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들은 고대 한민족의 원류가 어떤 과정을 통해 아시아 대륙의 훈족과 한반도 남부의 가야 및 신라인으로 갈라서게 됐을까 추적했다. 이는 진시황제 때부터 중국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흉노의 흥망성쇠와 연계된다.
흉노는 진나라,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한나라와 중원의 패권을 놓고 장기간에 걸쳐 혈투를 벌였다. 진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한지 10여년 만인 기원전 210년에 사망한다. 후임자인 호해가 등극하였지만 곧바로 항우에게 패하고 진나라는 멸망한다.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놓고 싸운 결과 결국 유방이 승리하고 통일중국인 한나라를 세운다.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북쪽에 있는 흉노는 중국을 견제하고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강대국이었다. 사실상 한나라 역사는 북쪽에 있는 흉노와의 관계라고 할 정도로 때로는 가깝게 때로는 원수와 같이 으르렁 거리면서 지냈다고 볼 수 있다.
유방은 기원전 202년 재위 5년에 비로소 황제로 칭하고 노관을 연(燕)왕으로 봉하는데 노관이 201년, 흉노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유방은 흉노가 갓 태어난 한나라에 큰 골칫거리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흉노를 치기 위해 3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흉노의 묵특선우(冒頓單于 기원전 209~174)를 공격한다.
그러나 기원전 200년, 유방은 백등산에서 일주일간이나 포위된 상태에서 극적으로 구출되는 등 수모를 당하면서 철저하게 패배하고 흉노와 화친을 맺는다. 이 때 흉노와 한이 맺은 화친의 골자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 이 관례는 문제(文帝, 기원전 179~157)때까지 계속되었다.
둘째, 한이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조공을 바친다.
셋째, 한과 흉노가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어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
넷째,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이를 보면 한은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합의는 기원전 198년 가을 한나라 종실의 공주가 흉노에 도착함으로써 실현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양 조정(朝廷)에 왕위 변동이 있을 때는 새로운 혼인으로 동맹을 갱신해 갔다는 점이다. 또 중국이 흉노에 내는 조공의 액수도 한과 흉노 간의 역학 관계에 따라 수시로 변동되었는데 일반적으로 한의 조공 액은 매년 증가되었다. 기원전 192년부터 135년까지 적어도 아홉 차례에 걸쳐 한이 흉노에 대한 조공액을 인상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한이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여하튼 한(漢)은 유방 이후 무제가 집권하기 전까지 60여 년 간 공물과 공주(본래는 황녀를 가리키지만 종실 일족의 딸이나 후궁을 황녀라 속였다)를 보내고 평화를 유지하였다. 중국학자들이야 이런 표현에 반대하겠지만 객관적인 상황으로 보아 맞는 말이다.
그러다가 기원전 57년에 흉노는 동과 서로 양분되어 서로 전쟁을 벌인다. 서흉노의 선우(‘탱리고도선우(撑?孤塗單于)’의 약어로 ‘탱리(撑?)’는 터키-몽골어에서 ‘하늘’을 뜻하는 ‘텡그리(Tengri)’의 음역이며 ‘고도(孤塗)’는 ‘아들’이란 뜻의 흉노의 왕을 뜻한다. 선우의 공식 명칭은 ‘천지가 낳으시고 일월이 정해주신 흉노 대선우’이다)인 질지(?支)가 동흉노의 호한야에게 패하자 일족을 이끌고 우랄산맥 너머 시르다리아 강 중류에 도착한다. 이것이 흉노의 제1차 서천(西遷)이다. 질지는 견곤(추강과 탈라스강 사이)을 수도로 하는 '아정(牙庭)'이란 나라를 세웠다. 서유럽은 이때를 흉노 제국 출현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한편 중국에 후한(後漢)이 들어서면서 세가 불리함을 느낀 남흉노는 48년 고비사막 이남의 8개 집단을 이끌고 광무제(기원전 6년~기원후 57년)를 찾아가 투항했다. 광무제는 투항한 남흉노에게 아예 내몽골 영토를 주어 투항하지 않은 북흉노를 견제하게 했다. 그리고 73년에 이르러 한나라는 남흉노와 연합해 북흉노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패배의 고배를 든 북흉노는 북쪽 막북(漠北)으로 이동하는데, 이것이 흉노의 제2차 서천이다. 북흉노는 서역제국을 장악한 후 그 세력을 규합하면서 한나라와의 대결을 꾀한다.
그러나 한나라는 화제(和帝, 89~105) 원년인 89년에도 남흉노를 규합하여 북흉노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치명상을 입고 사분오열된 북흉노는 대부분 동호(東胡)에서 분리된 선비(鮮卑)에게 예속되었다. 그러나 일부 흉노는 천산산맥 북쪽으로 계속 서진하여 페르가나 분지를 지나 발하시호와 아랄해 사이의 강거(康居) 땅에 이르렀다. 이것이 흉노의 제3차 서천이다.
흉노와 훈족을 연결시키는 또 다른 연결 고리는 한나라 왕조가 붕괴될 무렵에 등장하는 남흉노이다. 304년 당시 산서의 태원에 자리 잡고 있던 유연(劉淵 ?~310)은 진(晉)나라 혜제에 의해 남흉노의 왕으로 책봉된다. 그러나 유연은 과거 선조 중에 한나라의 공주가 있었음을 근거로 자신이 한나라의 후예라고 내세우며 스스로 황제로 칭했다. 그는 308년 태원에서 北漢(前趙)을 세운다. 318년 석륵(石勒 274~333)은 前趙를 폐하고 後趙로 알려진 새로운 흉노국가를 세웠고 349년 석민(石閔)이 後趙의 정권을 잡았다. 석민은 350년 흉노에게 원한이 많은 한인(漢人)들을 부추겨 대대적인 흉노 토벌에 나서도록 한 뒤 무려 20여만의 흉노가 살해되는 것을 방관한다.
흉노로서 이것이 결정적인 패배였다. 중국에 동화된 흉노와 유목생활을 하던 흉노가 연합했음에도 패배하자, 살아남은 흉노들은 새 삶의 터전을 찾아 서쪽으로 도망쳤다. 이것이 흉노의 4차 서천으로, 이들은 이미 1~3차에 걸쳐 서천했던 흉노와 합류(또는 압박)한다. 설상가상으로 370년경부터 혹독한 한파가 엄습하자, 흉노는 보다 서쪽으로의 이동을 단행, 375년에 서유럽을 공격하기에 이르며 이것이 게르만민족 대 이동을 촉발하는 단초가 된다.
한편 한반도 내에서 훈족과의 친연성이 가장 두드러진 지역은 가야와 신라지방인데, 중국과의 전쟁 와중에 훈족의 지배집단 중 일부가 동천(東遷)하여 한반도에 정착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여기서 훈족의 지배집단이란 유목민의 수령(首領)이 속한 부족을 말한다.
학자들은 흉노?동호?선비?오환 등 북방 기마민족들의 흥망이 가야국의 건립시기와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따르면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는 늦어도 1∼3세기까지 마한?진한?변한이라는 삼한이 존재하고 있었다. 3세기 중엽 이후 마한은 백제로, 진한은 신라로 통합되었고 변한은 3세기 이후 가야라는 명칭을 갖게 된다. 이는 3세기말∼4세기 초에 변한이 가야사회로 전환됐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가야란 나라가 신라나 백제와 달리 내부에 다양한 여러 나라들을 포괄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가야의 건립시기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 중엽까지 무려 5세기의 차이를 보이는 등 논란이 많다.
학자들은 경상도 가야고분에서 전형적인 북방 기마민족의 유물이 발견되는 것 자체가 북방 기마민족이 한반도에 정착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특히 금관가야는 흉노가 직접 한반도에 들어와 세웠다는 설도 있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볼 때 흉노 속에 포함됐던 한민족의 일파가 서천하여 훈족으로 성장했고, 또 다른 일파가 동천하여 가야 등으로 성장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결혼 조건으로 로마의 절반 요구〉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대국을 건설한 역사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징기스칸과 알렉산더 대왕, 그리고 아틸라(Attila, 395~453)를 꼽는다. 세계 3대 제국을 건설한 아틸라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보다 20년이 늦은, 훈족이 서유럽을 침공한지 20년이 지난 395년에 문주크 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틸라의 생애는 로마의 역사가 프리스쿠스나 요르다네스에 의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로마는 훈족에 공물을 주어 화친(和親)하면서 게르만족을 견제했다. 이에 따라 당시의 외교 관례대로 아틸라는 410년경부터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가 수도로 삼은 라벤나 궁정에서 자랐다.
434년 아버지의 후임자였던 삼촌 루가가 사망하자. 훈족의 전통에 따라 아틸라는 형 블레다와 함께 왕위에 올랐다. 새 왕으로서 자신들의 힘을 대외적으로 과시할 기회를 노리던 이들은, 동로마가 훈족에게 보내야 할 공물의 납기를 번번이 어기자 435년 동로마로 진격했다. 이에 동로마는 공물을 두 배로 올리기로 약속하고 아틸라와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어 아틸라는 서로마로부터는 서고트인들에 대한 경찰권을 넘겨받는다. 이로서 훈족은 로마제국을 제치고 사실상 서양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443년 블레다가 사망하자 아틸라는 훈족의 단일 지도자가 됐다. 아틸라가 지배한 훈제국의 통치권은 남으로는 발칸 반도, 북으로는 발트해안, 동으로는 우랄산맥, 그리고 서로는 프랑스 땅에 이르는 실로 광활한 영토에 미쳤다. 치하의 종족만 해도 45개 종족에 달했다.
이때 아틸라를 국제적 전쟁에 뛰어들게 한 여인이 등장했다.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인 호노리아가 바로 그 여인. 호노리아는 450년 동생을 황제자리에서 밀어내려는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어 동로마의 수도원으로 추방됐다. 그러자 호노리아는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지내던 아틸라에게 자신의 금반지를 보내어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반지를 보내는 것은 구혼을 뜻했다. 아틸라는 이에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로마제국의 절반을 결혼 지참금으로 요구했다. 그러나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아틸라의 요청을 거절하고 호노리아를 다른 남자와 결혼시켰다.
서로마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아틸라는 451년, 현재의 벨기에와 프랑스의 메츠, 랭스, 오를레앙 등에 이르는 갈리아 지역을 공격했다. 아틸라의 군대가 파죽지세로 서로마 중심지까지 진격했다. 그러자 서로마는 아틸라의 친구이자 ‘최후의 로마인’으로 불리는 아에티우스를 총사령관으로 임명, 훈족과 적대관계에 있는 게르만족들을 규합해 대항했다.
451년 6월 20일, 프랑스의 트루와 시(市)에선 세계 15대 전투 중 하나로 불리는 ‘살롱 대전투’가 벌어졌다. 각각 20〜30여만 명에 이르는 대군이 참전해 20〜30만 명의 전사자를 낳은 대규모 전투였다. 그러나 승부는 나지 않았다.
아틸라는 살롱 대전투 후 판노니아(현재의 헝가리)로 철수했다가 이듬해인 452년 다시 서로마를 침공했다. 이번에는 이탈리아 반도가 표적이 됐다. 아틸라는 아퀼레이아 점령을 시작으로 파두, 베로네, 피비 등 북이탈리아 전역을 휩쓸었다. 당시 훈족의 공격을 피해 해안지역으로 피난한 로마인들이 ‘베니에티암(Veni etiam 나도 여기에 왔다)’이라고 외쳤는데, 베네치아란 지명이 바로 이 말에서 유래했다.
〈허망한 멸망, 유럽의 미움〉
아틸라와 훈족의 종말은 너무나도 허망했다. 453년, 아틸라는 일디코(혹은 힐디코)라 불리는 게르만 제후의 딸과 결혼했는데, 결혼식 다음날 아침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 게르만족의 유명한 대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에는 크림힐트란 이름으로 불리는 일디코가 자신의 가족이 훈족에게 살해된 것에 앙심을 품고 잠든 아틸라를 살해한 것으로 묘사됐다. 그러나 학자들은 아틸라가 결혼식 날 과음으로 질식했거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암투로 살해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강력한 지도자인 아틸라가 죽자 그의 아들인 덴기지크가 훈족의 지도자가 됐다. 그러나 여러 부족으로 구성된 훈제국은 분열하기 시작했고, 469년 동로마에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뒤 역사에서 사라졌다.
동로마에 패배한 훈족의 대다수는 카스피해 북부로 귀향했다. 그러나 일부는 유목생활을 포기하고 러시아 남쪽과 크림 지역에 정착했다. 또 몇몇 부족들은 프랑스와 스위스 지역에 자리잡았다. 이때 훈족의 일부가 발라니아에 잔류했다가 후일 마자르인들과 합쳐 헝가리 민족을 구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트란실바니아(현 루마니아)에 있는 세켈리족은 자신들이 훈족 아틸라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다. 드라큘라 백작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루마니아에서는 아틸라를 강력한 힘을 가진 드라큘라의 원조로 여기고 있다.
아틸라는 엄청난 카리스마를 가진, 세계 역사상 몇 명 되지 않는 지배자 중의 한 명이다. 아이들은 그의 이름에서 연상되는 강력함과 정열, 그리고 거대한 힘에 매력을 느낀다. 아틸라가 파괴와 약탈만 일삼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비감을 더해주기도 한다. 아틸라는 교묘한 협상을 통해 상대로부터 수많은 재보를 얻어내는 외교적 수완도 보였다.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국가인 로마를 상대로 말안장에 앉은 채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으며, 호노리아와의 결혼 지참금으로 서로마의 절반을 달라는 대담성도 보였다.
그러나 아틸라는 동시에 유럽인들로부터 신랄한 비난을 받고 있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유럽의 소설, 연극, 오페라 등에서 잔인한 폭군으로 나오기 일쑤인 것. 단테는 『신곡』〈지옥편〉 ‘제12곡’에서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아틸라를 묘사했다.
1968년 1월 23일 원산 앞바다에서 미국 함선 프에블로호가 나포되었을 때 아틸라는 또 한 번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북한에 나포된 프에블로호 선장 리오드 버쳐는 북한측에 “아틸라 이래 가장 현명치 못한 행동”이라며 사죄했다. 이같이 아틸라가 서양인들로부터 혹독한 비난의 대상이 되는 까닭은 아시아인인 그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의 심장부를 유린하는 등 그들의 자존심을 짓밟았기 때문이다.
아틸라가 단독으로 훈족을 다스린 기간은 10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아틸라는 동시대인들에게 실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아틸라를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아틸라가 다른 정복자들과 달리 당대뿐만 아니라 그의 사망 후에도 어떤 군사지휘자보다 부하로부터 존경을 받았다는 점이다. 학자들은 다양한 민족 출신의 부족들이 아틸라 휘하의 군대에 들어가서 그에게 진정으로 충성을 바쳤다고 믿는다. 특히 학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아틸라 군에서 이탈한 병력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는 점이다. 아에티우스도 서로마 제국의 최고 지도자요 타고난 지휘관으로 수많은 부족을 휘하에 거느렸지만 아에티우스 군에서는 수많은 병력이 이탈했다.
인류 사상 징기스칸, 알렉산더 대왕과 함께 광대한 영토를 기반으로 훈제국을 건설했던 아틸라에 대한 가장 큰 미스터리는 당대의 문명 세계인 로마의 상당 부분을 정복했음에도 직접 통치하려고 시도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로마의 근거지인 이탈리아 본토 공격에 성공했음에도 레오 1세와의 협상에서 자신이 요구하는 것을 모두 얻었다고 판단하자마자 근거지인 판노니아로 돌아갔다. 훈족들은 그들이 점령하거나 공격한 지점이 판노니아에서 아무리 멀다하더라도 겨울을 지내기 위해 판노니아로 돌아간 후 다음해에 다시 출병했다.
아틸라는 정복한 지역에서 자신들이 직접 경작하기 위해 농민들을 쫓아내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농사를 짓도록 권장하기까지 했다. 도시에서도 주민들을 쫓아내지 않았다. 당연히 정복지역의 국가를 해체하지도 않았다. 한 예로 게피다이족은 훈족의 지배 아래서 밀과 보리, 과일 등 농산물을 재배했다.
물론 아틸라가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구축했으면서도 제국을 통치하기 위한 조직적인 행정체계조차 도입하지 않은 이유는 보다 완벽하게 로마를 정복하기 위해서라는 해석도 있다. 아틸라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로마 제국은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을 것이 틀림없으며 그로 인해 세계사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사실 당대의 로마는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는 최강의 국가로 설사 로마시를 점령했다고 해서 곧바로 통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아틸라는 로마의 예봉을 꺾은 후 훈제국의 내부를 먼저 정비하려고 했다. 로마 정복은 훈제국을 완벽히 정비한 후 시도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틸라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것이다. 훈족으로서는 불행한 일이지만 서유럽으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아틸라가 현재까지도 유럽인들에게 강력한 이미지를 발휘하는 것은 짧은 기간 동안 임에도 불구하고 훈제국을 하나로 통일한 후 여러 차례에 걸친 군사 원정을 통해 훈족을 세계 무대에 올려놓는 데는 성공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틸라가 로마제국과 동등한 위치에서 대결할 수 있게 된 것은 아틸라 자신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그의 윗대 선조들의 업적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틸라처럼 서양인들과 맞서 동양인의 기개를 보여 준 사람은 별로 없다.
일반적으로 아시아인으로 유럽을 침공하는데 성공한 인물로는 다리우스 1세, 아틸라, 징기스칸을 꼽는다. 그러나 다리우스 1세는 유럽의 발칸반도에 침공했으나 정복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하고 철수했으며, 징기스칸의 손자 바투는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의 군대를 격파한 후 유럽을 진공하기 직전에 원나라 태종(오고타이)이 사망하는 바람에 공격을 중지하고 철수한다. 바투에게는 유럽에 대한 공격보다 오고타이의 후계자를 결정하는 문제가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현재의 유럽의 중심지라고 볼 수 있는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지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틸라는 독일,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의 거의 전 지역을 점령하여 사실상 로마제국을 제치고 유럽의 패자가 되었다. 아틸라가 훈족의 단독지배자가 된 기간도 단 8년. 아틸라에 대한 전설이 계속 쌓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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