 에드워드 텔러(Edward Teller, 1908~2003)에 의해 구체화되었는데 이중수소와 삼중수소가 핵융합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엄청난 고온과 고압이 필요하다.
학자들은 고온과 고압은 기존의 원자폭탄을 폭발시키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원자탄이란 위력을 알고도 각국에서 보다 큰 핵폭탄을 만들고자 한 것은 원자탄의 경우 핵폭발이 일어나더라도 사용된 핵물질의 많은 부분이 이용되지 않기 때문에 폭발력이 제한된다. 그러나 수소폭탄의 경우 일단 핵융합조건이 만들어지면 투입된 수소 동위원소의 양에 비례하여 폭발력이 커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수소폭탄의 위력은 설계에 따라 기존 원자탄의 1,000배 이상이 될 수 있다. 미국의 경우 텔러와 페르미를 주축으로 1952년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했는데 그 위력은 TNT 15MT으로 이 규모는 대체로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약 1,000배이다. 한편 1961년 소련에서 실험한 폭탄의 파괴력은 58메가톤에 달해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보다 거의 4,000배에 달했다.
놀라운 것은 1913년 제1차 세계대전이전에 H. G. 웰스가 SF소설 『해방된 세계 The World Set Free』에서 베를린에 1956년에 원자폭탄이 떨어진다고 예견했다는 점이다.
‘척탄병은 양손으로 상자에서 큰 원자폭탄을 들어 올려 옆에 고정시켰다. 지름이 60센티미터의 검은 구체였다. 손잡이 사이에는 작은 셀룰로이드 못이 있었고 그는 여기에 입술이 닿을 때까지 고개를 숙였다. 그 다음 그는 유도장치에 공기가 들어가도록 물어뜯어야 했다. 접근이 용이하다고 확신한 그는 비행기 옆으로 목을 길게 빼고 자신의 속도와 거리를 판단했다. 그 다음 아주 빠르게 몸을 굽히고 못을 물고는 폭탄을 떨어뜨렸다.’
실제로 그가 예상한 것보다 11년 더 빠르게 최초의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물론 원자폭탄은 웰스의 글처럼 손으로 들어 올려 떨어뜨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웰스가 예언한 훌륭한 아이디어는 실제로 원자폭탄 개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아이디어는 원자력에 관련하는 많은 학자들로부터 큰 주목을 받았는데 원자탄 개발에 실무적으로 큰 역할을 한 실라르드는 웰즈의 책으로부터 큰 감명을 받았다고 술회한 적도 있을 정도다.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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