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아리 서불과차>
서불이 한국을 방문했다고 제시하는 결정적인 증거는 경남 남해군 상주면 금산(錦山) 기슭에 거북바위 위에 ‘서불제명각자(徐市題名刻字, 경남기념물 제6호)’ 또는 ‘서불이 이곳을 지나가다’라는 의미의 ‘서불과차문(徐市過此文)’이라 불리는 석각이다. 남해도 상주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이는 금산(錦山, 701m) 기슭의 금산사 옆 부소암 아래에 있는 7m x 4m의 평평한 바위 위에 1m x 50cm의 넓이로 새겨져 있다.
끄새가 제2의 김정호로 불리는 고 이형석 박사와 이곳을 여러 번 찾았는데 이곳을 자주 방문했던 이형석 박사도 쉽사리 찾지 못할 정도로 외진 곳에 있었다. 근래 인근 지역을 관광 자원으로 개발한다는 곳이지만 거북바위에 새겨져있는 암각문이 예전부터 서불이 각자한 것으로 알려진 것은 위창 오세창 선생과 관련이 있다. 오세창 선생의 아버지인 오경석이 암각의 탁본을 1860년에 중국으로 가져가 당시 중국의 금석학 전문가에게 감식을 의뢰한 결과 ‘서불과차(徐芾過此 : 서불이 이곳을 지나갔다)’라고 해석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암각화(岩刻畵)는 절벽이나 경사진 면에 있는데 이것은 얼핏 보아서는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산비탈에 박혀있는 아주 평범한 바위 상부에 각자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학자들에 따라 선사시대의 암각화 일종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곳 안내표지판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었다.
‘남해 상주면 양아리 ‘거북바위’라 불리는 이 바위에 새겨진 문자 또는 문양은 일반적으로 ‘서불이 이 곳을 지나다’라는 의미의 ‘서불과차’로 해석되었다. 옛날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가 시종(侍從, 方士) 서불에게 동남동녀 500명을 주며 불로초를 구해 오라고 하여 서불이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그러나 서불은 ‘세상에 늙지 않게 해주는 풀이 어디있겠는가’라고 하며 이곳에서 사냥만 즐기다가 떠났다.’
그 때 서불은 자신이 이곳에 왔음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이 문자 또는 그림을 새겼다는 것이다. 구례의 서시천과 지초봉(芝草峰)도 서불과 연관이 있다고 설명된다. 서불이 이들 지역을 방문한 후 섬진강의 지류인 ‘서시천’(西施川), 서시천의 지류를 ‘지천’(芝川), 그리고 ‘영신지가 자란다’는 방장산의 서쪽 봉우리를 ‘지초봉’(芝草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양아리 암각이 워낙 유명세를 타고 있으므로 이 암각에 대한 기록은 여러 글에서 보인다. 우선 조선시대의 이맥(李陌)이 1520년경에 편찬한 『태백일사』에 이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남해현 낭하리(郎河里)의 암벽에 신시고각(神市古刻)이 있다.’
‘남해현 낭하리 계곡에 있는 바위 위에 신시고각(神市古刻)이 있는데, 그 글은 환웅(桓雄)이 사냥을 나가서 삼신(三神)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다.’
‘최치원(崔致遠)이 일찍이 신지(神誌)가 새겨진 옛비석을 찾았는데 (중략) 낭하리(郎河里)의 암각이 그것(神誌)의 실제 흔적이다.’
‘소문에는 남해도 낭하리의 계곡과 경박호(鏡珀湖) 선춘령(先春嶺)과 오소리(烏蘇里) 바깥의 돌 사이에서 언젠가 조각을 발견하였는데, 범자(梵字)도 아니고 전자(篆字)도 아니어서 사람들이 쉽사리 해독하지 못한다.’
19세기 학자 오경석은 이것을 초기 한자인 상형문자로 보아 ‘서시기배(徐市起拜)’ 즉 서불이 일어나서 솟아 오르는 태양에 예(禮)를 드렸다는 말을 새긴 것으로 보았다. <땅이름학회>의 이형석 박사는 두모리 일대 7~8개소에서 발견되는 유사한 양아리 각자나 문양을 조사한 결과 ‘진시황의 불로초 사자 서불의 유적’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발표했다. 이 박사가 제시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① 제주도 정방폭포 암벽의 서불관련(徐巿過之) 문자와 형태가 비슷하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적인 문헌과 기록이 남아 있다.
② 중국 사마천의 『사기』나 남원 광한루의 ‘거북사상’과 이곳의 명칭(거북바위)이 일치한다.
③ 서불이 출발했던 중국의 ‘낭야(琅邪)’와 상주의 ‘양아리, 양하리’ 지명이 유사하다.
④ 창힐의 조적문자나 갑골문자 등 고대문자의 발상지가 중국 낭야 인근이다.
⑤ 남해지역은 삼신산인 방장산-섬진강으로 진입하기 위한 필수 코스로 섬진강을 따라 입구의 양아리, 구례의 서시천, 지초천, 지초마을, 지리산 지초봉, 남원 광한루의 삼신산과 서불 관련 유적 등이 있다.
⑥ 이웃한 사천시(삼천포)의 늑도지역에서 발굴된 한나라 때의 유적과 유물 등 중국과의 교류한 흔적이 남아 있다.
⑦ 이익의 『성호사설』, 안정복의 『동사강목』 등에 서불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
<서불 한국에 왔다>
양아리 각석을 서불의 작품이라고 보면 서불이 한국을 방문한 것은 당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서불은 시황 28년(219 BC)에 진시황제의 허가를 받아 동남동녀 수 천 명을 데리고 불로초 찾기에 나섰지만 첫 출항은 실패했다. 한국 측의 설명에 따르면 그 후 2차 대규모 선단을 거느리고 출항했는데 한국 남해의 영악인 보타산, 지금의 금산 산하 앵강만의 포구 벽련포와 두모포에 기착하였다. 이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수년간 불로초를 찾다가 당시 상륙한 지점에 암각문을 새긴 후 다음 목적지로 출발했다는 것이다.
서불이 정말로 한국을 찾아왔다면 한국인들이 가장 알고 싶어하는 것은 한국의 삼신산이 어디에 있느냐는 점이다. 서불이 삼신산이 있는 곳으로 선단을 움직였을 것임은 자명한 사실인데 이에 대한 자료는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하여 여러 사료에 등장한다. 『사기』 <회남 형산열전>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서불로 하여금 바다에 들어가 신선(神仙)에게 기이한 물건을 구하게 하니, 그는 돌아와 거짓으로 말하기를 “신이 바다 속의 대신(大神)을 만났는데 ‘네가 서황(진시황)의 사자이냐’ 묻기에 신(臣)이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너는 무엇을 구하느냐’ 라고 묻기에 ‘수명을 연장시키는 약을 원합니다.’ 라고 대답하였더니, 그 신(神)은 ‘너는 진왕(秦王)의 예(禮)가 박하여 그 약을 볼 수는 있으나 얻어 취하지는 못 할 것이다’ 라고 하고는 바로 신(臣)을 데리고 동남 쪽에 있는 봉래산으로 갔습니다. 영지초(靈芝草)로 이루어진 궁궐이 보이고 사자( 使者)가 있었는데 구릿빛에 용의 형상이었으며 그 광채가 하늘까지 비추었습니다. 그래서 신(臣)이 재배하고 ‘마땅히 어떤 예물을 바쳐야 합니까.’라고 묻자 해신(海神)은 ‘양가집 사내아이와 계집아이 그리고 백공(百工, 장인)들의 제품을 바치면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진시황이 크게 기뻐하며 동남동녀 3천명을 보내고 갖가지 오곡과 백공들의 제품을 가져가게 하였습니다. 서불은 평원(平原)과 넓은 곳을 얻어 그곳에 머물러 왕이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서불에 관한 이야기는 『한서』 <교사지>에도 나오는데 여기서는 삼신산이 발해(渤海) 안에 있다고 적었고 『괄지지』에는 단주(亶洲)가 동해(東海) 안에 있다고 적었다. 『후한서』 <동이 왜지(倭地)>조에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회계(會稽)의 바다 밖에 동제인(東鯷人)이 있는데 20여 나라로 나뉘어져 있다. 또 이주(夷洲)와 단주(澶州)가 있다. 전하는 말로는 진시황이 방사(方士) 서불을 파견하여 동남동녀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봉래산의 신선초(神仙草)를 구하고자 하였으나, 얻지 못하자 서불이 주살(誅殺)될 것이 두려워 감히 돌아오지 못하고 마침내 이 주(洲) 머물러 대대로 이어져 전해 내려오다 수만 가구가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때때로 회계(會稽)의 저자거리에 나온다. 회계의 동야현 사람이 바다를 건너다 태풍을 만나 표류하여 단주에 다다른 적이 있다고 한다. 그곳은 아득히 멀어 왕래할 수 없다.’
『후한서』에는 심영(沁榮)의 『임해수토지』를 인용한 또 다른 기록이 있다.
‘이주(夷洲)는 임해(臨海)의 동남에 있는데, 해군(海郡)에서 2천리 떨어져 있다. 그 땅에는 서리와 눈이 없으며 초목이 죽지 않는다. 사면이 산과 계곡이다. 사람들은 머리를 깎고 귀를 뚫었으나 여인들은 귀를 뚫지 않았다. 토지가 비옥하고 오곡이 이미 다 자라있으며, 또한 고기와 짐승이 많다. 개가 있는데 꼬리가 짧아 마치 노루꼬리 같다. 이 오랑캐들은 부모와 아들 내외가 커다란 침대 하나에서 같이 누어서 쉬는 등 거의 서로 간에 꺼리는 것이 없다. 땅에는 구리와 쇠가 있으나 오직 사슴의 뿔을 사용하여 창을 만들어 이것으로 전투를 하며, 청석(靑石)을 갈아서 화살촉을 만든다. 살아있는 물고기를 큰 항아리에 섞어 담아 소금으로 간을 한 다음, 한 달 남짓 지난 다음에 그것을 그냥 먹는데 아주 좋은 음식으로 여긴다.’
위의 자료를 보면 삼신산이 발해(渤海) 안에 있고 동해(東海) 안에 이주(夷洲)와 단주(澶州)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서불이 불로초를 얻기 위해 단주와 이주를 향해 떠났음이 틀림없는데 발해와 동해는 한국인에게 너무나 친근한 단어다. 이들 발해와 동해를 한국의 지명으로 간주한다면 서불이 한국을 방문했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인데 삼신산이 한국에 있다면 더욱 신빙도가 높아짐은 물론이다. 놀랍게도 삼신산에 대해서는 한국에 많은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무왕(武王) 35년(634) 3월에 왕은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파고 물을 20여리나 끌어 들였으며 네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속에 크고 작은 섬으로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무왕이 삼신산(三神山)을 매우 동경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의 이인로(李仁老, 1152〜1220)는 『파한집』에 신선국(神仙國)이라는 봉래와 영주가 고려와 접경하고 있다고 적으면서 접경지대가 어느 곳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고려 충렬왕 때의 학자 이승휴(李承休, 1224-1300)가 저술한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금(金)나라에서는 고려를 조상의 나라(父母鄕)라고 하였다. 주(註)에서 말하기를 금인(金人)의 시에 ’거친 땅 신선굴 삼한은 부모의 나라‘(蕪地 神仙窟 三韓 父母鄕)라고 하였는데 이는 근본을 잃지 않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신선굴(神仙窟)이란 신선이 사는 곳으로 삼신산인 봉래, 영주, 방장산을 말한다. 이형석 박사는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조상의 나라 혹은 군자국(君子國)이라고 일컫는 것은 모두 삼신산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은 『지봉유설』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세상에서 말하는 세 개의 산은 조선에 있다. 금강산을 봉래산이라하고 지리산을 방장산. 한라산을 영주산이라 한다. 내가 말하는 삼신산설은 서불에서 나온 것인데 서불은 일본으로 들어가 죽어 신이 되었은즉 삼신산은 응당 동해의 동쪽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노두(老杜)는 방장산이 삼한에 있다 하지 않고 삼한의 밖이라고 하였다. 그 말은 믿을 수 있다.’
1714년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擇里志)』에 지리산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지리산(智異山)은 남해(南海)가에 있는데 이는 백두산의 큰 줄기가 다한 곳이다. 그래서 일명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한다. 세상에서 금강산을 봉래(蓬萊)라 하고 지리산을 방장(方丈)이라 하고 한라산을 영주(瀛洲)라고 하는데 이른바 삼신산(三神山)이다.’
그렇다면 중국과는 멀리 떨어진 한반도의 세 산을 어떤 연유로 산신들이 살고 있는 삼신산으로 간주했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삼신산에 대한 기록은 중국 상고(上古)의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 나온다.
‘동해의 밖 대학(大壑)은 소호(少昊)의 나라이다. 소호가 전욱임금을 이곳에서 키우고 그때의 거문고를 버려 두었다. 감산(甘山)이라는 곳이 있어 감수(甘水)가 여기에서 나와 감연(甘淵)을 이룬다.’
여기에 대학(大壑)이란 삼신산이 있는 곳을 말한다. 발해(渤海)의 동쪽으로 몇 억만리나 되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곳에 대학(大壑)이 있는데 실은 바닥이 없는 골짜기여서 그 아래엔 바닥이 없으며 그 곳을 귀허(歸墟)라 부른다. 온 세상 팔방(八方)의 물과 은하수의 흐르는 물이 모두 그곳으로 흘러들지만 물은 늘지도 않거니와 줄지도 않는다. 그 가운데에 다섯 개의 산이 있는데 첫째는 대여(岱輿)요 둘째는 원교(員嶠)요 셋째는 방호(方壺, 방장산)요 넷째는 영주(瀛州)요 다섯째는 봉래(蓬萊)다. 그 산들은 높이와 둘레가 3만리이며 그 꼭대기에는 9천리 넓이의 평평한 곳이 있다. 산들 중간의 거리는 7만리인데 그곳에서는 이웃처럼 지내고 있다. 그 위의 누대(樓臺)와 궁관(宮觀)들은 모두가 금과 구슬로 되어 있고 그 위의 새와 짐승들은 모두가 순백(純白)색이다.
주옥(珠玉)으로 된 나무들은 모두가 떨기로 자라고 있고 그 꽃과 열매들은 모두 맛이 좋아서 그것을 먹으면 누구나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한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신선과 성인의 무리다. 하루 낮이나 하루 저녁에 날아서 서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다섯 산의 뿌리는 연결되어 붙은 곳이 없다. 언제나 조류와 물결을 따라서 올라갔다 내려 왔다하여 잠시도 멎어 있는 일이 없다. 신선과 성인들은 이것을 근심하여 그 사실을 상제(上帝)께 호소하였다. 상제(上帝)는 서극(西極)으로 흘러가 버리어 여러 성인들이 살 곳을 잃게 될까 두려워하시어 곧 우강에게 명하여 큰 자라 열 다섯 마리로 하여금 머리를 들고 그것들을 이고 있게 하였다. 6만년 만에 한 번 교대하도록 되었다. 다섯 산은 이에 비로소 안정되었다.
용백(龍伯)의 나라에는 대인(大人)이 있어서 발을 들어 몇 발자국 가지도 않아서 다섯 산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는 한 낚시로 여섯 마리의 자라들을 연달아 낚아 가지고 모두 짊어진 다음 잽싸게 그의 나라로 돌아와 그것을 구워 가지고는 뼈를 세며 작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대여(岱輿)와 원교(員嶠)의 두 산은 북극(北極)으로 흘러 내려가 대해(大海)속에 가라앉아서 옮겨오는 신선과 성인들이 수억을 헤아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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