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을 놓친 비운의 천재들/필로 판즈워스

텔레비전 발명, 불운의 대명사 필로 판즈워스(3)

Que sais 2020. 10. 18.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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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을 잘못 선 발명가>

판즈워스의 발명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다음해부터다. <샌프란시스> 신문은 192893일자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SFTV에 혁명을 일으켰다. (중략) 해상관은 주부들이 과일을 보관할 때 사용하는 1쿼터짜리 항아리 크기. 푸르스름한 불빛 속에 기이한 형태의 선이 자주 흐릿해지곤 하지만 기본원리는 찾아내었으므로 앞으로 얼마나 완성도를 높이는가가 관건이다.’

 

판즈워스가 발명한 전자식의 중요성을 간파하지 못한 그들이 계속 기계식 TV개발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당시 거대 기업인 RCA(Radio Corporation of America)의 부사장겸 총 지배인인 데이비드 사르노프(David Sarnoff)는 다른 경쟁자들이 나타나기 전에 화상과 라디오를 결합시킨 새로운 장치의 특허권을 손에 넣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전략은 다른 사람과 달랐다. 그는 라디오에 대한 RCA의 특허기간이 곧바로 끝나기 전에 RCA회사라디오최대한의 이익을 뽑아내려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그의 아이디어는 간단했다.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혁신을 가져올 TV가 곧바로 시판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사람들은 라디오를 구입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TV가 나오면 곧바로 사겠다고 돈을 저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판즈워스의 특허권을 구입하여 TV 개발장기간 지연시키고 라디오 사업을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자신이 직접 TV회사를 발족시키겠다는 구상도 병행했다.

그러면서 사르노프1923년에 아이코노스코프(Iconoscope)'라 불리는 해상관에 관한 특허를 출원러시아태생의 기술자 블라디미르 즈보리킨(Vladimir Kosan Zworykin)1930년에 용역 계약을 맺었다.

페테르스부르크 대학보리스 로싱 교수제자 즈보리킨판스워스보다 2년 뒤인 1929전자식 TV수신기를 만들었지만 성능은 형편없었다. 원인즈보리킨의 수상관프레임당 40 내지 50밖에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즈보리킨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판즈워스를 찾아갔다. 이것이 판즈워스의 불행을 예약하는 단초였다.

즈보리킨판즈워스에게 자신의 고용주가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고 TV에 관심 있는 기술자라고 하자 판즈워스3일간이나 즈보리킨이 연구실에서 연구의 주요 기밀 사항을 충분히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RCA 연구실로 돌아온 즈보리킨은 곧바로 판즈워스의 발명품모방하려고 했으나 1년이 가도록 성과를 낼 수 없었다. 사르노프가 무려 10만 달러즈보리킨에게 투자한 뒤였다.

사르노프즈보리킨이 계속 실패하자 판즈워스의 특허를 사려고 했다. 그는 판즈워스와 동업자인 에버슨에게 모든 권리를 당시로서는 거금인 10만 달러RCA팔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발명품의 미래를 알고 있는 판즈워스사르노프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런데 판즈워스에게 일은 이때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판즈워스의 TV는 점점 성능이 개발되었지만 판즈워스와 에버슨은 독자적으로 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자금이 부족하므로 라디오 사업을 했던 필코와 동업계약을 했다. 하지만 필코의 약점은 당시의 거대 기업인 RCA, AT&T, 제너럴 일렉트릭에 비해서는 규모도 작고 전자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았다.

1933년 판즈워스미국통신협회(FCC)로부터 TV 무선전송실험을 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곧바로 판즈워스미키마우스 만화영화성공적으로 송출했다.

판즈워스의 성공에 자극 받은 사르노프는 초창기 TV산업에서 선점하지 않으면 회사의 운명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즈보리킨재촉하여 120줄짜리 전자식 TV를 시연한 후 TV의 선점즈보리킨에 있다고 선언했다. RCA즈보리킨1923출원한 것과 동일한 원리로 TV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TV의 발명자는 판즈워스가 아니라 즈보리킨이라고 주장했다.

사르노프의 공세는 더욱 거세 TV 세트의 생산권과 관련해 판즈워스에게 로열티를 지불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선언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RCA에서는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는다. 우리가 로열티를 받아야 한다.’

 

판즈워스가 발끈한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고 TV를 실제로 발명한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처절한 법정 논쟁이 일어났다. 누가 보아도 RCA가 무리수를 두는 것이 틀림없었다. 즈보리킨1923특허를 제출했지만 그 당시 제대로 작동되는 TV를 만들었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판즈워스는 고등학교 때 화학선생 톨만과 함께 전자식 TV개발했다고 증언하자 RCA판정패하고 특허청1934년에 판즈워스에게 특허의 우선권을 부여했다. RCA는 끝까지 판즈워스를 물고 늘어져 소송을 질질 끌다가 드디어 판즈워스에게 로열티를 지급하는데 동의했다. 그동안 사르노프는 자신의 전략대로 TV 송출을 늦추면서 라디오최대한의 소을 올렸다.

판즈워스와 공룡 기업 RCA와의 싸움판즈워스에게 악몽이었다. 자금에서 불리한 판즈워스는 소송하는 동안 금전적인 손실은 물론 건강마저 나빠졌다. 1935에 드디어 독일에서 180줄 영상으로 세계 최초로 TV 송출이 이루어졌고 193611월 영국방송공사(BBC)가 하루에 두 시간씩 TV 방송을 시작했다. 1937BBC조지 6세 대관식 실황보도는 약 5만 명의 시청자에 의해 시청했다.

 

미국은 출발이 다소 늦어 19394, 수십만의 인파가 뉴욕시 플러슁메도우에서 열린 뉴욕세계박람회개막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박람회의 주제는 내일의 세계였는데 관객들을 새로운 장비로 무장한 여러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바로 NBC방송의 텔레비전 카메라맨이었고 이들에 의해 루즈벨트 미국대통령이 출연한 미국 최초의 정규 텔레비전방송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대의 언론은 매우 싸늘했다. 뉴욕타임스의 기사로도 알 수 있다.

 

TV의 문제점은 그것을 보려면 사람들이 자리에 눌러앉아 화면을 계속 응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미국의 평균적인 가정형편을 살펴보면 그렇게 장시간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을 만큼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다른 것은 따질 것 없이 단지 그 이유만으로도 TV라디오의 경쟁상대가 되기 어려울 것이다.’

 

에디 캔더는 더욱 시니컬한 말을 쏟아 부었다.

 

‘TV 앞에 가만히 앉아보니 정말 최악의 허접 쓰레기만 잔뜩 모아 놓았다. 이런 쓸데없는 것들을 만드는 프로듀서의 마음에는 오직 한가지 말밖에 없을 것이다. “싸구려 있어.”’

 

물론 TV호의적인 언론인들도 있었다. 그루초 막스는 다음과 같이 기대적인 글을 섰다.

 

나는 매일 밤 이 흥겨운 주연을 즐기고 있다. 피곤하기는 하지만 TV가 갖고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보면 환상적인 느낌이 든다. 이 괴물 대신에 라디오를 얼마나 더 듣게 될지 나 자신도 의심스럽다.’

 

TV가 정규방송으로 송출되자 승승장구하는 것이 시간문제라고 생각되었는데 역시 판즈워스불운의 사나이였다. RCATV를 송출하자마자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TV 사업이 곤두박질한 것이다. 판즈워스에 돌아가는 특허료도 형편없음은 물론이다.

 

이것이 RCA에게는 호기였다. TV 방송이 출발되자마자 발발한 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하여 민생용 TV의 연구, 개발은 한때 중단되었지만 뜻밖에도 2차 세계대전은 오히려 TV가 폭발적으로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TV 방송에서 사용되는 초단파전쟁 중에 군용 통신에서도 사용하게 되자 에서 TV 보급의 가장 큰 난제의 하나인 안테나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전쟁시 사용하던 레이더용 안테나가 바로 TV의 안테나로 이용되었고 전직 레이더 기술자들은 TV관련 기술자로 변신하면서 TV의 대중화에 더욱 기여했다. 더구나 전쟁이 끝날 무렵 판즈워스의 핵심 특허권소멸되자 RCA판즈워스에게 특허료를 지불하지 않고 마음껏 TV방영을 할 수 있었다.

1945 전쟁이 끝났을 때 미국 가정에는 불과 5,000여대만이 판매되었고 1947에 고작 6,000대의 TV수상기를 판매되었다. 그럴만도 한 것이 당시에 TV 한 대 값자동차 시보레와 맞먹는 700달러였다.

그런데 RCA의 주가를 높인 것TV의 영향력을 주목한 광고매체각종 방송국이었다. TV에서 상업적으로 방송광고가 나가고 제품들이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자 방송국들이 속속 태어났는데 194716개의 방송국1940년대 말에 무려 107개로 늘어났다. 1940년대 말 TV 광고 비용2억달러나 달했다.

여기에 RCATV 수상기 값을 파격적으로 내리자 1950년대 중반에 이미 미국 시장의 80퍼센트 이상을 점유하면서 수백 만 대의 수상기를 판매했다. 1951 공전의 흥행에 성공한 왈가닥 루시(I love Lucy)가 처음 방영될 때 1,100만대TV가 미국에 보급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 프로 덕분에 영화관객40퍼센트나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RCA가 승승장구했지만 RCA는 계속적으로 판즈워스가 아니라 즈보리킨TV 발명자라고 계속 선전했다. 더욱 판즈워스에게 불행한 것은 자신의 회사를 다른 회사에 팔았는데 그 회사가 RCA에 밀려 TV사업완전히 포기했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라디오가 가정의 필수품이 되기까지는 두 세대(50)가 걸렸다. 그러나 TV한 세대(25)도 지나지 않아 이미 가정의 필수품이 되었다. 이와 같이 TV가 급격하게 보급된 것은 과학의 발전으로 시청자를 전지구상의 사건들에 즉각 가까이 접하게 함으로써 시청자들의 시야를 넓혀주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전혀 새로운 동시성의 세계. 과거의 잣대로 보면 시간은 정지되었고 공간’도 정지되었다고 마샬 맥루안은 적었다.

TV현대의 사회구조혁혁한 변화를 갖고 왔다. 정치집회, 의회, 청문회, 국제회의는 물론 각종 재해 사건 등이 실시간으로 시청자들에게 전달된다. 정치가들이 TV를 통해 만들어지거나 몰락하고 때로는 부활한다. 끊임없는 광고의 물결소비욕구를 선동하고 세계 오지의 참상이 시청자들의 양심을 흔들어놓기도 한다.

이제 TV는 우리가 좋아하건 말건 우리 생활의 상당 부분을 흡수하면서 웃고 울리는 세상이 되었다. 이것은 앞으로도 TV가 우리 사회의 더욱 많은 영역을 침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TV가 없는 세상은 이제 상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판즈워스의 말년비극이었다. 그는 RCA의 처사에 충격을 받아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으로 고통 받았고 1947에는 집이 화재로 전소되었을 정도이다. 레슬리 앨런 호비츠10년 후 판즈워스나는 비밀이 있어요라는 TV프로그램초대되었다고 적었다. 그는 X박사로 소개되었다. TV프로그램은 패널들이 출연자에게 질문하고 그의 대답에 따라 그가 살아오면서 어떤 일을 했는지를 맞추는 것이었다. 패널 중 한 명판즈워스에게 사용할 때마다 고통스러운 기계를 발명한 적이 있느냐고 질문했다. 그는 . 가끔씩 너무나도 고통스럽죠라고 대답했다. 판즈워스1971에 무명으로 사망했는데 사르노프도 같은 해에 사망했다.

TV와 같은 문명의 이기를 발명한 판스워즈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에디슨과 테슬라의 혈투와도 관련이 된다. 두 사람의 혈투가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자 노벨상위원회공학 분야 발명자에게는 노벨상 수여를 자제했다. 실제로 노벨상진정한 공학자에게 수여된 것은 1979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하운스필드(Sir Godfrey N. Hounsfield)로 알려진다.

원자핵 물리학자 코맥(Allan M. Cormack) 박사는 병원에서 방사선 치료를 하는 방법을 본 후 생체와 같은 각 부분에서 흡수도가 다르므로 각 점에서의 흡수율을 계산하는 공식을 알면 컴퓨터를 이용하여 화면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놀랍게도 그가 원하는 수학 공식1825부터 알려져 있었다.

코맥은 이 문제를 더욱 일반화하여, 단면이 원형으로 되지 않는, 회전에 대해 비대칭인 물체에 대한 식을 해석하여 1963년과 1964년에 발표하였다. 이것이 CT스캐너가 개발될 수 있는 원리로 이를 연구원이나 교수가 아닌 회사의 중역으로 엔지니어인 하운스필드제작에 성공하여 이들은 1979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엄격하게 수상자를 심사하기로 유명한 노벨상수상위원회에서 엉뚱한 사람을 수상자로 선정했다는 구설수도 나왔으나 그는 19581959영국 최초로 개발된 트랜지스터 컴퓨터 에미덱(EMIDEC) 1100을 제작한 설계 팀을 지휘한 경력이 있었다.

더불어 이미 과학사에 획기적인 기여를 한 측정장치기자재를 개발한 공로로 노벨상을 계속 수여했으므로 그들과 같은 대우를 받은 것이다. 그가 제작한 CT스캐너가 현재 인간에게 얼마나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노벨상의 수상이 결코 무리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지만 여하튼 공학자노벨상을 수여받게 된 것은 대체로 그의 수상 이후로 생각한다.

판스워스와 하운스필드를 비교하면 누가 보다 인류에 큰 영향을 미쳤는지 가늠할 수 없다고 하겠지만 판스워스하운스필드노벨상을 수상할 때 이미 사망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