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들이 고구려에 대해 강한 매력을 갖는 것은 현재 중국의 영토로 되어 있는 광대한 지역을 한민족으로 구성된 강한 군대로 마음껏 뛰어다녔다는 데 있는 것 같다. 특히 중국의 수도 북경지역까지 고구려가 진출하였다는 사실은 한민족으로 깊은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광개토대왕(375~413) 재위 당시 고구려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요하, 북쪽으로는 개원, 동쪽으로는 옥저와 예, 그리고 남쪽으로는 한강 유역에 이르렀다. 역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413~491) 시대에 고구려가 고조선이 차지했던 영토를 거의 전부 되찾은 것으로 추정한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하면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대목이다. 그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고구려 멸망이 국가의 운명을 건 치열한 전투에서 패배했다던가 하는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 당나라와 전투에서 불패의 신화를 갖고 있던 연개소문이 사망하자마자 그의 아들들 간에 권력싸움이 일어나 국가를 당나라에 바쳤다는데 원인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곧바로 당나라와 결별하고 독자노선을 걸었다는 점을 크게 인정하더라도 아쉬움이 배어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더욱이 신라 ‘통일’로 영토의 75퍼센트를 잃어 버렸다는 데는 말을 잃는다.
신라 진흥왕 시대인 6세기 중엽 고구려의 영토는 41.1만 제곱킬로미터, 백제는 2.9만 제곱킬로미터, 신라는 8만 제곱킬로미터로 52만 제곱킬로미터다. 현재 남북한의 면적이 22만 제곱킬로미터이므로 한반도 이북의 만주 땅에만 30만 제곱킬로미터의 영토가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신라가 통일한 후인 8세기 중엽 신라의 영토는 13.4만 제곱킬로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신라가 가장 강성했던 진흥왕 때의 면적이 8만 제곱킬로미터였으므로 백제의 면적 2.9제곱킬로미터를 합병하고서도 통합된 면적이 13.4만 제곱킬로미터였다면 신라가 통일 후에 실제로 북방 영토에서 늘어난 면적은 2.5만 제곱킬로미터가 채 되지 못한다는 계산이다. 요컨대 삼국 시대의 총면적 52만 제곱킬로미터가 신라 통일 이후에는 13.4만 제곱킬로미터로 줄어들었으므로 삼국통일이라는 명분으로 잃어버린 땅은 무려 38.6만 제곱킬로미터가 된다.
한국인들이 고구려의 멸망을 얼마나 안타깝게 생각하는가는 <EBS공사창립5주년특집 다큐멘터리> 설문조사의 ‘역사학자 100인이 말하는 우리 역사의 희노애락’의 결과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설문에서는 가장 기뻤던 순간, 가장 슬펐던 순간, 가장 분노했던 순간을 적시했는데 고구려의 멸망은 가장 슬펐던 순간 중 세 번째로 꼽혔다. 한국인들은 가장 슬펐던 순간 첫 번째로 경술국치를 꼽았고 두 번째로 한국전쟁을 선정했지만 이 사건들은 근대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므로 한국 5천 년 역사에서 고구려멸망을 세 번째로 꼽았다는 것은 고구려의 멸망이 그만큼 한국인들에게 가장 안타까운 역사의 순간이었음을 의미한다. 참고적으로 가장 기뻤던 순간은 8ㆍ15광복,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와 6ㆍ10민주항쟁이며 가장 분노했던 순간은 5ㆍ18광주항쟁, 삼전도 치욕, 동학농민군 패배이다.
함석헌 선생의 ‘신라는 너무 값비싼 값을 주고 통일을 샀으나 그 통일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통일이었다. 청천강 이북을 가보지 못한 통일이다. 통일이 아니요 분할이다.’라는 한탄이 더욱 가슴에 닿는다. 그 기저에 깔린 아쉬움은 고구려가 사상 최고의 강대국이자 정복국가였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동양에서 치열한 정복사업을 벌일 때 서양에서도 기마민족 훈(Hun)이 서양문명사를 새로 쓰게 하는 정복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유럽의 중세 서두는 강력한 훈족이 서유럽의 본토를 침공하여 게르만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사건을 그 시발로 삼고 있다.
서기 375년, 아시아의 기마 민족인 훈족(Huns)이 볼가 강을 건너와 게르만족의 한 갈래인 동고트를 공격했고, 동고트는 서고트를 공격했다. 이에 서고트는 로마제국 영토로 들어가 보호를 요청했다. 게르만족이 로마 영토에서 살게 된 지 100여년 후인 476년, 서로마제국은 결국 게르만족의 수장(首長) 오도아케르에게 멸망한다. 이후 게르만족이 서유럽과 아프리카 북부 등 여러 지역으로 갈라지면서 유럽에는 새 국경이 그어졌다. 이때 성립된 국경은 대부분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훈족은 한민족의 일파〉
최근 서유럽에서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시켰고 로마제국을 풍전등화의 운명 속으로 몰아넣은 주인공인 훈족이 한민족의 일파임이 세계 각지에서 발굴된 유물과 사료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이러한 놀라운 역사적 주장에 흥미를 갖는 사람들도 많지만, “무슨 얼토당토한 소리냐?”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훈족이란 이름 자체가 우리에게 생소할 뿐 더러,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서기 4~5세기경 한반도에 살고 있던 한민족이 어떻게 유럽을 공격할 수 있었겠느냐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훈족이 한민족의 일파라는 역사적 주장이 곧 한민족이 유럽을 직접 공격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훈족은 흉노(匈奴, 북방 기마민족을 통칭한다)의 한 분파로,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4세기까지 약 600년간 중원 지역을 놓고 중국과 각축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흉노는 끊임없이 부침을 거듭했다. 이때 흉노에 속해있던 한민족의 원류 중 일부가 서쪽으로 진출하면서(西遷) 훈족으로 성장했고, 또 한 부류는 한반도 남부지역에 까지 진출하여(東遷) 가야?신라 즉 현재의 한민족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점을 근거로 하고 있다.
프랑스 등 서유럽에 살고 있는 훈족의 후예들에게서 몽골 반점이 발견되고 있다. 몽골 반점은 꼬리뼈 높이 엉덩이에 나타나는 색소 변색으로 유전학적으로 몽골계통의 민족에서 나타나는 신체적 특징이다. 몽골반점이 한민족에게만 나타나는 특징은 아니지만, 훈족 후예들이 몽골반점을 갖고 태어난다는 점을 미루어볼 때 한민족과 훈족은 친척의 인연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훈족은 그들 특유의 예맥각궁(濊貊角弓)을 사용했다. 예맥각궁은 만드는 데만 5년, 제대로 쏘기 위해 활을 익히는 데만 10년이 걸리지만, 1분 안에 15발 이상 쏠 수 있다고 알려진 활이다. 훈족이 예맥각궁을 사용했다는 것은 이탈리아 북부 지역인 아퀼레이아에 자리한 크리프타 아프레시 교회의 프레스코화가 말해준다.
이 그림에는 말을 탄 훈족이 추격해오는 로마 기병을 향해 활을 쏘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 나오는, 말을 탄 채 활로 동물을 사용하는 고구려 무사들과 똑같다. 고분벽화에 나오는 화살촉은 도끼날 화살촉인데, 이 화살촉은 날아가면서 회전하기 때문에 목표물에 꽂히는 순간의 충격이 매우 크다. 훈족도 바로 이 도끼날 화살촉을 사용했다.
관습적인 공통점도 발견되고 있다. 훈족의 골상이 편두(偏頭, cranial deformation 일명 납작 머리)라는 사실이다. 학자들은 몽골지역부터 독일의 튀링겐과 오덴발트, 프랑스 칼바도스 지방에 이르는 훈족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된 분묘에서 나온 훈족의 인골을 분석한 결과, 훈족은 관자놀이와 이마가 특이하게 눌려있었고, 머리 둘레에 고랑 같은 주름이 팼으며, 머리통이 길게 늘어나 있는 편두라고 알아냈다. 그런데 가야국이 있던 경남 김해에서도 편두 두개골이 발견되었다. 또 법흥왕 등 신라왕도 편두였다고 한다. 최치원은 신라의 국사 지증대사의 공덕비에 법흥왕이 편두라고 기록했다.
고대 인도에서 행해졌던 관습, 혹은 코카서스 북부지역에 사는 유목민들의 풍습으로도 알려진 편두는 한민족과 연관성이 크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진한(辰韓) 사람들은 모두 편두’라는 기록이 있다. 또 고조선에는 일찍부터 편두를 만드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편두는 중국인과는 구별되는. 동이(東夷)족 사이에 매우 오래 동안 성행했던 풍습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점은 훈족에게선 편두가 발견되지만, 흉노족에게선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유럽을 공격한 훈족은 편두 습속을 가지고 있는 특수 부족으로, 한반도 남부의 가야 및 신라 지역과 친연성(親緣性)이 있다고 유추할 수 있다.
한편 훈족의 이동경로에서는 유명한 대?소형 동복(cup cauldrons)이 발견된다. 기마로 생업을 유지하던 기마민족에게는 자신들만의 특성과 생존법, 의식이 있기 마련이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말에 갖고 다니는 동복(銅?)이다. 기원전 8?7세기 무렵에 출현하여 기원후 5?6세기 무렵에 소멸되는데 유목민족의 특성상 매우 넓은 지역에 걸쳐 발견되고 있다.
원래 동복은 유목민들의 상징적인 유물로도 간주되며 유목 부족장들에게 바쳐지는 것이다.
동복의 원래 용도는 정화의식(Purification rite)을 행할 때 고기를 삶는데 쓰는 대형 화분 형태의 동제용기로 무리 중에서 족장으로 추대되면 동복을 받아 항상 말 안장에 얹어 놓고 다닌다. 일반적으로 30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항아리처럼 생겼는데 대형 동복의 경우 높이는 50 ~60센티미터이고 무게는 50킬로그램이 넘는 것도 있다.
그러나 동복이 정화의식용으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적벽대전에서 조조 수군이 방통 등의 연환계에 의해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에 패배하자 조조가 화용도(華容道)로 달아나는데 손·유 연합군의 추격이 매섭다. 유비 측에서는 관우, 장비, 조자룡 등이 추격하고 손권 측에서는 육손 등이 합세하여 조조를 추격하므로 절대 절명의 위기가 찾아오는데 도망가는데 바빠 식량을 챙길 수도 없었다.
굶고서는 도망도 간단한 일이 아니다. 결국 조조는 인근의 촌락으로 몰려가 양식을 겁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수없이 장병들에게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추상같이 호령을 내리던 조조이지만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삼국지』에서 적혀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위기에 이전(李典, ?~215 이후)과 허저(焦國, 2세기 말~233 이전)가 나타나 조조를 구하는데 이때 군사들의 말안장에 얹어 놓은 동복(銅?, 청동솥)으로 촌락에서 훔쳐 온 쌀로 밥을 짓고 말고기로 배고픔을 채운다. 『삼국지』에서 이전(李典)과 허저(許楮)의 군대에 동복이 있다는 것은 이들 군대가 전형적인 북방기마민족인 추장 급이 편성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이전과 허저는 북방기마민족의 추장급으로 조조의 휘하에서 활약한 것이다.
동복은 내몽골의 오르도스 지방에서 다수 발굴되었고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로 추정되는 몽골의 노인 울라 고분군(Noin Ula, 고분 212기가 발견된 노인 울라(몽골어로 ‘왕후(王侯)의 산’)는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북방 약 100킬로미터 지역에 있다)를 비롯한 북몽골 지대의 도르닉나르스, 알타이 산맥의 데레츠고에, 볼가 강 유역의 오도가와 그 지류인 가마 강 유역의 페룸, 서우랄의 보로쿠타 지방, 남러시아 돈 강 유역의 노보체르카스크, 헝가리, 프랑스, 독일에서도 발견되었고 중국의 북부 초원지대에서 발견된다. 헝가리, 프랑스, 독일에서 동복이 발견되는 것은 게르만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이 이들 지역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두 가지 형태로 발견된다. 첫째는 동으로 된 용기 형태이며 둘째는 금관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유산으로 간주되는 국보 제91호의 기마인물상과 같은 토기 형태이다. 기마인물상 토기는 신라의 경주 근교인 경상북도 경주시 노동동 금령총에서 1924년에 출토되었는데 높이 23.5센티미터, 길이 21.5센티미터이다. 기마상의 주인과 하인이 말을 타고 있는데 이들의 뒤 쪽에 동복을 갖고 있다. 말 엉덩이 위에 솥처럼 생긴 것이 바로 동복이다. 게다가 기마인물상의 주인공도 편두이다. 또한 훈족의 동복 등에서 발견되는 문양은 한민족의 금관 등 머리 장식 양식과 유사하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금관에는 나무형상(出字形 장식)과 녹각형상(鹿角形 장식)이 많다. 이는 북방에게도 나타나는 풍습으로 북방민족이 한반도로 이동해 정착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존 카터 코벨은 기마인물상 토기에 대해 매우 주목할 만한 의견을 제시했다. 그녀는 상류층 사람들의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들로 술잔과 함께 말 모양 토기들이 많이 발견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기마인물형 토기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말 앞가슴에 나 있는 주둥이의 위치다. 말 잔등에 있는 배구로 액체를 부어 넣은 후 말 앞가슴의 주둥이로 액체가 흘러나오게 된다. 말의 꼬리가 부자연스런 각도로 뻗쳐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부분이 손잡이로 조정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코벨은 시베리아의 무속에서 말을 제물로 바쳐 죽인 뒤 의례의 하나로 그 피를 받아 마시는 과정이 있다고 적었다.
북방 유목민족의 전형적인 습속인 순장(殉葬) 또한 가야 지역의 고분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특히 금관가야의 유적인 대성동 고분군 1호분에선 우마(牛馬)의 머리를 베어 목곽 위에 얹어놓은 형태가 발견되는데, 이는 훈족을 포함한 북방 유목민족의 동물 희생행위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훈족이 나무에 빨간 헝겊을 달아 악귀가 접근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는 기록과 곰을 평화의 토템으로 숭배했다는 점은 우리 민족이 마을 입구에 장승이나 솟대를 세워 염원을 빌고 곰을 토템으로 삼은 점과 매우 유사하다. 대다수 유목민족들은 곰이 아닌 다른 동물들을 숭배대상으로 삼는다. 토템 대상으로 가장 일반적인 순록과 수달 등은 지금까지도 몽골 지역에서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참고적으로 많은 한국 사람들이 흉노라는 말부터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사실이다.
흉(匈)은 오랑캐를 뜻하며 ‘노(奴)’자는 대체로 한자에서 비어(卑語)인 ‘종’이나 ‘노예’의 뜻으로 그들을 멸시하는 의도에서 ‘노’자를 첨가해 ‘흉노’로 불렀다고 알려지기 때문에 더욱 연상되는 이미지가 좋지 않다. 그러므로 주채혁 박사는 흉노에서 흉(匈)자를 떼어내고 선비(鮮卑)에서도 비(卑)자를 떼어내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흉(匈)’자는 ‘훈(Hun 혹은 Qun)’의 음사이며, ‘훈’은 퉁구스어에서 ‘사람’이란 뜻으로 흉노인 스스로가 자신들을 ‘훈(Hun, 匈)’으로 불렀음을 볼 때 ?오랑캐?를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상식적으로 흉노라는 말이 자신을 비하하여 부르는 ‘노예와 같은 오랑캐?라는 말이라면 중국보다 3배나 더 큰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던 흉노가 이를 용납했을 리는 없다.
이는 기원전 3세기 묵특선우(冒頓單于 기원전 209~174)가 지휘하는 흉노가 동호를 격파하고 유목기마민족의 패자가 되어 아시아 초원의 연변에 있는 거의 모든 민족을 복속시켰을 때 그 영토는 중국의 거의 3배에 달하는 대제국이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의 영토는 동으로는 한반도 북부(예맥조선), 북으로는 바이칼호와 이르티시 강변, 서로는 아랄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渭水)와 티베트 고원까지 이르렀다.
흉노에 대한 보다 설득력 있는 해석은 고구려 초기에 ‘나(那)’나 ‘국(國)’으로 표기되는 집단들이 상당수 나타나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이때의 ‘나(那)’는 ‘노(奴)’, ‘내(內)’, ‘양(壤)’ 등과 동의어로 ‘토지(土地)’ 혹은 ‘수변(水邊)의 토지(土地)’를 의미한다고 지병목 박사는 적었다. 고구려에서의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貫那部), 소노부(消奴部, 涓奴部)에 흉노(匈奴)와 마찬가지로 노(奴)자가 들어있는데, 이들은 고구려 성립 이전에 압록강 중류지역 부근의 토착세력으로 고구려의 성장과 더불어 정복?융합된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정수일 박사는 원대(元代)의 극 「공작담(孔雀膽)」의 대사 중에 나오는 ‘노(奴)’나 ‘아노(阿奴)’의 어의를 볼 때 남편을 지칭하는 ‘낭(郎)’이나 ‘낭자(郎子: 그대, 그이, 낭군)’의 뜻이거나 ‘노’자를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인식했다. 흉노의 어감과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선입감을 이제 버려도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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