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을 놓친 비운의 천재들/우장춘

노벨상에 가장 근접했던 우장춘(1)

Que sais 2020. 10. 17.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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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지금껏 과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로 우리나라의 기초과학이 약하다는 점을 꼽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제강점기우장춘(禹長春, 18981959)은 우여곡절의 파란만장한 일생으로 점철되었고 한국의 열악한 여건 속에서 분투하다가 사망했지만 노벨상가장 근접했던 장본인이다. 우장춘에 대한 과학기술인명예의전당에 적힌 우장춘의 업적으로 보아도 그의 공로를 알 수 있다.

 

우장춘종의 합성이론을 실험적으로 입증하여 세계 유전육종학의 발전에 이바지한 과학자다. 그는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조국 땅에 홀로 돌아와 채소를 비롯한 감자, 등의 우량종자개량하여, 종자 생산과 자급을 실현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또한 연구기관을 세우고 연구 인력을 배출하는 데 힘써 한국 농학의 뿌리를 다졌다.‘

 

'과학기술인명예의전당에 헌정된 우장춘에 대한 공식 업적이다.

우장춘이 누구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씨없는 수박이라면 한국의 세계적인 육종학자가 만든 수박이라고 금방 떠 올린다. 사실 한국 근대의 과학자 가운데 그의 이름만큼 널리 알려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 직후 우리 나라가 과학의 황무지였을 때 대표적인 친일파의 아들이라는 멍에 속에서도 일본에서 귀국하여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연구에만 몰두하다가 갑자기 쓰러졌기 때문에 더욱 기억에 남는 인물이다.

우장춘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불운하게 살았다. 이곳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너무나 굴곡이 많고 극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호기심과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평탄한 삶을 살지 못했음에도 한국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과학자이기도 하지만 그의 업적으로 잘 알려진 종의 합성은 그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 노벨상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마디로 한국인으로 노벨상가장 근접했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 더욱 아쉬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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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운했던 어린시절>

우장춘의 집안한국인과 일본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근대 이후 일찍이 복잡한 혈통의 가계를 형성한 보기 드문 경우다. 그의 어머니와 부인일본인이고 동생과 자녀들도 일본인으로 살아갔다. 반면에 그의 아버지, 이복누나, 이모부 등은 한국인이었다. 혈통으로 볼 때 우장춘한국인과 일본인의 피를 이어받은 혼혈아로서 한국에는 물론 일본에도 여러 명의 친척이 있었다.

그는 일본 도쿄에서 한국인 우범선(禹範善)일본인 어머니 사까이 나카 사이의 장남으로 189848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우리 근대사에 아주 중요한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로 조선 정부가 일본 군대의 도움을 받아 창설한 소위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의 참령(參領, 현 소령급)으로 봉직하던 고위급 인사였다. 그런데 1895년 을미사변, 주한공사 미우라고로가 경복궁에 침입하여 민비(추후 명성황후로 추존)를 시해했을 때 일본인들의 궁궐 침입방조하는 등 소위 을미사변을 주도한 주범이다.

 

우장춘 가족

우창춘의 어린 생활은 매우 불운했다. 아버지 우범선1903자객 고영근(高英根)에 의해 피살될 때 그의 나이는 5, 어머니는 31, 살해당한 아버지는 46이었다. 아버지가 살해된 후 설상가상으로 우장춘의 어머니가 유복자로 우장춘의 동생 우홍춘을 낳았지만 생계를 이어갈 방법이 없었다. 친일파에다 국모시해범으로 지탄받았던 우범선의 가족을 돕는 사람들이 없으므로 한 두끼 쯤 굶는 것은 예사였다고 술회했다.

우장춘의 어머니는 그를 고아원에 맡긴 채 남의 집살이를 했다. 우장춘은 평생 자식들에게 음식을 가려먹지 말라고 가르쳤는데 감자를 먹지 않는 것을 보고 딸이 항의하자 자기는 보통 사람들이 평생 동안 먹고도 남을 만큼의 감자고아원 시절에 먹었다고 대답했다는 일화도 있다. 여섯 살이 돼서야 형편이 나아져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히로시마로 옮겼다. 우장춘히로시마현 구레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쳤는데 성적보통으로 평범하고 무난한 학생인데 수학을 잘 해 장차 공학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중학교를 마친 그는 동경대학 공과에 입학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학비조달이 막연한 차에 마침 관비 장학생을 모집한다는 것을 알고 총독부에 신청서를 내었더니 장학금을 주되 공과가 아니라 농학부 실과진학한다는 조건이었다. 조선총독부조선인에게는 과학 분야에 종사하는 것을 봉쇄하지만 실업교육강조했다. 당대의 많은 조선인들이 농업 분야에 진출한 이유로 우장춘 역시 실과교육을 받으면 장학금을 주겠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제안대1916년 실과에 진학한 우장춘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 졸업(3학년)과 함께 일본 농무성 소속의 농사시험장취직하면서 타고난 연구자로서 육종에 열성을 보인다. 1921년 일본인 초등학교 여교사 스나가고 하루와 결혼했고 농사시험장 기수(技手)승진한다. 당시 그가 임명받은 기수는 한국인으로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매우 인정받는 자리였다. 그가 기수가 되는데는 시험장 데라오 박사의 뒷받침이 큰 작용을 했는데 우장춘데라오 박사에게 기수로 발탁해 주어서 감사하다고 말하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장춘 군, 자네의 실력과 근면 성실한 자세 앞에서는 이 일본인 데라오양심을 속일 수 없었다네. 모두가 나의 도움이 아니라 자네의 떳떳한 실력이었네.”

 

기수가 되면서 비로소 생활의 안정을 얻게 된 우장춘의 연구 의욕은 날로 왕성해지는데 그는 농업시험장의 바쁜 일상생활에서도 박사학위에 유달리 강한 집념을 갖고 있었다. 그가 이토록 박사학위를 받으려고 애착을 보인 것은 도쿄제국대학 농학부농학실입학했는데 이 당시 농학실은 정식 학부가 아닌 전문학교 과정인데다 한국인이라는 민족차별에 대한 대응 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는 19365월 도쿄제국대학으로부터 종의 합성이란 논문으로 농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종의 합성이란 말에 주목하기 바란다. 농학박사가 된 우장춘농사시험장 만년기사(萬年技師)로 발령 받는데 이 자격은 일본에서도 최고의 영예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우 박사만년기사로 발령 받은 바로 다음날 만년기사직반환한다. 그가 일본식 성으로 창씨개명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으로 그 후에도 계속 창씨개명을 거부하자 결국 다음해인 1937, 20년이나 근무한 농사시험장에서 쫓겨난다. 당시는 일 전쟁이 한창으로 학생들에게 단발령이 실시되고, 일본 천황의 사진을 각급 학교에 배부하여 경배토록 하였다. 조선에서 이들 조치에 독립 운동가를 비롯하여 지식인들의 분노가 들끓고 있으므로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그를 일본 정부의 기관에서 근무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농사시험장에서 쫓겨나가면서도 끝내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물론 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읽어 나가하루 우(Nagaharu U)라는 영어 이름으로 논문을 발표했는데 우장춘성을 우()로 고집한 것은 그 나름대로 조국에 대한 사랑의 표시였음이 분명하다. 반면에 그는 24녀의 자식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했다.

여하튼 농사시험장에서는 쫓겨났지만 그의 연구 실적이 워낙 탁월하므로 우장춘은 곧바로 인근의 다키이 농장장으로 자리를 옮겨 연구에만 몰두했다. 1942에는 <원예와 육종>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육종 연구의 수준을 높이고 연구 성과를 널리 알리는 데도 힘을 썼다. 한국인과의 만남도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연구농장에는 견습생으로 한국인 청년들이 56이 있었으며 한국의 대표적인 과학자이태규, 리승기, 박철재 등과도 교유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했는데 농장주인 다키이 사장은 한국에 있는 자신의 농장 부지가 몰수되지 않도록 현지에 가서 수단을 발휘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우장춘은 이를 거절하고 농장에 사표를 내었다. 그는 평소에 도움을 주던 교또의 죠호지(長法寺)에서 농장을 경영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30년의 연구 업적을 갖고 귀국>

해방 직후 우리나라에는 자격 있는 과학기술자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드물기 때문에 이미 세계적인 육종학자로 손꼽히던 우장춘에 대한 국민의 관심은 고조되어 그의 귀국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결국 우장춘 박사19503우장춘 박사 환국촉진위원회의 주선에 의해 귀국한다. 그가 귀국할 때 환국촉진위원장김태홍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 박사의 솔직한 심경을 알 수 있다.

 

환국의 날을 앞둔 나는 착잡한 감격을 감출 길 없습니다. 해방과 동시에 나는 근 30년간 연구하여 오던 일본의 직장사임하고 교오토 교외 사원(寺院)의 일우에서 칩거한지 어언 4년 반, 그 동안 나는 고국의 하늘을 바라보며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릅니다. 나의 일편단심은 언제나 조국에도 농업을 연구하는 기관이 생겨서 내 목숨을 바쳐 일할 날이 올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195038 귀국한 우장춘은 그의 환영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지금까지는 어머니의 나라인 일본을 위해서 일본인에게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을 위해서 최선을 다할 각오입니다. 저는 이 나라에 뼈를 묻을 것을 여러분께 약속합니다.’

 

우장춘은 동래에 있는 한국농업과학연구소의 소장을 맡았으며 환국촉진위원회에서 우장춘의 가족 생활비로 송금한 1백만 엔을 가족의 생활비로 사용하지 않고 책과 실험용 기구, 각종 종자연구 활동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들을 구입해 들여왔다.

해방 직후의 한국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한국농업과학연구소는 이름만 연구소이지 전기, 수도는 물론 기거할 방조차 제대로 없는 형편없는 시설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그를 불러 경무대(청와대)방문할 때에도 마땅한 예복이 없어 평상복인 고무신과 잠바 차림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우 박사의 별명고무신 박사였다. 이 대통령은 우장춘 박사를 만날 때마다 대한민국에 와서 고생을 많이 하는데 도와 줄 수 없는 것이 몹시 안타깝다.고 말만 할 뿐 당시 대한민국의 경제력 때문에 별다른 대책을 세워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에 굴복할 우박사가 아니며 낙후된 농촌의 모습을 보고 품종 개발 의지를 더욱 높였다.

 

과천과학관 명예어의 전당 우장춘 박사

우장춘은 먼저 우량한 채소 품종을 만들어 그 종자를 대량 생산해서 일반 농민의 손에 쥐어 주고자 했다. 그가 품질을 개발한 신종 무와 배추1954부터 보급되기 시작하여 1956, 1957년에 벌써 국내 자급이 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특히 1950대 초반만 해도 국내 배추이파리만 크고 맛이 없었지만, 그의 노력으로 태어난 배추 원예 1원예 2가 나오면서 병충해에 강하고 맛도 있고 속이 꽉 찬 배추를 식탁 위에 올릴 수 있게 됐다. 양파와 고추 역시 그의 노력으로 지금의 맛을 지닐 수 있었다.

감자의 생산에도 큰 관심을 기우렸다. 당시 국내에서 수확되는 씨감자바이러스 병균으로 인해 수확량의 5080퍼센트가 감소되는 것을 발견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원도 대관령시험지와 채종포설치했다. 그의 연구는 대성공을 거두어 우 박사가 개발한 무병 씨감자는 한국전쟁이후 식량난을 해결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동시에 제주도 서귀포 동흥리감귤을 재배하는 기술 연구를 하여 오늘날의 감귤재배 기술 체계화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노벨상에 가장 근접한 연구 업적>

우장춘이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노벨상 수상 대상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대체로 씨없는 수박을 만든 사람이라고는 알고 있지만 우장춘노벨상을 받을 만한 업적이 무엇인지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장춘의 연구 업적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의 연구가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주로 화훼분야에 이루어졌고 광복되어 한국에 귀국한 이후에는 한국의 민생을 위한 실무 현장에 투신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연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유전자 지식으로 무장해야하는데 그의 연구는 유전자 지식이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 진행된 것이다. 여하튼 그가 한국인으로 가장 근접한 노벨상 수상 대상자로 거론되는 근거는 다소 복잡한 종의 합성이란 연구 때문으로 이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그의 첫 번째 연구논문1926<일본유전학> 잡지에 게재된 종자로서 감별할 수 있는 나팔꽃 품종의 특성에 대하여이다. 이 논문을 필두로 우장춘은 계속해서 페튜니아와 나팔꽃의 변이(變異), 자가불온성(自家不穩性), 돌연변이화훼(花卉)의 유전연구에 골몰했다. 특히 페튜니아에 관한 연구는 그를 단번에 세계적인 유전학자로 명성을 얻게 했다. 이 단원은 김진국의 글을 많이 인용했다.

페튜니아는 장식이나 정원용 꽃으로 많이 이용되는 화초의 일종이다. 그러나 홑피기(싱글)의 페튜니아는 포기가 작고 볼품이 별로 없지만 겹피기 꽃(더블)은 크고 화려하며 색깔이 다양하다. 그런데 과거의 겹피기 페튜니아는 불과 반수에서만 겹꽃을 피었다.

여기에서 우장춘싱글(열성겹꽃-PP)과 더블(우성겹꽃-DD)1()잡종에서 우수한 D계통을 육종해 낼 수 있는 교잡채종(交雜採種)의 원리를 도입하여 전수(全數) 겹꽃을 피게 하는데 성공했다. 그가 시험장에서 육종에 성공한 겹페튜니아 꽃은 대단한 성공을 보여 외국으로 널리 팔렸고 그의 신종 씨앗을 취급한 사다까라는 종묘회사페튜니아 세계시장독점하는 엄청난 수익을 올리게 했다.

다음으로 우장춘이 발표한 유채(油菜)의 유전과 육종에 관한 연구는 그를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유전학자로 자리매김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연구이다. 우장춘의 연구 요지현존종(現存種)을 재료로 하는 다른 현존종을 실험적으로 만들어 이 둘을 합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종은 기존하고 있는 종간(種間)의 교잡(交雜)으로 새로운 종을 낳는데 이것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세포 내 염색체 수의 배가에 의한 것(異質倍數體形成)이라는 새로운 학설을 주장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논지를 보다 증빙하기 위해 배추류 작물의 잡종에 관한 연구를 통해 감수분열(減數分裂), 이배체(二倍體) 및 삼배체를 발표했다. 그의 논문은 ()의 합성이라는 새로운 유전자 연구 분야를 개척한 것으로 그 의의가 있는데 잘 알려진 씨 없는 수박이나 겹페튜니아 꽃종의 합성에서 얻어진 신종(新種)이라 볼 수 있다.

우장춘이 거론한 유전자 연구노벨상 수상을 거론할 정도로 현대 과학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실제로 그의 이론을 기초로 한 매클린토크도약이론1983 우여곡절 끝에 노벨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매클린토크의 노벨상공산권과 민주권간의 정치문제로까지 비화된 것은 물론 진화론과 창조론 간의 핵심 논쟁으로까지 이어져 더욱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그런데 그 핵심 논지를 우장춘 박사가 제기한 것이다.

 

참고문헌 :

동양에서 처음 지전설을 주장한 홍대용, 박성래, 과학과기술, 20039월호

"꽃이 국민의 감성 치유할 것"카네이션 개량 앞장선 우장춘, 박근태, 한국경제, 2016.05.08

한국인의 과학정신, 박성래, 평민사, 1993

명예전당에 오른 한국의 과학자들, 박택규이종호, 책바치, 2004

한국 과학기술 인물 12, 김근배 외, 해나무,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