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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력의 휘어짐
아인슈타인이 수성이 보여 주는 근일점의 편차를 말끔하게 설명했지만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워낙 혁명적이므로 당대의 많은 과학자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가 제시한 나머지 두 가지 증명 방법을 당대의 과학기술로 검증하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검증 방법으로 제시한 태양의 중력장에서의 빛의 사소한 구부러짐은 당대의 과학기술로도 어느 정도 노력만 하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학자들은 알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이론을 검증할 수 있는 보다 확실한 방법으로 개기일식 때의 빛의 경로를 측정해 볼 것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그는 1911년 중력장에 의해 태양을 통과하는 빛은 직선으로부터 1.75초만큼 휜다고 발표했다. 공간을 평평하다고 보는 뉴턴 역학에 의해 1801년 폰 솔드너(Johann von Soldner)가 계산한 것에 따르면 태양 표면을 스치듯 지나가는 빛의 휘어짐은 0.84초다.
만약 태양의 뒤에 별이 있어서 일식 때 그 별의 가장자리를 관측한 후 지구가 반 바퀴 공전한 다음에 태양의 간섭을 받지 않은 그 별의 위치를 관측할 수 있다면, 태양의 중력에 의해 그 별빛이 휜다는 것을 검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검증에는 상당한 우여곡절이 개제된다. 우선 아인슈타인의 실수도 있다. 아인슈타인은 1911년 3월 프라하의 카를 페르디난트 대학교 정교수가 되기 전 취리히 대학교에서 무려 17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중 한 논문이 「빛의 진행에 중력이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이다. 여기에서 그는 별빛의 휘어짐을 0.83초로 계산했다.
이 값은 앞에서 설명한 뉴턴의 역학에서 도출되는 중력의 휘어짐과 다름없다. 추후에 아인슈타인이 이 각도를 1.75초로 정정했지만 아인슈타인의 이 실수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설명할 때마다 반드시 따라 다닌다. 한마디로 아인슈타인이 수학에 밝지 못하다는 것이다. 여하튼 아인슈타인의 이와 같은 실수는 당시 아인슈타인 스스로 중력의 효과를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다. 1905년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한 후 1911년까지 아인슈타인이 공간의 굴곡에 대해서 명쾌한 해를 밝히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인데 아인슈타인의 진가는 이때 나타난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특수상대성이론의 과감하게 중력이 시간을 느리게 가게 한다는 생각을 진전시켜 거대한 물체들에 의해 공간과 시간이 뒤틀린다고 발표했다. 1911년 발표된 논문에서 비로소 유명한 상대성이론의 기본을 설명한다.
‘중력의 전위가 다른(different gravitaitional potential) 곳에서 시계가 같은 비율로 간다고 간주해야 할 근거가 없다.’
문제는 아인슈타인이 이러한 독창적인 생각을 수학으로 전개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때 그에게 지원군이 나타난다. 취리히 공대의 동기로 아인슈타인에게 수학을 지도했던 그로스만(Marcel Grossmann)교수가 그에게 한 수 가르쳤다. 나이절 콜더는 이 당시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박식한 교수 그로스만이 그다지 박식하지 못한 아인슈타인 교수에게 ’텐서 해석(tensor calculus)‘을 사용하여 시공의 기하학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아인슈타인이 그로스만과 함께 수학적인 비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이론 즉 새로운 중력의 법칙을 거의 정립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이들은 1913년 공동으로 논문을 제출했는데 그것도 완벽한 이론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후 아인슈타인은 그로스만과 공동연구로 도출한 중력방정식을 과감히 버리고 1915년 일반상대성이론의 올바른 수학을 찾는데 몰두했다. 결론을 말한다면 그는 엄밀한 해를 찾아냈고 1916년 3월에 『물리학 연보』에 유명한 「일반상대성이론의 기초」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추후에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확신과 기진맥진이 교차하면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어둠속에서 빛을 찾으면서 몇 년을 지낸 사람들만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아인슈타인의 중력에 의한 빛의 휘어짐이 증명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워낙 매력적이므로 독일 과학자들이 그의 예언을 검증하기 위해 모든 실험 장비를 갖추고 일식이 일어나는 러시아로 1916년에 출발했다. 그러나 당시는 1차 세계대전 중인데다가 러시아와 독일은 적성 국가였다. 순수한 연구 목적임을 역설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학자들은 모든 실험 장비를 압류 당하고 추방당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대한 검증은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1918년 세계 대전이 끝나자 이번에는 독일과 적국으로 싸웠던 영국이 나섰다. 아인슈타인의 예언을 검증하기 위해 일식이 예상되는 지점으로 영국에서 관측대를 보내겠다는 것이다. 곧바로 반대가 일어났다.
‘적국 독일의 과학자가 내놓은 이론을 시험하기 위해서 영국이 많은 돈을 들여 관측대를 파견할 수는 없다.’
이런 반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관측 계획의 위원장이자 양심적인 반전 운동으로 유명한 천문학자 아서 에딩턴(Arthur Stanley Eddington,, 1882~1944)은 다음과 같은 말로 관측대를 반드시 보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진리에는 국경이 없다. 어느 나라의 과학자의 이론이든 옳은 이론을 증명하는 것은 과학자들의 책임이다”
결국 영국은 1919년 5월 10일 개기일식이 관측되는 브라질 북쪽에 있는 소브랄과 서아프리카의 기네아만에 있는 프린시페섬으로 관측대를 파견했다. 에딩턴 자신도 프린시페섬 관측대에 참가했다.
이후 벌어지는 사건은 그야말로 전설적이다. 에딩턴 팀이 일식 관측을 한 결과 태양 가장자리를 통과하는 광선은 각도로 1.64초 굴절했다. 앤드류 크로믈린이 이끈 소브랄의 탐사대도 1.98초의 거리 차이를 발견했다. 아인시타인이 예언한 1.75초와 약간의 오차는 있었지만 두 값은 거의 일치했고 태양의 인력이 광선을 굴절하게 만든다는 것을 확정시키는데 문제가 없는 수치였다.
11월 6일 영국왕립협회와 왕립천문학회의 합동회의에서 에딩턴은 아인슈타인의 예언이 맞다고 발표했다. 그의 발표가 있자마자 아인슈타인은 하룻밤 사이에 세계 언론의 찬사를 받는다. 1919년 11월 7일자 <런던타임스>지는 「우주의 구조」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보도했다.
‘과학에 일어난 혁명/우주에 관한 새 이론/뉴턴의 개념을 뒤집다.’
다음날에도 <런던타임스>는 ‘과학의 혁명/아인슈타인 대 뉴턴/저명한 물리학자들의 견해’라는 제목의 해설 기사를 실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천상에서 휘어져 가는 빛 : 아인슈타인 이론의 개가」라는 머릿기사를 실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물리학자들의 엄밀한 검증을 통과했지만 이를 일반인들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점에 착안하여 미국의 과학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은 3,000단어만 사용하여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설명하는 대회를 주관했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많은 과학자들이 참여했는데 상금 5,000달러의 우승자는 영국 특허사무국에서 근무하던 린든 볼튼(Lyndon Bolton)이었다. 아인슈타인도 스위스 특허사무국에서 일했으므로 특허국 직원인 볼튼이 그의 이론을 쉽게 설명할 수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여하튼 아인슈타인의 이론과 검증으로 인한 충격을 한 언론인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뉴턴의 중력 개념은 200년 이상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고 군림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발견한 지 4년 이내에 확인되었고 뉴턴의 이론은 폐위되었다.’
몇 년 후 아인슈타인이 역사적인 에딩턴의 실험 결과에 대해 양자물리학의 창시자인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Max Planck, 1858~1947)를 평한 이야기는 전설이 되었다.
아인슈타인 : 플랑크는 내 절친한 친구이며 훌륭한 사람이지만 아시다시피 그는 물리학을 진정으로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기자 : 무슨 뜻이죠?
아인슈타인 : 1919년 개기일식이 일어날 당시 플랑크는 잠을 못자고 태양의 중력장으로 빛이 휘는지를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그가 관성질량과 중력질량이 같은 것임을 설명하는 일반상대성이론을 이해했다면 나처럼 그 역시 편안하게 잠을 잤을 겁니다.
1919년 어떤 학생이 실험상의 측정이 그의 이론과 맞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아인슈타인에게 질문했다. 아인슈타인은 “신에게 유감을 느낄 걸세. 이론에는 틀린 것이 없거든.”이라고 대답했다는 것도 이 당시 아인슈타인의 자부심을 한껏 보여준다.
당대의 일반 사람들에게 태양에 의해 빛이 휜다는 것처럼 충격적인 내용은 없었다. 그런데 빛이 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떤 별이 별빛을 모두 끌어당길 정도로 강력힌 인력을 갖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질량이 되어야할까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태양은 그다지 큰 천체가 아니므로 빛이 1.74초로 휘지만 보다 큰 천체라면 빛이 완전히 휘지 않겠느냐이다.
학자들이 이 문제에 도전하여 태양과 지름이 같은 별로 그 질량이 태양의 약 400,000배가 된다면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고 계산했다. 만일 그러한 별이 존재한다면 그 별이 아무리 가까이 있거나 아무리 밝게 빛나고 있더라도 그 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빛조차 빠져나가지 못하는 경우를 블랙홀이라 부른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블랙홀과 연계된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1919년의 실험은 자연에 실재하는 거대 천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과학자들은 실험 방법이 정밀해진다면 실험실 안에서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검증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그의 이론을 실험실 안에서 검증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만 여기에 도전하여 성공한 사람이 독일의 물리학자 뫼스바우어(Rudolf Ludwig Mössbauer)이다.
대개의 경우 원자는 감마선을 방출하면서 반동을 받고 이 반동에 의해 파장의 스펙트럼 띠가 넓어진다. 그러나 어떤 특정 조건 아래서는 결정 덩어리 전체가 하나의 원자처럼 행동해서 반동이 생겨도 그 반동에 의한 충격이 모든 원자에 골고루 퍼진다. 즉 반동이 흡수되는 것이다. 이렇게 반동이 흡수된 채 방출되는 감마선은 아주 가늘고 한정적인 스펙트럼 선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 한정적인 파장의 감마선은 원래의 결정과 같은 조건의 결정에는 거의 완벽하게 흡수되지만, 그 결정의 조건이 조금이라도 다른 경우에는 흡수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을 ‘뫼스바우어 효과’라고 한다.
뫼스바우어 효과는 파장이 10분의 1 정도 차이가 나는 감마선도 검출할 수 있다. 즉 건물의 꼭대기와 마루 바닥 사이의 중력 차이로도 파장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실험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공고히 하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뫼스바우어는 1961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이때까지 아인슈타인이 살아있었다면 노벨 물리학상을 두 번째로 수상했을 것이지만 그는 이미 고인이 되었기 때문에 직접 수상하지는 못했다.
또 다른 검증은 중력 적색편이다.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빛은 중력에서 벗어나면서 에너지를 점점 잃는다. 그렇게 되면 빛의 파장이 길어져 스펙트럼에서 긴 파장인 적색 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이 현상을 ‘중력 적색편이’라고 한다. 중력 적색편이의 정밀 관측은 1960년 하버드대학교의 로버트 파운드와 글렌 레브카 교수가 수행했다.
그들은 대학 내 건물의 엘리베이터 통로를 활용했다. 22미터 높이의 엘리베이터 바닥에는 고에너지의 감마선 발사 장치를 놓고 천장에는 센서를 장착했다. 그런 다음 감마선을 천장의 센서로 향해 쏘았다. 감마선이 지구 중력장으로부터 22미터 밖으로 나가는 상황인데 이로 인해 감마선은 1조분의 2정도로 미세한 에너지를 잃었다.
1964년 어윈 샤피로(Irwin I. Shapiro)는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을 검증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빛이 중력장을 지나가면 그 속도가 확연히 감소한다는 것이다. 이 현상을 ‘샤피로의 시간지연’이라고 한다.
그는 1966년부터 1970년까지 50만 와트의 파동을 발생시키는 송신기와 민감한 수신기를 갖춘 MIT의 헤이스탁(Haystack) 전파망원경을 이용해 이 현상을 확인했다. 지구와 수성 사이의 전파이동 시간을 측정하는 것이다. 그는 지구와 수성 사이의 전파 이동선이 태양과 가까울수록 전파가 점점 느려진다는 것을 2%내에서 확인했다.
1970년대 샤피로 시간지연 현상은 캘리포니아의 제트추진연구소(Jet Propulsion Laboratory)의 우주선을 사용한 실험을 통하여도 비슷한 정밀도의 연구 결과를 얻었다. 화성 궤도선인 마리너 6호와 마리너 7호는 물론 화성착륙선 바이킹도 이를 확인시켜 주었다. 화성이 태양의 먼 쪽에 있을 때 일반 상대성이 요구하는 똑같은 지연현상이 예언의 0.5% 이내에서 일어난 것이다. 샤피로는 계속 실험을 주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좋든 나쁘든 태양계는 일반 상대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연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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