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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첫째 부인 천재과학자 밀레바>
아인슈타인의 업적에 대해서는 워낙 많은 자료들이 있지만 아인슈타인에 부정적인 자료도 예상보다 많다. 우선 아인슈타인에게는 모욕적으로 들리겠지만 그의 상대성이론은 원래 다른 사람의 업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 주인공은 아인슈타인의 첫째 부인이었던 천재과학자 밀레바를 뜻한다.
취리히 공과대학에 입학한 아인슈타인은 1896년 그보다 4살 연상으로 수학과 과학부에 입학한 밀레바 마리치를 만났다. 밀레바는 세르비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고등학교 시절부터 수학과 과학에 탁월한 재주를 보여 당시 자연과학의 중심지 중에 하나인 스위스로 유학 왔다. 그녀가 스위스에 유학 온 것은 여자도 졸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밀레바는 당시로서는 소위 속물적인 근성이 없는 아인슈타인과 같은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밀레바는 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수학에 관한 토론과 공부를 통해 1903년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했다. 그들의 결혼이 늦어진 것은 아인슈타인의 어머니가 강력하게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들보다 세 살 위인 밀레바가 너무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다. 또한 지나치게 똑똑한 여자인 것도 싫어했다. 어머니는 그에게 “그 애는 너처럼 책 같은 애잖니. 네겐 여자가 필요해”라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통속적인 이런 견해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결혼을 미루었다.
그러나 밀레바가 아이를 가졌다. 임신 사실을 안 밀레바는 수학자로서의 성공을 포기하고 고향 세르비아로 돌아가 아무도 모르게 1902년 1월 아인슈타인의 딸 리셀을 낳았고 1903년에 결혼한 것이다. 리셀은 2살 때 사망했다.
그러나 밀레바가 현대과학사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밀레바가 과학도로서의 꿈을 접고 아인슈타인의 연구를 도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인슈타인의 동료가 아니라 아내였으므로 남편이 유명해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현대학자들은 1890년대부터 아인슈타인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1905년에 발표한 세 가지 주요 발견(상대성이론, 광전효과, 브라운 운동)의 진짜 주인공은 아인슈타인이 아니라 바로 그의 아내인 밀레바라는 주장을 피기도 한다.
이런 주장은 대학시절 아인슈타인은 밀레바와 함께 당시의 최첨단 물리학을 연구했는데 밀레바는 특히 아인슈타인이 취약했던 수학에 능통해 대학 때 동료인 그로스만과 함께 상대성이론이 갖고 있는 복잡한 수학문제를 풀어준 장본인으로 알려지기 때문이다.
밀레바는 또한 1897년부터 1898년까지 하이델베르크에 머물면서 필립 레나드의 영향을 받고 ‘분자의 운동과 충돌로 이동한 경로 사이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아인슈타인에게 편지로 보냈는데 그것이 이후 아인슈타인의 브라운 운동에 대한 연구의 출발점이라고 추정된다.
밀레바가 아인슈타인의 과학 연구에서 보인 역할은 아인슈타인이 그녀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97년 대학에서 만났을 때부터 두 사람의 결혼 직후까지 주고받았던 편지는 모두 54통이다.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은 움직이는 물체의 전자기학에 관한 연구를 언급하면서 상대성 운동에 관해 ‘우리의 이론’ 또는 ‘우리의 연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또한 그는 노벨상을 받으면 그 상금 전액을 밀레바에게 주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이는 상대성이론에 대한 밀레바의 공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정한다. 아인슈타인은 그 약속을 모두 지키지는 않고 절반을 지급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아인슈타인이 점점 유명해지면서 벌어지기 시작하여 1913년 별거에 들어갔고 1919년에 이혼했다. 밀레바는 아인슈타인의 두 아들을 키우다가 1948년에 사망했다.
20세기의 최대 과학자라는 아인슈타인의 사생활과 창의성에 따라다니는 루머는 과학자들을 매우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가장 큰 지적은 이미 설명한 상대성이론을 비롯한 물리학적 연구의 상당 부분을 아내 밀레바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그의 비인간적인 면모로 결혼 전에 비밀리에 딸을 얻었는데 그 사실을 끝까지 숨겼고 두 번째 결혼인 사촌 엘자와의 결혼도 비극으로 몰고 갔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사회와 동떨어져 고독하게 자연에 대한 탐구를 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과학자 개인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많은 과학적 업적이 과학자 당사자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들의 조언과 협조로 이루어 낸 노력의 결집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동료이자 천재과학자였던 밀레바의 도움을 얻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아인슈타인이 자신이 받은 학문적 도움을 끝까지 표현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일반적으로 논문의 말미에 첨가하는 참고문헌과 감사의 글은 논문이 나오기까지 도움을 준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한 장치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이를 비밀로 부쳤다. 아인슈타인이 밀레바의 도움을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고 밀레바도 남편에 대한 공헌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밀레바와 아인슈타인의 관계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지금까지 선한 측면만 부각되 신격화된 아인슈타인의 이미지가 ‘뒤틀려진 아인슈타인’으로 변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대부분의 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을 옹호한다. 과학자란 도덕적 인간성을 갖춘 모든 면에서 완벽한 성인이 아니라 단지 과학 분야에서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정진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특히 아인슈타인은 꼭 필요한 경우 외에는 대인관계를 맺지 않으려고 했다. 그것은 자신의 성격이 타인과 갈등을 일으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는 다음과 같이 세계적인 천재의 상반된 성격을 설명했다.
‘아마도 아인슈타인은 개인적인 인간관계의 굴레에 연연해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 전체를 위해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하튼 아인슈타인은 원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것도 천재로서의 성공이다. 그러므로 아인슈타인은 그런 과학자들 중에서 가장 유명하기 때문에 유명세를 타고 있으며 또 비난도 받는다고도 설명된다.
그런데 하인리히 창클은 아인슈타인과 밀레바의 사건은 한 마디로 코미디라고 단언하여 말한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구상할 때 밀레바가 도왔다는 자체가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는 아인슈타인과 밀레바의 이야기가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출처를 확인한 결과 데상카 트르부호빅퀴리치란 세르비아 여자에게서 나온 이야기란 사실을 밝혔다. 당대에 유럽에서 민족주의 기운이 일어나자 데상카가 자기나라 사람인 밀레바 아인슈타인이 유명한 남편이 하는 작업에 커다란 몫을 했다는 이야기를 지어 1969년 유고슬라비아에서 출간했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조페란 물리학자가 아인슈타인의 논문들 가운데 아주 중요한 세 편의 논문 서명이 ‘아인슈타인’마리치‘로 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적혀있다. 그런데 창클은 그녀가 인용한 자료로 제시한 조페의 책 『아인슈타인에 대한 기억들』에는 아인슈타인의 부인이 공동저자였다는 말은커녕 그와 유사한 말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오히려 밀레바가 학교 때부터 수학실력이 너무 형편없었기 때문에 시험에도 통과하지 못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와 같이 확실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의 여성운동가인 센타 트뢰멜플뢰츠가 미국 <학술진흥재단>이 주최한 학회에서 데상카에 대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세르비아의 동화에 다시 불을 지폈고 언론들이 이를 과장하여 계속 보도되었다는 설명이다. 물론 아인슈타인이 편지에 ‘우리의 이론’ 또는 ‘우리의 연구’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볼 때 서로 상의했을 가능성까지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밀레바의 역할은 적어도 상대성이론을 구상하는데 크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사망하기 전날까지 연구에 매달려>
아인슈타인은 20세기 최대의 과학자로 칭송 받았지만 그의 생활은 매우 검소했다. 백발이 제멋대로 자랐고 신사복과 넥타이를 매는 정장 대신에 쉐터와 가죽 자켓을 주로 애용했다. 연주가 뺨치는 바이올린 연주와 요트 조정이 그의 취미이자 낙이었다.
그는 첨단 과학자로서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전지전능과 조화의 신을 믿었다. 덴마크의 유명한 물리학자 보어와 불확정성원리에 대해 논쟁했을 때도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여 보어를 화나게 했다는 이야기는 전설 아닌 전설이다.
그가 위대한 과학자의 상으로 만화나 SF영화에서 모델이 되는 것은 허세를 부리거나 뽐내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누구에나 개방적이고 차별을 두지 않았다. 때로는 이웃에 사는 고교생에게 기하학 문제를 풀어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 문제의 답이 항상 정답은 아니었다고 한다. 영화 감독들이 아인슈타인을 진정한 과학자의 상으로 만들기에 주저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1948년에 이스라엘이 독립했을 때 대통령으로 취임해 줄 것을 요청 받았지만 “대통령은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라고 말하며 재빨리 사양했다.
아인슈타인에 다소 놀라는 점은 그가 어른이 되면서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사실을 입증해 준 것은 노벨물리학상을 탄 일본의 물리학자 유카와가 아인슈타인의 프린스턴 연구소를 방문했다. 그런데 그가 아인슈타인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놀란 것은 책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카와는 물리학의 기본을 새로 쓴 아인슈타인이라면 동서고금의 책과 문헌에 파묻힌 채 연구할 것이라고 상상했다고 실토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방에는 고전이라고 평가되는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과 뉴턴의 물리학 관계 서적 10권 정도가 꽂혀 있었고 학회논문집이나 증정 논문집 등을 모두 합하더라도 100권이 채 되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물론 아인슈타인도 학계의 최첨단 동향을 파악하고자 논문류는 자주 읽었다. 그러나 읽으나마나한 이미 완성된 이론을 정리한 교과서류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논문에는 나름대로 특징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논문에서 다른 사람의 논문을 거의 인용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논문은 선행 연구를 인용하고 논문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신규성을 주장하는데 반해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현상의 과제만 제시했다. 이어 독창적인 사고와 전개가 서술되고 실험의 예상, 검토과제를 제시하면서 끝을 맺었다. 선행 연구 논문의 인용이나 비판을 간략하게 서술하고 본질만 간결하게 표현했으므로 아인슈타인의 논문은 어느 논문보다 짧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유명한 논문이었다. 여기에서 ‘진리는 단순하다’는 신념이 관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새로운 이론을 도출하는데 여분의 정보는 필요없다는 것이 그의 생애를 통해 일관된 생각이다. 후술하는 ‘DNA 이중 나선, 제임스 왓슨과 프란시스 크릭’이 DNA모델을 발표해서 노벨상을 받았던 논문도 <네이처>지의 단지 1쪽 반 분량이었다. 독창성이 높은 명논문은 모두 짧은 것이 사실인 모양이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 그가 사망하기 몇 달 전 친구에게 “늙은이에게 죽음은 해방처럼 올 것이네. 죽음이란 결국 갚아야 할 빚인 것 같네”라고 편지를 썼다. 1955년 4월 3일 동맥류가 파열되어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주치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몫을 다했습니다. 이제 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1955년 4월 18일 새벽 76세의 나이로 조용하게 세상을 떠났다.
아인슈타인이 사망하자 학자들은 그가 왜 세계적인 천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비결과 원인을 찾는데 열중했다. 학자들이 당초 해명하려고 했던 질문은 ‘천재성의 증거는 뇌에 어떻게 나타나 있나?’이다. 아직 이에 대한 결론은 명확한 답은 없다는 것이지만 근래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1955년 사망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부검을 담당한 병리학자 토마스 하비(2007년 4월 사망)는 천재 물리학자의 뇌의 소유권을 천명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 가족의 동의가 없었고 이 때문에 하비는 직업을 잃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비는 아인슈타인의 뇌를 지니고 여행을 다녔다. 아인슈타인의 손녀를 만나러 갈 때 타파웨어 넣어 들고 가기도 했으며 연구 목적이라는 명분으로 아인슈타인의 뇌에서 수많은 ‘슬라이스’를 떼내었다.
이들 자료로 아인슈타인 뇌에 대해 몇 가지 특징이 제시되었다.
첫째, 전두엽(frontal lobe)에서 얻은 슬라이스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대뇌 피질이 얇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천재의 뇌에서는 뉴런의 밀도가 대단히 높고 뉴런 간 전도 시간이 짧아 사고가 아주 빠르게 이루어졌을 것으로 미국 버밍험 알라바마 대학 뇌과학자들은 추정했다. 그러나 이 연구는 실험 자료의 부족함 때문에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토마스 하비는 부검 당시 아인슈타인의 뇌 무게를 쟀는데 2.7파운드(약 1.22kg)이었다. 한 연구에서 얻은 성인 남성의 평균 뇌 무게보다 약 0.14kg 가벼웠다. 이는 통설적으로 이해되었던 큰 뇌가 탁월한 지능의 필요조건은 아니라는 논리로 인용되기도 하지만 아인슈타인과 일반인의 뇌 무게 차이는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1984년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신경 과학자 매리언 다이아몬드는 하비가 보내온 슬라이스들을 대상으로 뉴런과 글리아 세포의 비율을 계산했다. 글리아 세포는 뉴런을 지탱하고 자양분을 제공하는데 아인슈타인의 뇌에서 뉴런당 글리아 세포가 평균보다 73%더 많았다. 이 점이 아인슈타인이 어떤 개념을 창안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부여받았다고 주장되었으나 이 연구 결과도 흠이 많다는 지적을 받았다.
캐나다 맥마스터 대학교의 과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두정엽(parietal lobe)에서 반구(半球)가 일반인에 비해 1cm 혹은 15% 정도 더 넓은 것을 확인했다. 시각과 수학적 사고를 관장하는 두정엽이 발달했다는 사실은 그의 천재성의 증거로 여겨졌고, 이 연구는 널리 주목을 받았다.
아인슈타인이라는 천재의 뇌가 과학자들은 물론 일반인들의 큰 관심을 받아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 아인슈타인이 어떤 연유로 정말 천재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천재의 뇌는 죽어서도 좀처럼 안정을 찾을 수 없는 모양이다.
아인슈타인에 관한 한국의 과학 팁 한 가지.
1922년 아인슈타인이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되던 그해 당대의 스타였던 아인슈타인을 민립대학 설립을 추진하던 <조선교육협회>가 초청하였으나 그는 조선을 방문하지 못했다는 자료가 발굴되었다.
<조선교육협회>는 3․1운동 이후 일어난 대표적인 민족단체였다. 1920년 6월 독립협회 부회장을 지낸 월남 이상재, 대한제국 참정대신으로 제2차 한일협약(일명 을사조약)을 끝까지 반대했던 한규설과 같은 원로들이 앞장서고 동아일보 초대 주필이었던 장덕수 등 90여 명이 만든 단체이다.
이들은 한국인 차별교육 철폐, 학교에서의 일본어 사용 폐지, 한국사 과목 개설 등을 요구하면서 한편으로는 인재 육성을 위해 민립대학 설립을 추진했다. 당시에 지식인들은 민립대학의 육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아인슈타인 박사를 초빙하자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1921년 4월 1일부터 5월 30일까지 미국을 방문하여 모두 75만 불이나 모금했다. 그가 어려운 미국 여행길에 오른 것은 유대인 동포를 위해 대학을 설립하겠다는 목적이었다.
“재능 있는 많은 유대인 자손들이 고등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조선교육협회>는 아인슈타인이 모금을 통해 자신의 동족에게 대학을 설립해주려 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그가 일본을 방문하는 것도 대학 설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을 알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1922년 10월 8일 프랑스의 마르세이유 항을 출발하여 11월 13일 상하이를 거쳐 11월 17일 고베 항에 도착했다. 40일에 이르는 긴 항로였는데 고베 항에 들어설 때 그는 192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의 신분이었다. 아인슈타인은 43일에 걸친 일본학술강연 여행에 나섰다.
<조선교육협회>는 아인슈타인을 한국에 초청하기 위해 강인택을 일본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조선교육협회>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선의 초청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이 오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일본 긴키대학의 스기모토 긴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가이조 사(아인슈타인을 초청한 출판사)는 아인슈타인을 초빙하기 위해 상상할 수 없는 많은 돈을 주었다. 하지만 조선에는 그만한 돈이 없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을 초청하기 위해 일본을 다녀온 강인택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우리에게 터럭만치라도 권리가 있다 하면 벌써 실현되었을 것이다.”
전국 조직을 갖추고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펼쳤던 <조선교육협회>는 일제의 조직적인 방해에 직면하여 점차 유명무실해졌고, 1927년 <신간회>가 생기자 해체되고 말았다. 몰론 아인슈타인을 초청해 민립대학 설립 자금을 모으겠다는 계획도 역사 속에 묻혔다.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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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야기]중력파 검증하는 우주등대 ‘펄서’」, 이충환, 뉴스메이커, 2007.11.13, 7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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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융합시 온도가 1억 도를 넘는다는데! 그 높은 온도를 견디는 시설이 있나요?」, 한국원자력문화재단, 2010.10.14
「1세기 전 아인슈타인 가설, 다 맞았다」, 이영완, 조선일보, 2011.05.24.
「올 노벨과학상이 주목한 건 생체시계·중력파」, 박근태, 한국경제, 2017.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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