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을 놓친 비운의 천재들/우장춘

노벨상에 가장 근접했던 우장춘(3)

Que sais 2020. 10. 17. 07:57

youtu.be/fZwVrYBW6zM

<다윈, 아인슈타인에 필적하는 업적>

리센코, 맥클린토크형질변경 이론20세기에 들어서 유전자분야가 이룩한 2가지 업적으로 일컬어진다. 또 다른 연구는 왓슨과 크릭DNA 나선구조 발견이다. 맥클린토크의 형질변경이론민주진영과 공산진영이데올로기 싸움으로 범벅이 되어 엄청난 비난을 받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인지 그녀는 새 시대를 연 과학자들인 파스퇴르, 멘델, 퀴리, 다윈, 아인슈타인 등과 함께 위대한 탐험가, 개척자, 발견자들 부류에 합류한다. 형질변경이론이 얼마나 과학계에 큰 비중을 갖고 있는지 알려주는 대목이다.

맥클린토크최초의 논문 발표로부터 무려 32이나 지나서 노벨상을 수상한 것도 색다른 기록에 들어간다. 형질변경에 있어 리센코맥클린토크와 궤를 같이하므로 리센코노벨상을 받았을까하는 질문이 제기된 적이 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그야말로 극과 극으로 대답이 갈리는데 한 측에서는 그가 공산주의와 밀착하여 소련의 학계를 초토화했기 때문에 절대로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리센코를 뭇매 준 곳은 자유진영이며 그가 정리한 이론에 문제가 없으므로 당연히 노벨상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문제는 상당히 풀기 어려운 속성을 갖고 있는데 노벨상위원회에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리센코1976사망하였기 때문이다.

노벨상사망한 사람에게는 수여하지 않는다.

현재도 많은 자료에서 리센코는 매도되기 일수다. 사실 그를 비난할 요소는 많다. 춘화 처리 등에 의한 농산물의 증산이 기대처럼 되지 않았고 그 또한 자신의 주장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을 과학계에서 추방하여 적들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그에 의해 주도된 이데올로기 때문에 소련의 과학이 엉망으로 되었으므로 리센코와 공산주의는 당연히 책임을 져야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리센코의 주장 자체는 거짓이 아니라 이었다는 점이다. 리센코를 비난하던 서방의 학자들이 오히려 이데올로기에 집착하여 과학의 거짓으로 포장한 것이다. 과학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측은 공산측이 아니라 서방측이었다.

다행한 것은 과학은 이러한 오류를 교정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공산주의가 옹호하는 단시간 내의 형질변경을 주장하여 비난을 받았던 맥클린토크노벨상을 받은 것이 그 단적인 예이며 그토록 첨예하게 대립하던 진화론과 창조론종지부를 찍은 것도 과학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과학교과서에서 리센코춘화처리법의 발견자기록하고 있으며 춘화처리법작물은 물론 화초를 재배하는 데 널리 사용하고 있다.

 

우장춘을 설명하면서 당대에 민주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첨예하게 싸웠던 형질변경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 것은

우장춘 박사1983, 야생 옥수수를 사용해서 연구를 하던 바바라 맥클린토크(Barbara McClintock)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할 때까지 살았다면 그녀와 함께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공동으로 수상했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장춘 박사19365종의 합성이란 논문으로 농학박사 학위를 받는데 이것은 매클린토크보다 15년 정도 앞서는 연구다. 물론 우장춘 박사는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매클린토크보다 24년이나 먼저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장춘1898년생이므로 1983이라면 85로 생존할 수 없는 절대적인 나이도 아니다. 더불어 90살이 넘어서 수상한 사람도 있는 것으로 볼 때 노벨상에 관한 한 우장춘 박사불운의 과학자임이 틀림없다.

 

우장춘 박사가 일찍 사망하지 않았다면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별도로 하더라도 우장춘의 이론소채의 육종기술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진전을 이루게 만들었다. 현재 전세계 각지에서 종자의 보존, 교배 재료의 처리, 제웅(除雄) 기술, 잡종 초기 및 후기세대의 처리, 격리채종, 염색체의 변화, 자연변이 이용, 육성연한 단축 등은 우장춘 박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씨없는 수박>

우장춘 박사의 업적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씨 없는 수박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씨 없는 수박 자체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만든 사람이 우장춘 박사는 아니라 일본인 기하라 히또시1943년에 개발한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 씨 없는 수박이란 획기적인 농업기법한국에 알려준 사람우 박사.

 

씨없는 수박

원래 우 박사1953 씨 없는 수박국내에서 시험 재배해 선보인 것은 씨 없는 수박을 만들어 보임으로써 사람들에게 과학 영농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우 박사가 국내에 들어와 무와 배추의 품종을 개량한 후 개량된 종자헐값으로 농민들에게 나눠주어도 농민들은 새로운 종자를 믿지 않고 예전에 하던 방식을 고집했다.

우 박사의 씨 없는 수박은 예상대로 당장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보통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씨 없는 수박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장춘 박사가 처리한 염색체 이론에 의한 3교배유전자 처리법에 대해 설명한다.

생물의 체세포 속 염색체보통 2배체와 4배체를 이루고 있다. 2배체 식물과 4배체 식물교배시키면 3배체 식물을 얻을 수 있는데 바로 씨 없는 수박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식물이다. 2배체인 수박을 콜히친(알카로이드의 일종)이라는 약품으로 처리하여 4배체를 만들어 보통 품종의 수박과 화분 교배를 시키면 3배체의 씨앗을 얻을 수 있다. 3배체로 만들어진 씨앗을 키워 2배체의 수박꽃과 교배시키면 씨 없는 수박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3배체 식물은 자연적으로도 생기는데 미루나무대표적인 3배체 식물이다. 일반적으로 3배체 식물2배체 식물보다 크고 발육도 왕성하다.

 

이러한 3배체 식물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1936 미국의 유전학자 블레이크슬리와 애버리. 이들은 콜히친으로 자유롭게 식물의 배수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여러 가지 배수체를 만들어 열매가 큰 호박, 뿌리가 큰 무, 비타민이 많은 토마토, 꽃이 큰 수박풀 등도 이런 기법을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결과가 왜 일어나는가를 알 수 없었는데 그 이유를 알기 쉽게 이론적으로 규명한 사람이 우장춘 박사. 노벨상은 기본적으로 기초 이론을 중시하므로 어떤 현상을 규명하는 사람에게 수여한다. 우 박사노벨상에 근접했다는 것도 이런 이유다.

이를 보다 쉽게 설명한다면 배추, 양배추, 흑겨자와 같은 기본종 사이의 상호 교잡으로 복합종인 유채, , 에티오피아겨자를 만들 수 있다. 유채(n=19) 배추(n=10)양배추(n=9)의 염색체가 합해져 생기고 갓과 에티오피아겨자도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유채를 인위적으로 만들고 그 과정을 유전학적으로 규명함으로써 종간잡종과 종의 합성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이는 현존하는 식물을 실험을 통해 합성한 최초의 예로 알려져 있다. 우장춘 박사의 이와 같은 종의 합성우장춘의 트라이앵글(U's Triangle)로 불리며 유전학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것으로 인정받는다. 우박사노벨상매클린토크와 함께 수상했을 것으로 유추하는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아버지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장춘>

우장춘 박사가 탁월한 연구 업적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 크게 중용되지 못한 것은 그의 천성이 소박하여 매사에 옳고 그른 것을 분명히 발언한 면도 있지만 아버지 우범선의 경력 때문이다. 우범선(18571903)<반민족문제연구소>에서 분류한 친일파 99에 들어가는 대표적인 친일 경력자.

그러므로 우장춘 박사가 한국으로 들어온 것은 상당한 결심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아버지인 우범선민비시해범의 주범이자 구한국 역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대한민국에서 그를 초청하자 곧바로 승낙하고 국내로 돌아온 것아버지에 의해 역사적으로 부과된 짐대신하고자 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 나라의 농업의 발달을 위한 연구에만 몰두했고 어떤 직책도 탐하지도 않았다. 이승만 정권에서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상황이었음에도 그를 중용하지 않은 것은 우범선의 전력이 워낙 한국인들에게 고깝지 않게 보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장춘에게도 약간의 문제가 있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언어였다.

 

그는 한국말을 몰라 대화나 강의에 항상 일본어로 했는데 그는 우리말을 모르더라도 자기 일을 하는데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가 접하는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의 사람들이라 일본어가 오히려 수월했다. 그러나 그가 한국어를 모른다는 사실은 우장춘비애국자 또는 친일파로 의심받았고 대학에서 학생들의 강연거부가 일어나기도 했다. 연구소에서도 연구원과 의사소통이 어려웠다. 더욱이 기본적으로 일본에서 오랜 생활을 했으므로 한국 음식을 잘 먹지 못했고 특히 김치가 매워서 먹지 못했다. 아이러니한 일은 우장춘김치의 재료배추의 육종에 높은 열정을 쏟았지만 결코 김치를 먹지는 못했다. 한국에서 김치를 먹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임을 이해할 것이다.

 

외형적으로 국민들의 우 박사에 대한 인기가 높고 우 박사 스스로 직책을 탐하지 않고 농업 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쌓고 있었지만 정부 수사기관에서는 우장춘을 항상 요주의 인물로 보았다. 그가 한민족북한으로 갈라져 있는 것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말하자 수사기관으로부터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는 불평분자로 오인되기도 했다.

당시의 국내 여건은 북한의 공산정권에 대해 거론하는 것조차 불문율로 되어있었으므로 이데올로기상 문제가 있다는 관리들의 주장은 우 박사의 모든 행동제약을 가져왔다. 일본에 있는 그의 장녀 결혼식은 물론 어머니의 장례식조차 가볼 수 없게 출국정지 처분을 받았다. 결국 한국에서 어머니의 시신이 없는 장례식이 치러졌고 상당 금액의 부의금이 들어왔는데 우 박사는 그 돈을 모두 동래 원예시험장의 우물을 파는데 사용했다. 시험장이 있는 동래 일대는 암석이 많아 우물 파기가 어려워 언제나 식수난으로 고통을 겪었는데 다행하게도 수맥을 발견하자 우물을 판 것이다. 수맥에서 물이 나오자 가식이 없는 우 박사는 손뼉을 치면서 어머니의 젖이 솟아오른다.’라고 소리친 후 자유천(慈乳泉)이란 이름을 붙였다.

우박사가 조국에 돌아와 남긴 업적은 수없이 많지만 북위 36도 이북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일식이수벼(一植二收水稻) 또는 이기작벼(二期作水稻)를 개발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또한 우 박사가 갖고 있는 육종지식을 바탕으로 열악한 환경이지만 끊임없는 연구결과 우량종자의 생산체계를 확립해 일본에 의존하던 채소종자의 국내 자급길을 열었다는 것이 그의 큰 업적 중에 하나이다.

우장춘 박사는 초인적인 집념으로도 유명했다. 그에게는 학문이나 연구뿐만 아니라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 집념이 있었다. 그는 직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

 

나는 몰라서 쉬지 못하지만, 식물이 쉬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쉬도록 하게.”

 

그에게는 일정한 근무시간이 없었다. 부하 직원들이 퇴근한 후에도 책상에 앉아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그가 봉직하는 국립중앙원예기술원(현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연구원들도 쉬는 날이 거의 없었다. 봉급이 적어 월세도 내지 못하는 직원도 수두룩하여 불만이 많았지만 우장춘 박사의 반응은 단호했다. 우 박사식물을 연구하는 사람쉰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연구가 힘들어 떠나는 사람은 막지 않고 오는 사람도 막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집념이 그의 건강을 해치고 말았다. 우박사는 한국에 귀국한 지 불과 9 만인 1959신경통약 장기간 복용한 결과 위궤양복막염까지 겹쳐 세 차례나 수술을 받았으나 기울어진 병세를 돌이키기에는 너무나 늦었다. 그가 중태라는 것을 듣고 달려온 그의 부인과 후배들을 보고도 시험 중인 벼가 마음에 걸리는지 수확한 벼를 갖다 달라고 졸랐다.

우장춘은 과학자로서 크게 두 단계의 시기를 살았다. 하나는 일본에서 유전육종학에 대해 학문적으로 세계적인 성과를 거둔 시기이고, 또 하나는 우리나라에서 육종기술의 기반을 마련하고 이를 통해 우량종자의 확보와 보급을 위해 노력한 시기이다. 일본 개인회사에서 농장장으로 근무하던 시절은 이 두 단계의 중간에 해당하는 전환기와 준비기의 성격을 지녔다. 우장춘이 일본에서 귀국한 후 뛰어난 연구업적을 계속 이어가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한국에서 그의 활동은 육종학을 시작하고 그 기반을 세우는 일에 중요한 기여를 한 개척자로서 그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농어진흥청의 우장춘

우리 나라 근대농업을 개척한 우장춘 박사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1 부산시 문화상을 수상했고 건국 이래 두 번째대한민국 문화포장수상했다. 그는 문화포장을 받고 드디어 한국이 자신을 인정해 주었다고 기뻐해했다. 그러나 그는 문화포장을 수상한지 3일 후인 195981061세로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수원 서호(西湖) 옆 농업진흥청내 농업기술원 뒤 여기산 기슭안장되었다. 부산 동래구 온천2에는 우장춘박사기념관이 있다.

 

참고문헌 :

동양에서 처음 지전설을 주장한 홍대용, 박성래, 과학과기술, 20039월호

진화 고속으로 일어난다, 임소형, 과학동아 20052

거북이야기, 김성호, 문화일보, 2005.11.21

"꽃이 국민의 감성 치유할 것"카네이션 개량 앞장선 우장춘, 박근태, 한국경제, 2016.05.08.

http://www.kast.or.kr/HALL/

종의 기원, 다윈, 삼성출판사, 1983

한국인의 과학정신, 박성래, 평민사, 1993

과학의 역사(3), J. D. 버날, 한울, 1995

내가 듣고 싶은 과학교실, 데이비드 엘리엇 브로디 외, 가람기획, 2001

이것이 생물학이다, 에른스트 마이어, 몸과 마음, 2002

틀을 깬 과학자들, 오진곤, 전파과학사, 2002

생명 생물의 과학, 윌리엄 K. 푸르브, 교보문고, 2003

사이언스 퍼스트, 로버트 E. 아들러, 생각의 나무, 2003

종의 기원, 자연선택의 신비를 밝히다, 윤소영, 사계절, 2004

명예전당에 오른 한국의 과학자들, 박택규이종호, 책바치, 2004

이타적 과학자, 프란츠 M. 부에티츠, 서해문집, 2004

한국 과학기술 인물 12, 김근배 외, 해나무, 2005

옥수수 밭의 처녀 맥클린토그, 나타니엘 C. 컴포트, 전파과학사, 2005

교양인을 위한 노벨상 강의(생리의학상), 야자와사이언스연구소, 김영사, 2011

한권으로 보는 인물 과학사, 송성수, 북스힐, 2012

과학의 순교자, 이종호, 사과나무, 2014

과학자의 두 얼굴, 과학나눔연구회, 일진사, 2015

한국의 과학 천재들, 이종호, 광문각,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