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속인 거짓말/서불과차

서불과차, 서복은 불로초 캐러 한반도에 오지 않았다(3)

Que sais 2020. 10. 21.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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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보이는 삼신산>

삼신산은 원래 오신산(五神山)이었는데 대여(岱輿)와 원교(員嶠) 두 산은 대해(大海)속에 침몰되어 방호(方壺), 영주(瀛洲), 봉래(蓬萊) 삼신산만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소호한국인의 시조로도 거론되는 소호김천씨를 의미한다. 그러나 중국측에서는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의 아들로 제위(帝位)에 올라 84년 동안 천하를 다스렸으며 전욱소호의 조카인데 왕위를 계승하여 재위하기 78년이라고 설명되기도 한다. 중국 <산동사회과학원> 이영선(李永先)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불한국에서 진한(辰韓)을 개발, 건설하였고 그 후예들은 한민족에 융합되었다. 그는 일본에서 당지 토착민들과 평화적으로 ()하면서 벼를 심는 방법, 고래 잡는 방법, 누에치고 비단을 짜는 방법, 초약을 채집하여 병을 고치는 방법을 가르쳤다

 

진한은 한국의 삼국시대 전의 원삼국시대를 말하는데 진시황제기원전 3세기를 의미하므로 년대로도 부족함이 없다. 이를 근거로 하면 동남동녀 수천명을 데리고 불로초를 찾아 나선 서불이 배를 타고 동해를 항해하여 한반도 남쪽에 왔으며 그 증거로 남해의 낭아리와 서귀포 정방폭포 바위벼랑에다 서불과차라는 글씨를 새겨 놓았다는 설명이다. 또한 제주도의 서귀포라는 이름도 서불과 연관짓는다. 서귀포서불이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뜻으로 명명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서불동야현(東冶縣)의 해상에서 곧 나패(那覇)에 도착하고, 다네시마(種島)를 거쳐, 세도나이까이(瀨戶內海)를 따라 처음으로 기이(紀伊)에 이르렀다. 이곳 기이에는 서불이 도착기념으로 남겨 논 조각이 있으며, 이국(伊國, 伊勢)의 신궁(神宮)에는 서불의 무덤()과 사당(祠堂)이 있었다고 한다. 즉 이러한 기록에서는 서불이 지금의 남해도에 도착했었다고 명시되지 않았으나, 남해도 내의 여러 곳에 서불의 전설이 남아있어, 서불이 분명 이곳을 거쳐 갔으리라는 추정이다.

한국서불이 지나갔으리라는 추정제주도로 하여금 2003년 제주도 서규포시 정방폭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5,000여 평에 서불공원조성하고 서불전시관개관토록 만들었다. 한마디로 전설을 사실로 인정하겠다는 뜻이다.

서불전시관에는 서불을 알리는 여러 자료와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秦皇島市)가 기증한 서불동도상(徐福東渡像)을 비롯한 조각상 등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서불제주도를 방문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삼신산 중 하나인 한라산(영주산)을 찾은 서불 일행불로초를 찾아보았지만 실패했다고 인식한다. 참고적으로 일부 학자들은 제주도에서 발견되는 시로미와 영지버섯불로초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후 서불서귀포를 떠나는데 풍랑을 만나 표류를 하는 등 악전고투하다가 구사일생으로 끝내는 일본 큐슈 사가현 부바이 해안에 상륙, 사가현 모르토미에서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서 서불벼농사와 고기잡이 방법 등을 주민들에게 가르쳐 주었으며 와카아마 신구시에서 사망했다고 알려진다. 현재 이곳에 서불공원과 야스키신사서불궁 사당이 건립되어 있으며 일각에서 서불이 일본의 초대 천황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국에서 삼신산의 영향은 지대하여 삼신산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바로 전북 남원의 광한루. 소설 춘향전의 무대로 널리 알려진 남원 광한루삼신산 숭배사상의 전형(典型)이라 볼 수 있다. 광한루(廣寒樓)의 정문 문루(門樓)에는 청허부(淸虛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여기에서 청허부라 하는 것은 천상의 백옥경(白玉京, 천제가 사는 곳)을 들어서면 옥황상제가 기거한다는 궁궐을 의미한다.

오작교삼신산과 연결된다. 원래 방장산(지리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끌어 들여 연못을 만들고 이곳에 삼신산을 상징하는 세 섬, 영주(瀛洲), 봉래(蓬萊), 방장(方丈)으로 이들 산을 연결했다. 방장산에서 나오는 맑은 물줄기를 천상의 은하수를 상징하므로 이를 견우와 직녀1년에 한번 77() 이날 밤 은하수를 건너 서로 만나기 위하여 건너간다는 오작교(烏鵲橋)삼신산의 아래에 연못을 동서로 가로질러 설치한 것이다. 현재 영주섬에는 영주각(瀛洲閣), 방장섬에는 방장정(方丈亭)이 세워져 있다. 광한루 삼신산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

 

삼신산(三神山); 삼신산은 신선이 살고 있다는 전설에 의해서 만들어진 섬으로 왼쪽산은 영주산, 가운데 섬은 봉래섬, 오른쪽 섬(오작교옆)방장산이라 일컫고 섬과 섬사이에는 아담한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영주산에는 영주각, 방장산에는 6각형의 방장정이 날아갈 듯 서 있다. 우리나라의 삼신산은 한라산, 금강산, 지리산을 일컫는다.‘

 

광한루 앞에서 삼신산을 보고 있는 자라돌도 깊은 뜻을 갖고 있다. 우선 이 자라는 삼신산을 머리로 이고 있다는 동해의 큰 자라금오(金鰲)를 상징하고 있다. 자라돌에 대해 안내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

 

한서(漢書)발해(渤海)유대(有大)하야 배부삼산(背負三山)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를 연상해서 호중(湖中)에 삼신산인 영주(瀛洲), 봉래(蓬萊), 방장(方丈)선조 15(1599) 관찰사 정철이 만든 뒤 이 고장에 재난이 자주 일어나게 되자 여기에 자라돌을 만들어 삼신산을 지켜보게 한 뒤부터 재난이 없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삼신산한국에 있다면 불로초는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초점이 모인다. 진시황제가 궁극적으로 불로초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많은 인원과 예산을 들여 삼신산을 찾은 것은 불로초라는 식물이 이곳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제주도에서 발견되는 시로미와 영지버섯불로초로 추정하기도 한다. 시로미암고란(岩高蘭)조이(鳥李)라고도 부르며 쌍떡잎식물 무환자나무목 시로미과상록관목이다. 시로미과에 속하는 시로미(crowberry)제주도, 만주, 일본, 사할린, 캄차카 반도, 동시베리아, 북반구 고산지역에 자라며 키는 높이 1020센티미터 정도이다.

줄기는 옆으로 뻗지만 가지는 곧게 서며 잎은 뭉쳐나고 줄 모양이며 길이 56밀리미터, 너비 0.70.8밀리미터이다. 두껍고 윤이 나며 뒤로 젖혀져서 사방으로 퍼지고 가장자리가 뒤로 말린다. 흰 잔털이 나나 곧 없어진다. 꽃은 암수한그루이거나 암수딴그루이며 45월에 자줏빛으로 피는데 양성화 또는 잡성화이고 잎겨드랑이에 달린다. 열매는 장과로서 둥글며 크기는 0.61센티미터 정도이고 89월에 자줏빛을 띤 검은색으로 익는다. 관상용으로 쓰며 열매를 식용할 수 있다. 한방에서는 포기 전체를 방광염신장염 등에 약재로 쓴다. 불로초시로미라는 말에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한라산에서 시로미를 자주 볼 수 있으므로 한국인불로초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저절로 장수의 기운이 높아질 것이다.

참고적으로 유명한 과학전문지 <네이처>지는 불로장생 약초에 대해 적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불로장생 약초는 중국 원산인 황기(Astragalus membranaceus)였다고 한다. 황기한약재이면서도 닭백숙 같은 요리에도 즐겨 쓰는 콩과식물귀한 인삼 대신 사용한다. 황기불로장생 약초였다니 허탈하다는 사람도 있지만 불평할 필요는 없다. 황기도 먹고 인삼도 먹으면 효과가 배가될지 모른다.

 

<서불은 한반도에 오지 않았다>

앞의 설명을 보면 서불이 불로초를 찾아 한국을 방문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것처럼 보인다. 동해와 발해가 한국과 연계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불한국에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사료들을 면밀히 검토한 일부 학자들은 펄펄 뛰며 서불의 한국 방문설을 단연코 부정한다. 한마디로 서불한국을 방문했다는 것은 코미디나 마찬가지라고 단언해서 말한다.

<고조선답사회>김세환 선생서불이 처음에 신선을 찾아 간 곳은 발해였으며 돌아와서 진시황에게 거짓으로 보고하고 동남동녀 3천명을 데리고 간 곳이 동해라는 데는 인식을 같이한다. 그런데 이들 발해와 동해가 한국인이 생각하는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도사린다.

후한서<왜지(倭地)>조에 이주(夷洲)와 단주(亶洲)가 있는데 서불이 마침내 이 주에 머물렀다 했다. 문제는 임해수토지에 이주는 절강성 임해의 동남 2,000리에 있다고 적혀있다는 점이다. 임해에서 동남 2,000 되는 곳에 큰 섬이 있는데 현재의 대만이다. 서불이 바다를 건너 간 이주와 단주는 한반도 남해나 제주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부연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에서 부르는 동해장강하구에서 대만해협까지. 그러므로 이주(夷洲)는 지금의 대만이고, 일본의 이칭(異稱)단주가 없으므로 단주유구군도(硫球群島)의 충승(沖繩) 본도라고 추정할 수 있다.’

 

위 견해에 따르면 한국 남해 낭아리에 있는 암각문을 서불과차라 읽는 자체가 서불일본에 도착했다면 한반도를 통해 일본으로 갔을 것이라는 선입견에서 나온 착각이며 오류라는 설명이다. 특히 서불이 간곳도 일본이 아니라 왜지(倭地)임을 분명히 했다. 왜냐하면 진시황 때에는 왜국은 있었으나 일본국은 없었기 때문이다. 남방 왜인주나라 때에도 북상한 바 있고, 대만과 유구군도는 그들의 북상이동경로이기도 하였다.

남해 낭아리의 암각문 서체서불한국에 오지 않았다는 증거로 제시된다. 우선 낭야리 각석서불이 방문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정인보는 그의 저서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에서 이 암각을 임금() 혹은 장상대인(長上大人)이 수렵(狩獵)을 나와서 산짐승과 날짐승을 잡으며 건너와 이곳에 기()를 꽂았다'는 내용의 고문으로 해석하였다.

또한 사슴 발자국을 보고 만들었다는 녹서(鹿書)는 현재까지 알려진 고대문자 가운데 마야(maya)의 상형문자와 매우 비슷하여 이 녹서(鹿書)의 흔적일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있다. 마야에서도 상형문자를 읽어 나갈 때, 한자와 마찬가지로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읽어 나가며, 숫자를 계산하는 방법도 초기 마야에서는 작대기(-)와 점()으로 이루어진 상형문자가림토정음(加臨土正音)에서 보이는 형태와 마찬가지라고 변광현 박사는 설명했다. 신시시대(神市時代)의 전각으로 한글(훈민정음)의 모델로도 설명되는 가림토의 초기단계일지도 모른다는 설명도 있지만 적어도 서불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진시황이 통일하기 전 각 국의 글이 달라 소통에 문제가 있자 대전(大篆)을 소전(小篆)으로 자형을 통일시켰다. 서불이 동남동녀를 데리고 바다에 들어가 돌아오지 않은 해는 기원전 210이었으므로 서불소전을 습득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만약 서불한반도의 남해에 왔다고 한다면 그는 의당 소전으로 각자했을 터인데 남해의 암각문소전의 서체가 아니므로 서불한국의 남해나 제주도에 온 적이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삼신산발해에 있다고 믿은 이유에 대한 설명도 흥미롭다.

산동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봉래시봉래각이 있는데 이곳은 여덟 신선이 바다를 건넜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곳으로 중국의 신선사상의 근원지라고 알려진다. 학자들은 이곳 산동반도가 신선사상의 근원지가 된 이유를 그동안 부단히 찾았는데 근래 그 증거를 제시했다. 다소 아쉽기는 하지만 학자들이 제시한 증거는 신기루(蜃氣樓) 현상이다. 19881시간 넘게 지속된 신기루 현상이 포착되었는데 마치 커다란 궁궐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신기루는 해수면의 기온차로 생기는 착시현상인데, 옛날 신선을 신봉하던 중국인들에게는 이 신기루가 바로 신선들의 세상으로 비쳤다는 것이다. 진시황도 이곳 봉래각에 세차레나 올랐으니 신기루를 보고 신선이 바다 안에 있다고 믿고 불로초를 더욱 갈망하여 서불로 하여금 삼신산을 갔다 오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신기루삼신산으로 착각했다는 설명이다.

<고조선답사회>에서 중국에 있는 서불의 유적지를 찾았다. 하북성 진황도(秦皇島)는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산해관이 있는 곳으로 유명한데 진황도라는 이름은 서불을 출발시킨 항구라는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산해관의 진시황에 대한 역사는 진황도의 동산공원에서 보이는데 동산공원진시황이 불사약을 구하려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이다. 동산공원 정문을 들어서면 진시황제의 거대한 마차군단이 보이는데 마차군단진시황제가 탄 마차를 선두로 문무백관들이 마차를 타고 가는 모습을 조각한 대형 조각상이다. 명나라 헌종이 세운 진황구선입해처(秦皇求仙入海處)라는 비석이 있다. 바닷가에는 신선에게 장생불사를 기원하던 진시황의 조각상을 세워놓았는데 높이 6m, 무게가 80t이나 된다.

진황도에서 북서쪽으로 약 3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갈석산(碣石山)진시황의 신선 놀음의 주무대로 등장하는데 갈석산한국과 크게 연계된다. 갈석산은 산 전체가 바위로 이루어져 얼핏 보면 산 전체가 한 뭉치로 보이는데 이 지역이 한국학자들에게 큰 주목을 받는 것은 고조선의 중국 남쪽 하한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갈석산고조선의 신시가 있었다는 주장도 한다. 이곳은 진시황()나라 출신 노생을 파견하여 신선으로 알려진 선문과 고서를 찾아보라고 했을 정도로 신선에 관한 전설이 많은 곳이다. 갈석산 입구에 진시황 때의 것은 아니지만 비석이 남아있는데 산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먼 발치에서 보아도 알 수 있다. 갈석산1800년 전 조조가 주둔했다고도 알려지는데 중국에서도 워낙 ()가 센 곳으로 알려져 기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산동성에는 진시황이 태산에서 봉선의식을 치룬 낭야대가 있다. 진시황제는 이곳에 행궁을 짓고 석 달 동안 머물렀는데 서불진시황의 명을 받아 불로초를 구하러 나간 동기를 기록한 서불의 출항기념비낭야대 바닷가에 세워져 있다.

진시황이 세 차례나 왕림했던 봉래각도 산동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봉래시 바닷가 위에 있다. 이들 낭야대나 봉래각에서 내려다보이는 동쪽바다 위에 신기루현상이 봄가을에 일어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들 신기루를 보고 신선들이 살고 있는 삼신산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생각한 것을 무조건 나무랄 일만은 아니다.

 

참고문헌 :

[부산경남] 진시황의 방사(方士) 서복의 일생일대와 불로초의 비밀을 밝힌다, 장대우, 남해연합뉴스, 2009.08.21.

진시황이 찾았던 불로장생 약초는 바로 이것!, 강석기, 더사이언스, 2012.08.15.

오래된 문명을 찾아서 대륙을 누비다, 김동률, KTX magazine, 2012.10

동북아시아의 암각화, 황용훈, 민음사, 1987

마야-잃어버린 도시들, 클로드 보데 외, 시공사, 1996

바다의 실크로드, 양승윤 외, 청아출판사, 2003

환상박물관, 김장호, 개마고원,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