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을 놓친 비운의 천재들/필로 판즈워스

텔레비전 발명, 불운의 대명사 필로 판즈워스(2)

Que sais 2020. 10. 18.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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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보다 먼저 개발된 TV>

한편 목소리를 전달하는 라디오가 개발되자 목소리와 음악을 내는 장면을 직접 보고자 하는 욕망이 나타났다. 이것이 바로 TV가 발명된 동기이다.

사실 TV의 원리전화나 라디오보다 오히려 먼저 알려져 있었다. 1817스웨덴의 과학자 베르셀리우스(Jones Jacob Berzelius)셀레늄(selenium, 원자기호 Se)이라는 원소를 우연히 발견했다. 셀레늄은 빛이 닿으면 전류가 흐르는데다가 빛의 강약에 따라 전류의 세기도 달라지는 특성을 갖고 있다. 더구나 전류가 흐르면 빛이 발생하는 것은 물론 전류의 강약에 따라 빛의 강약도 달라진다. 셀레늄의 이런 성질을 이용한 것이 광전지, 오늘날 전자시계나 전자계산기 등에 붙어 있는 태양전지들은 모두 셀레늄과 대동소이한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다.

TV의 원리사진기의 필름 부분에 필름 대신 수많은 셀레늄 조각으로 만들어진 판을 설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셀레늄 판에 전선을 연결한 후 어떤 물체를 찍으면 그 물체의 윤곽은 셀레늄 판에 비치게 되며 각각의 셀레늄 조각은 자신이 받은 빛에 따라 세기다른 전류가 흐르게 된다. 이 전류를 다른 셀레늄 판에 연결시키면 이 판의 셀레늄 조각전류의 세기에 따라 밝고 흐린 빛을 발생하게 된다. 사진기 부분에서는 빛이 전류발생시키고 수상기 부분에서는 전류빛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찍은 물체의 윤곽수상기 부분에 그대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1875미국의 조지 케리(George Carey)그림모자이크와 같이 분해한 후 전기로 전송하고 수신 측에서는 다시 조립하여 원래의 상을 만드는 방법을 개발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이 TV의 출발이다.

 

1880에는 미국W. E. 소이어(W. E. Sayer)프랑스모리스 르블랑(Morrice LeBlance)방송에 필요한 모든 형태의 작동원리발표했다. 그들은 개별적인 회로에 의지하는 대신에 사진의 각 요소들이 선에서 선으로, 프레임에서 프레임으로 신속히 주사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사람의 눈이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최종적인 영상은 흑백의 연속된 점이 아닌 일관된 전체 영상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는 움직이는 화상송신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TV가 되기 위해서는 1초당 수십 개의 화상을 송신해야 하는데, 셀레늄 광전지만으로는 반응 속도가 너무나 느리기 때문이다. 전화기의 발명자인 등 여러 사람도 비슷한 시도를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이때 독일파울 닙코(Paul Nipkow)1884 전기 신호를 영상으로 바꿀 수 있는 닙코 원판이라는 초보적인 장치를 발명하여 TV현실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주사원판 또는 닙코 원판은 회전하는 원판에 작은 구멍을 뚫어서 물체를 주사(走査)하고 이 구멍을 통과한 빛이 셀레늄 광전지에 전기를 일으켜서 영상을 복원하는 방식이었다.

브라운관을 사용하는 오늘의 전자식 TV와는 원리도 다르고 화질도 매우 조악한 수준이었지만 닙코 원판을 빠르게 회전시키면 그런 대로 움직이는 영상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러나 닙코의 TV를 실용화하는 데는 송신상의 문제점이 있었다. 역시 셀레늄이 빛의 변화에 너무 늦게 반응하므로 광전도체에 적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1913 독일의 과학자들이 칼륨수소화물을 입힌 개발했는데 이것은 빛에 극히 민감하고 빛의 빠른 변화를 따라 잡을 수 있었다. 드디어 실용성 있는 TV가 나올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TV는 효율적인 송신기와 수신기가 함께 접합되어야 한다.

1897 독일의 발명가칼 페르디난트 브라운(Karl Ferdinad Braun)음극선관과 형광스크린에 기초한 초기 수신기를 개발했다. 음극선관은 전기신호를 화면 위의 패턴으로 전환시키는 전자관으로 TV수신기의 기초가 된다. 전기 광선이 관을 통과해 스크린에 부딪히면 이에 반응해 눈으로 볼 수 있는 빛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1907 러시아의 과학자 보리스 로징(Boris Rosing)은 송신기의 끝에서 작동하는 원통형 거울 스캐너를 도입함으로서 브라운의 발명품개선시켰다. 이 방법을 사용하자 기하학적으로 조악하나마 몇 개의 영상을 전송하고 재생할 수 있었다.

다음에 스코틀랜드의 전기기술자 캠벨 스윈턴(A. A. Campbell Swinton)근대 TV의 기본이 되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는 카메라와 송신기 끝에 음극선관을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전송되는 화상을 화면에 집중시키면 화면 뒤로 향하는 음극선이 투사되어 순차적으로 선을 그려나간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제안은 실패했다. 당시에는 그의 구상을 실현시킬 만한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에 중요한 발명은 미국의 기술자 대니얼 맥패런 무어(Daniel McParlan Moore)네온가스 방전 램프이다. 무어네온램프에 투입되는 전기의 양을 조절함으로써 빛의 밝기변화시킬 수 있었다.

 

<TV의 선임 발명자>

엄밀한 의미에서 실용적인 TV 개념을 도출한 사람은 영국의 존 베어드(John Logie Baird, 18881946)이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헬렌즈버그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베어드는 소년시절부터 영리하여 성적이 우수한 것은 물론 운동하는 기계를 만드는데 소질이 있었다. 그 당시 그레이엄 벨전화를 발명한 지 이미 25이 지났으나 글라스고우에는 아직 전화를 가설한 집이 없었다. 베어드1900과학잡지에 실린 전화기의 원리와 내부의 설계도면을 읽고 간이 전화기를 만들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전화기 만들기에 성공한 소년 베어드과학잡지에 실려있는 발전기, 사진기, 글라이더 등의 원리를 연구하여 실제 만들어 보기도 했다.

글라스고우의 라크필드 학교를 졸업한 후 1905글라스고우 왕립공과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그는 대학에서 훗날 TV를 발명하는데 결정적 동기가 된 수수께끼의 금속셀레늄을 연구했다. 그러나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연구를 계속할 무렵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연구는 중단되고 비누, 젤리, 사탕 등의 사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하여 구두약과 면도날판매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마침 전파를 타고 라디오 방송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자신에게 큰 임무가 주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소리만 보내는 라디오 방송이 가능하다면 형체와 모양까지 보낼 수 있는 방송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헤이스팅스 항구 도시로 이사한 다음 조그마한 다락방을 개조하고 연구실을 차렸다. 그가 중점으로 연구하는 것은 독일 과학자 닙코가 발명한 닙코식 주사원판(走査圓板)과 인형을 셀레늄을 사용하여 빛의 강약을 변화시켜 스크린에 인형이 비추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베어드 닙코 원판1분에 600번 회전시켜 동화상을 복원했는데, 한꺼번에 모든 화면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씩 순서대로 옮겨 시각 잔상 효과를 이용하여 연속되는 화면을 만들 수 있었다.

베어드1925복화술(複話術) 인형을 희미하게나마 송신하는데 성공하였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라디오, TV가 발명된 것이다. 19261에는 영국왕립과학협회50여명 과학자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TV 공개 시험에도 했다. 주사선이 30개인 베어드의 새로운 TV 모델이 발명되었다는 소문은 소매상점인 셀프리지 백화점까지 미쳤다.

셀프리지 백화점1주일에 20파운드를 줄테니 발명품을 백화점에 전시해달라고 베어드에게 제안했다. 1926126 텔레비전은 마침내 대중 앞에 섰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비록 화면은 작고 어두워서 영상이 겨우 보일 정도였으나 하루 3번 전시되는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백화점 앞에 줄을 섰다. 당치 최초의 텔레비전 스타이란 인형이었다.

베어드부족한 점을 보완하거 개량하여 1926년 영국의 왕립협회에서 텔레비전공개 실험했다. 주사선이 30개인 베어드의 TVBBC 방송을 통해 1927 런던에서 글라스고우까지 방영하는데 성공했고 1928에는 런던에서 뉴욕까지 방영하는 데 성공했다.

영국 BBC방송베어드가 발명한 텔레비전을 이용해 세계 최초로 TV 방송을 실시한 것은 1929930이었다. 베어드는 텔레비전의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연극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했는데 특히 경마 중계방송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베어드의 TV는 문제점이 있었다. 지금과 같은 전자식 TV가 아니라 기계식이었기 때문에 닙코 원판의 회전으로 생기는 영상의 깜빡임을 어느 한계 이상 개선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곧바로 초기에 TV를 만들려다가 실패하였던 벨연구소에서 베어드의 기계식전자식으로 전환시키는 방법을 개발하였다. 베어드에게 뜻하지 않은 강적이 나타난 것이다.

베어드TV가 기계식에서 전자식으로 바뀌자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는 TV 연구와 입체 TV, 영화 화면에 TV 영상을 투사하는 연구를 계속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으로 TV시대가 곧 도래할 것을 예견하면서 1946년에 사망하였다. 그가 사망하자마자 그의 예견대로 세계는 TV 시대로 들어갔다.

베어드TV의 기본을 도출했음에도 그를 진정한 TV의 발명자로 대우하지 않는 것은 그가 기계식으로 TV를 만들었기 때문으로 현대의 TV는 이후 개발된 전자식으로 운용되기 때문이다. 전자식 TV는 기계식보다 시각적인 선명도가 매우 우수하므로 오늘날의 TV는 모두 전자식으로 방영된다. TV의 탄생에 결정적인 디딤돌을 놓은 베어드는 사망할 당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목사인 나의 아버지는 내가 성직자가 되어 후계자가 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나는 과학자의 길을 선택했다. 내가 걸어온 길은 역경과 파란의 길이었다. 그렇지만 TV의 발명이라는 업적을 남겨 인류에 다소라도 헌신하였다고 생각할 때 내 인생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불운의 대명사 판스워즈>

TV를 현대인들이 볼 수 있게 된 것은 궁극적으로 필로 판즈워즈(Philo Farnsworth, 1907?1971)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TV를 발명한 발명자라기보다는 비운의 발명가로 더욱 유명하며 전세계 지구인들의 필수품인 TV를 개발했음에도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레슬리 앨런 호비츠판스워즈야말로 역사상 가장 가난하게 태어난 발명가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 유타의 오두막에서 태어나 191911아이다호의 농장으로 이사했는데 그곳에서 처음으로 전기를 보았을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다. 그때까지 그는 책에서만 전기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전기에 대한 재주는 천부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농장 주변에 방치되어 있는 부품을 조립하면서 세탁기와 농기구에 쓸 모터를 만들었는데 그가 만든 기계가 무려 60여개나 되었다.

그는 기계를 조립하면서 틈틈이 아인슈타인의 이론 등이 나온 과학책과 잡지들을 빌려서 보았는데 어느 날 잡지에서 공중을 날아다니는 사진이라는 제목의 미래 세계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저자는 전 세계의 집으로 화면과 소리를 동시에 전송할 수 있는 라디오와 영화를 합쳐놓은 기계를 상상해서 적었다.

날아다니는 사진이라는 말에 매혹된 판스워즈는 자신이 이 분야를 개척해야 할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고 믿었다. 그는 우선 날아다니는 사진에 대해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앞에 설명한 사람들의 TV에 대한 기초 연구는 알려졌으나 회전하는 원판과 거울을 이용해서 빛을 전기로 전환시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원판의 회전속도가 너무 느려 일관된 상을 전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쟁기질 하면서 이랑을 따라 감자를 캐나가듯전자를 이용영상을 한 줄 한 줄 스캔할 수 있다면 TV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현재로서는 지극히 단순한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가 이런 생각을 떠올린 것은 1920년대 초이며 그것도 그의 나이가 고작 14이라는 점이다. 사실 그가 감자밭에서 떠오른 이 원리가 오늘날 TV의 기초적 원리이다.

아이디어를 떠 올리기는 했지만 그는 그야말로 가난한 학생이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TV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으므로 함부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발설한다면 누군가가 이를 도용할 우려가 많았다. 그에게는 자금과 비밀을 보장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는 고등학교 화학선생저스틴 톨만(Justin Tolman)에게 이야기를 했다. 톨만 선생판즈워스의 말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전자 TV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는 것을 파악했다. 두 사람은 곧바로 판즈워스의 생각을 구체화하기 시작했고 판즈워스의 생각이 구체화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었다.

그런데 판즈워스는 더 이상 생계를 꾸릴 수 없으므로 유타주 프로브 인근가드너가의 농장으로 옮기게 되어, 더 이상 TV 개발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다행하게도 고등학교 때 공부를 잘 하여 가난하지만 브링검영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아버지사망하자 가족을 부양해야 하므로 학교마저 중퇴해야 했다. TV 개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판즈워스클리프 가드너와 통신교육으로 라디오 수리 과정을 이수한 후 1926부터 라디오 설비와 수리 사업을 시작했다. 그들의 사업은 신통치 않았다.

그런데 그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태평양 연안의 일부 부유층으로부터 기금을 모집하던 조지 에버슨(George Everson)을 만나 자신의 아이디어설명할 수 있었다. 이때가 그의 나이 19였다.

에버슨판즈워스의 설명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존 베어드가 움직이는 사진전기를 이용해 전송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 사진은 초당 10회 반복되었고 서른 개의 줄로 구성되었는데 결과는 조악하지만 기계적인 시스템은 작동했다. 그런데 그런대로 TV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200개 이상의 줄이 있어야 했다.

판즈워스존 베어드가 발명한 기계의 단점을 지적했다. 전자를 이용하지 않는 연속된 주사는 원통형 거울이나 렌즈가 있는 원판 따위의 기계 장치에 의존했는데 그것으로는 감도가 떨어진다는 것을 확실하게 설명했다.

에버슨판스워스가 기계의 모형을 제작하는데 5천 달러필요하다고하자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며 6천 달러투자했다. 자금이 확보되자 그는 클리프 가드너의 동생 펨과 결혼하고 함께 솔트레이크 시티의 연구실에서 TV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보호할 장치를 잊지 않고 19271특허를 출원했다. 특허청은 이 장치가 제대로 작동한다는 것을 입증할 때까지 특허권을 유보한다고 통고했다.

판즈워스세계 최초의 전자식 TV해상관(Image Dissector) 개발에 몰두했다. 그의 기계는 영상을 독립적인 요소들로 분해한 뒤 각 요소를 한꺼번에 한 줄씩 전기신호전환하는 것이다.

그는 세슘해상관의 광전 표면에 발랐다. 세슘을 선택한 것은 세슘빛에 노출되었을 때 전자를 방출하기 때문이다. TV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다른 종류의 음극선관필요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냉음극선관발명했다. 냉음극선관은 일반적인 음극선과는 달리 가열되지 않고도 화면에 전기신호를 투사할 수 있었다. 또한 TV수신기도 만들었는데 그는 이를 이미지오실라이트(Image Oscillite)'라 명명했다.

1927 투자자인 에버슨이 참석한 자리에서 자신의 발명품을 작동시켰다. 그들은 판즈워스와 가드너가 작동시키는 움직이는 동작을 볼 수 있었다.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전송되는 최초의 전자식 TV 영상을 본 것이다. 판즈워스는 자신의 발명품을 설명하면서 간단하게 말했다.

 

봐요. 전자식 TV가 성공했죠?”

 

판즈워스의 방법은 앞에서 설명한대로 자기전자 빔굴절시켜 영상을 한 번에 한 줄씩 전송함으로써 해상도를 높이는 장치를 만든 것이다. 이 원리는 현대의 아날로그 TV에 적용되는 방식 그대로이다. 판즈워스최초의 영상에 성공한 당일 연구실 일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번에는 수신된 영상에서 선이 뚜렷하게 보였다.”

 

투자자인 에버슨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동업자인 고렐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쳤다.

 

세상에. 그 물건이 작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