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틸라가 훈족임에도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다.
리더십이란 집단의 목적을 위해 다른 이들의 행동을 지시하는 책임을 가지기 위한 하나의 특권이라고 설명된다. 즉 성공과 실패의 책임을 지고 각각의 구성원들에게 권위의 레벨을 정해 주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다. 이것은 어떤 특별한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한 다른 기술들을 개발하는 데 효과적인 기초가 된다.
아틸라가 야만적인 유목민들을 이끌고 훈족의 수장이 되었을 때 그가 리더로서 직면했던 일보다 더 큰 리더십에의 도전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 그의 부하 중에서 아틸라의 세계 정복과 훈족의 국가 건설이라는 대의를 공유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결정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들을 납득시키고 극복하는 것이 아틸라의 임무였다.
놀라운 것은 아틸라가 그에게 닥쳐온 모든 난관들을 슬기롭게 헤쳐 나갔다는 점이다. 그는 로마에 인질로 있는 동안 로마를 철저히 연구하여 후일 로마와 대항할 때 누구보다도 더 잘 로마를 알고 있었다. 아에티우스와 살롱 전투에서 비록 승리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패배하지도 않았지만 곧바로 철수를 단행한 후 다음 해에 다시 로마를 공격할 정도는 미래관을 갖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수족처럼 부린 부하들의 대부분이 훈족이 아니라는 점이다. 451년, 훈족의 영웅 아틸라가 서로마의 장군 아에티우스와 살롱에서 대제국의 운명을 걸고 혈투를 벌렸을 때 헝가리의 본거지에서 발진한 장병 20여만 명 중 훈족만으로 구성된 군대는 고작 8000~10,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아틸라가 훈족 자체의 병력보다 수십 배가 많은 병력을 수시로 동원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이 훈족에 여러 민족들이 혼합되어 있었음에도 아틸라가 일사불란하게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아틸라가 휘하에 있는 부족들을 다독거리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틸라는 부하들에게 전 부족이 함께 뭉쳐 일한다면 적과 전투하여 승리할 수 있고 재물은 당연히 따라온다고 강조했다. 그는 융화를 강조했다. 또한 닥치는 난관을 자신과 함께 헤쳐 나가면 항상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역설했고, 자신도 부하들과 함께 똑같이 생활한다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로마제국을 정복하여 세계를 호령하는 위치에 도달했음에도 자신은 돌이나 나무로 만든 자리에 앉았다.
아틸라는 이질적인 부하들을 일사불란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그들과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일단 복속하는 민족은 ‘준 훈족’으로 우대하여 차별하지 않았다. 훈족은 중앙아시아에서부터 동거 동락해 온 투르크 계열은 물론 서아시아 각지의 민족들이 훈족에 귀부(귀화)하면 거의 대부분을 ‘준 훈족’으로 우대하면서 이들 민족들을 ‘친구’ 또는 ‘동반자’로 불렀다.
물론 이것만이 아틸라로 하여금 세계의 정복자로 만든 것은 아니다. 그가 로마의 정복자가 되면서 세계 3대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리더십을 살펴본다.
■ 지도자의 조건
1. 성공을 위해 지휘관이 반드시 똑똑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승리를 향한 만족할 줄 모르는 욕구와 임무에 대한 신념, 불굴의 용기를 반드시 가져야 한다.
2. 위대한 지도자 치고 자기중심적이고 독단과 자기애에 빠진 사람은 없다.
3. 현명한 지휘관들은 수정할 뿐 타협하지 않는다.
4. 한 지휘관이 큰 성공을 이루면 시기하는 자들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5. 평상심을 잃은 지휘관은 이미 패배한 것이다. 승리하지 못했더라도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면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을 유지할 수 있다.
6. 현명한 지휘관은 나쁜 소식을 전하지 않음으로써 부하들을 죽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나쁜 소식을 전달하지 않은 부하를 죽인다.
7. 잘못된 질문을 하는 지휘관은 항상 잘못된 대답을 들을 수밖에 없다.
8. 현명한 지휘관은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질문을 절대 하지 않는다.
9. 강한 지휘관도 나약함을 갖고 있다. 현명한 지휘관의 의무는 강함이 나약함을 이기도록 만드는 것이다.
10. 적절한 스트레스는 지휘관의 능력 개발에 핵심이며 도전이 없다면 자신의 잠재력도 깨닫지 못한다.
11. 지휘관이 되는 것이 쉽다면, 누구나 다 지휘관이 될 수 있다.
■ 의사 결정
1. 모든 결정에는 위험이 따르며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2. 신속한 결정이 항상 최고는 아니다. 반대로, 느린 결정이 항상 최고도 아니다.
3. 지휘관이 아주 멀리 떨어진 본부에서 최종 결정을 내리면 실패할 수 있다. 직면한 상황과 잠재 상황에 대한 판단은 전장을 직접 누비는 장수가 제일 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달콤한 승리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부하들을 전쟁에 동원해서는 안 된다.
5. 현명한 지휘관은 약점이 장점을 압도하는 상황에서 부하들을 곤경으로 넣지 않는다.
6. 포기는 위임이 아니라 나약함의 상징이다. 위임이 강인함의 상징이다.
■ 위임의 기술
1. 지휘관 혼자 모든 책무를 완수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라
2. 지휘관들은 필수적인 지휘권을 위임해서는 절대 안 된다.
3. 훌륭한 지휘관은 부하들에게 위임했던 임무에 대한 모든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4. 지휘관이 한 번 책임을 위임했으면 결코 참견하지 말아라.
5. 부하가 위임받은 일에 대히 도움을 청하면 반드시 도와라
■ 외교와 정치
1. 정치적 전쟁에서 항상 뒤를 조심해야 한다. 지휘관은 종종 가장 믿는 사람에게 배신당한다.
2. 승리는 어디에서, 언제에 대한 답을 아는 것이다.
3. 훈족은 승리할 수 있는 전쟁에만 참여한다.
4. 훈족은 외교가 실패했을 때 전쟁을 한다. 그러나 전쟁이 외교적 접근의 시작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도 숙지해야 한다.
5. 목적이 분명할 때만 적을 만들어라.
■ 목표의 설정
1. 천박한 목표는 천박한 결과를 가져온다.
2. 성공에 대한 비판이야말로 다음의 승리를 보장할 수 있다.
3. 목표는 노력한 만큼의 가치가 있어야 한다.
4. 순응이 항상 원하던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5. 항상 목표를 높게 잡고 안전한 길을 찾기보다는 어려운 것을 추구해야 한다.
■ 용병술
1. 지휘관 대행을 임명하지 않는다. 가장 적임의 부하를 그 자리에 앉히고 그에게 책임과 권한을 준다. 그런 다음 그가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한다.
2. 현명한 지휘관은 절대 운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고된 노동과 힘, 끈기와 긍정적 태도가 보장하는 미래를 믿는다.
3. 현명한 지휘관은 부하들의 행복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숙지해야 한다.
4. 한번 행동을 개시했다면 지휘관들은 무승부가 아닌 승리를 위해 전념해야 한다.
5. 지휘관은 적시에 적절한 질문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
6. 뒤꽁무니에서 말을 달리는 지휘관은 지휘관이 아니다.
7. 무능한 지휘관이 파직될 때, 그의 부하를 그 자리에 임명하지 않는다. 지휘관이 실패했을 때, 부하 지휘관도 마찬가지로 실패한 것이다.
8. 무능한 지휘관 임명의 나쁜 점은 부하들이 그를 권위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으로만 기억하기 때문이다.
9. 뛰어나지 않지만 충성스런 부하를 가까이 한다. 유능하지만 불충한 부하를 멀리한다.
■ 문제와 해결
1. 문제보다는 기회에 초점을 맞추는 법을 배워야 한다.
2. 위대한 지휘관들은 더 중요한 것을 위해 일부에 대한 실패를 받아들인다.
3. 모든 훈족이 자신의 인생의 경험과 지식을 성공으로 발전시킬 의무가 있다. 어떤 민족도 자신이 꺼리는 일을 해 줄 수는 없다.
4. 부하들이 잘 배우도록 하고 잘 가르치는 재주가 있는 지휘관들을 중용한다.
우리나라에서 민족이란 단어는 20세기부터 일본이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설명된다. 특히 미국의 백인 이주 후손인 크리올료(creole)들이 유럽 본토인과 다른 자신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면서 발명된 민족주의에 의해 ‘민족’이란 말이 정의되면서 유럽과 제삼세계로 퍼져나갔다는 분석이다.
이와 같은 민족에 대한 근대적 해석은 국내의 일부 학자들에게도 받아들여져 탈(脫)민족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즉 민족이란 과거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산업사회의 발전과 함께 만들어진 근대적 가치이자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21세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세계가 일일 생활권으로 변모한 현재 케케묵은 민족의 기원을 찾는 것이 왜 중요하느냐고 질문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대답하기 아주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학자들은 각자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전 세계를 통 털어 20세기 최대 사건 중의 하나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에서 공산정권인 들어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련 즉 소비에트 정권의 등장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무장된 공산주의자들이 봉기하여 니콜라이 2세의 전제군주 체제를 무너뜨리고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했다. 소련은 그 후 70여 년간 서방 자본주의 진영과 각축하며 세계를 양분한 공산진영의 영주로 군림했다.
한데 1990년에 이르러 소련체제가 무너지면서 많은 독립 국가들이 탄생했는데 이들 독립국가의 기반이 바로 민족이었다. 수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각각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을 잊지 않았고 더욱이 민족의 개념을 억압하고 말살하려는 전체주의 소련체제 하에서도 민족성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독립국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고 복기대 박사는 지적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던 유태인들은 2천 년 전에 나라를 잃고 조국을 떠나 전 세계로 흩어져 떠돌면서 온갖 박해를 받았지만 결코 유태민족이라는 정체성과 자부심을 잊지 않고 견뎌냈다. 바로 이런 기질과 근성 때문에 불과 몇 백만 명에 불과한 소수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옛 땅으로 돌아가 이스라엘이라는 새 나라를 세웠고 10억 명이 넘는 아랍세계와 당당히 맞서 싸우면서 버티고 있다.
그러므로 민족이란 여전히 어디에서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 한민족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민족이라는 공통분모와 응집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나라가 어떻게 돼 있을지 아무도 정확히 상상해 낼 수 없을 것이다. 중국 주변의 동아시아사를 보더라고 수많은 민족들이 부침과 흥망을 거듭했다. 이런 속에서 대부분의 민족들은 전쟁과 각축 끝에 중국 한족에 동화되거나 소수민족으로 전락했다. 역사 속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민족도 있다. 만주족도 중국 본토를 장악하고 청나라란 대 제국을 건설했었지만 결국 중국에 매몰되어 그 명목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한민족도 수천 년을 내려오면서 무수한 수난을 겪었다. 그러나 만주와 한반도를 근거로 비록 제2차 세계대전 후 국토의 양분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세계의 일원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한민족으로서의 민족정신과 일체감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에 우리 민족이 중국과 일본등 주변국과의 무수한 전쟁에서 피를 흘리며 항쟁할 수 있었던 것도 한민족이란 정체성과 자부심 및 응집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참고적으로 조선에서는 민족이란 단어 대신에 민족을 뜻하는 단어로 ‘아족류(我族類)’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때의 아족류는 ‘우리 민족’ 또는 ‘우리 겨레’의 뜻을 지니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사용되는 ‘아족류’는 일본인이나 여진인 등 이민족과 구분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 이에 비해 일가친척을 뜻하는 말은 ‘족(族)’ 또는 ‘족인(族人)’으로 표기했다.
과거사를 정확히 알려면 타임머신을 타고 올라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시대의 사건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타임머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현재까지의 사료와 유물들을 참조하여 한민족에 관련된 연관성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필자는 한민족의 뿌리 찾기에서 가야?신라의 원류는 북방기마민족이며 이들 중 일부가 서천한 흉노 중에서 375년에 서유럽을 공격했던 훈족임을 밝혔다. 또한 고구려ㆍ신라ㆍ백제ㆍ가야의 원류도 흉노와 다름 아님을 밝혔다.
원래 흉노는 선우라는 수장 중의 수장이 이끌면서 중국인과 당당하게 대항하던 제국이다. 그러나 흉노라는 국가가 워낙 넓은 영토를 확보하면서 수많은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중에서 아시아 동북방에 위치한 고구려는 흉노 속에서 점점 세력을 키워나간 후 독자적인 제국으로 발전한다.
흉노가 여러 국가 또는 부족으로 갈라지자 고구려는 이들을 적절히 활용하여 중국과 당당히 맛서 싸우거나 또는 평화를 유지하면서 제국의 위상을 지켜나갔다. 이러한 고구려의 위상은 ?삼국지?의 주역인 오나라의 천자 손권이 고구려의 동천왕을 흉노의 수장인 선우로 인정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韓民族이 세계 문명사에 기여한 점은 거의 없고, 중국 등으로부터 수혜만 받아왔다는 ‘스몰 콤플렉스(Small complex)’를 가지고 있다. 훈족과 아틸라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는 이러한 콤플렉스를 해소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특히 아틸라가 우리들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은 만큼 더욱 그의 리더십은 우리들에게 큰 의미를 부여할 것으로 생각된다.
4~5세기경, 서양에서는 훈족이 로마제국을 유린했으며, 동양에서는 고구려가 아세아 동북방의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다. 물론 훈족은 고구려보다는 가야(변한) 및 신라(진한)와 더 가까운 관계로 추정되지만, 이들이 모두 한민족이다. 아틸라가 한민족과 친연성을 갖는 선조라고 간주할 때 우리는 4~5세기경 각각 서양과 동양에서 패자로 군림한 당당한 두 선조, 아틸라와 광개토대왕을 얻게 되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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