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 노벨상이 만든 세상/콜타르

황제의 보라색, 악성 폐기물 콜타르(2)

Que sais 2020. 10. 22.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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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엽에 이르면 공기가 없는 상태에서 석탄을 가공해서 만든 코크스가 산업용으로 중요하게 활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1톤의 석탄을 처리하여 코크스를 만들면 30리터의 콜타르라는 검은색의 끈적끈적한 액체가 생긴다. 그중 일부는 철도 침목을 만드는 목재 보호재나 도로 포장용으로 사용하지만 대부분 처리가 어려운 산업폐기물이었다.

독일의 화학산업을 이끈 유스투스 폰 리비히(Justus von Liebig, 18031873))는 머지않아 콜타르에서 염료를 비롯한 여러 약품이 만들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그의 예언은 맞았지만 콜타르에 대한 이용방법은 독일이 아니라 영국에서 이루어졌다. 리비히는 화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학자 중의 한 명이므로 좀 더 설명한다.

리비히는 중앙 독일 헷슨주의 다름스타트에서 의약품이나 염료를 제조판매하는 중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화학 약품상을 하므로 스스로 화학실험을 하는 아마추어였는데 집안에서 이런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의 실험을 도우는 등 리비히도 학자가 되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화학에만 관심을 기우렸으므로 다른 과목에는 뒤쳐저 성적은 학급에서 최하위였다. 선생이 이런 리비히를 불러놓고 장차 무엇이 되겠느냐고 화를 내자 그는 곧바로 화학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말에 학급 학생들이 대통 웃어 난장판이 될 정도였다. 당시 마을에서 화학자라면 약종상의 도제라든가 염직업의 노동자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리비히는 화학에 관한 한 남달랐다. 13, 14살 무렵 어느 날 동네에 시장이 열렸는데 그곳에서 기폭제로 사용되는 뇌관이 수은과 질산, 알코올로 되어 있는 것을 알고 여러 실험을 거쳐 거의 비슷한 수준의 뇌관을 만들었고 아버지 점포에서 판매했다고 한다.

학교 성적은 좋지 않지만 리비히의 화학에 대한 재주는 주 정부에 알려져 국비생으로 17살 때 본 대학에 입학했고 이후 에르랑겐 대학으로 옮겼지만 실망만 하고 있었다. 당시 이들 대학은 독일자연철학의 영향으로 실험연구를 하지 않고 추상적인 사고를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결국 리비히는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으로 옮겼는데 이곳에서는 화학 교수들이 이론 뿐만 아니라 실험도 병행했다. 이후 독일의 유명한 언어학자 훔볼트의 소개로 게이 뤼삭의 연구실로 들어갔는데 그의 나이 19살 때이다. 그가 21살의 나이에 기슨 대학 교수로 임명된 것도 훔볼트의 역할인데 훔볼트는 독일이 실험과학을 장려하지 않으면 낙후한다고 부단히 강조했고 그 일환의 후배가 리비히였다.

리비히에 대해서는 화학과 생리의학 분야에서 각각 따로 다뤄지지만 리비히가 남다른 것은 연구자인 동시에 교육자로 명망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선 학생들에게 많은 실험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고 가장 놀라운 조처는 화학 실험실을 개방했다는 점이다. 이는 다른 교수들이 생각하지 못한 일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곳의 학생들은 스스로 연구하면서 배우고 익혀야 한다. 나는 문제를 주고 연구의 성과를 감독하지만 결코 간섭하지 않는다. 나는 학기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학생으로부터 각자가 전날에 연구한 결과를 듣거나 이제부터 할 일에 대해서 의견을 듣는다. 그리고 나는 그것에 찬성하거나 반대한다. 각 학생들은 스스로 연구를 해나갈 의무가 있다.’

 

리비히 교수가 있는 기슨 대학의 화학교실 평판은 곧 국내외에 알려져 영국, 러시아, 미국, 멕시코 등지에서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이 대학의 평판이 얼마나 높은가는 기슨대학 화학교실을 거쳐 간 학자로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화학자는 30여 명이 된다고 한다. 가히 노벨상의 산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리비히는 1824년부터 27년간 기슨대학에서 근무했고 많은 곳에서 그를 초청했지만 모두 사양했다. 1845년 리비히는 세습남작이 되었는데 1852년 바이에른 국왕이 직접 뮌헨 대학으로 초청하는 것은 거절할 수 없어 자리를 옮겼다. 리비히는 과학자이면서도 뛰어난 문장력을 갖추고 있어 농예화학의 원리, 농업의 이론과 실제많은 책을 저술했고 자신 단독으로 발표된 논문만도 300편 이상이 된다.

리비히는 불의를 보면 불과 같은 성격을 내지만 기본적으로는 매우 원만한 태도를 견지했다. 그가 사망하기 2년 전 1871년 보불전쟁이 끝났는데 리비히는 다음과 같이 정부를 설득했다고 한다.

 

반 세기 전에 우리들은 프랑스로부터 참지 못할 만큼 쓴잔을 마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쓴잔을 들고 있는데 이러한 싸움이 반복되어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독일의 과학은 프랑스로부터 큰 혜택을 받았습니다. 나 자신도 프랑스의 게이 뤼삭 선생으로부터 받았던 은혜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독일 과학은 프랑스 과학과 나란히 걷고 있습니다. 우리 과학자가 앞에 나서 프랑스에 대한 화해의 손을 내밀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국가 농산물 증진을 위해 화학비료의 사용을 적극 권장하여 독일의 식량 문제 해결에 큰 공헌을 했다. 그의 말년은 매우 평온하여 사실 학자로서는 남다르게 복을 받은 사람 중의 한 명이다. 18734월 초, 감기에 걸린 후 폐렴으로 진행되 10여일 후 영원히 잠들었다. 그가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가 사망한 후 비로소 노벨상이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런던에 있는 왕립과학대학의 독일인 강사 호프만(August Wilhelm von Hofmann)은 콜타르를 사용하여 말라리아를 치료하는 데 사용되는 퀴닌의 합성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었다. 콜타르로부터 얻은 물질의 조성이 키니네와 매우 비슷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호프만은 당대의 최고의 화학자로 영국왕자 앨버트의 초청으로 왕립과학대학에서 연구하고 있었다.

이 당시까지 말라리아에 유일하게 효과적인 키니네(퀴닌)는 동인도(인도네시아)에서 자라는 키나나무 껍질에서만 얻을 수 있었으므로 키니네를 인공적으로 합성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호프만은 당시에 퀴닌의 구조식도 밝혀지지 않았고 단지 원자 조성만이 알려져 있었는데, 그는 17세의 조수인 퍼킨(Sir William Henry Perkin, 18381907))을 합성 퀴닌 연구에 참여하게 했다.

퍼킨은 제철 공업의 값싼 부산물인 콜타르에서 나오는 톨루이딘을 원료로 해서 당시에 유행했던 가감범을 사용하여 키니네를 합성하려고 했다. ‘가감법이란 출발원료와 목적원료의 단순한 분자식 차이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알려져 있던 알릴톨루이딘(C10H12N)과 키니네의 분자식의 차이에서 퍼킨은 톨루이딘에 몇 개의 탄소원자와 수소원자를 가하고, 그 후에 산소원자를 몇 개를 가해서 원소의 형과 수를 키니네와 같게 하면 키니네를 합성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퍼킨은 처음에는 3개의 탄소와 4개의 수소를 알릴(allyl)()로 해서 톨루이딘에 가한 다음 강력한 산화제인 2크롬산칼륨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그가 얻은 것은 키니네가 아니라 더러운 적갈색의 끈적끈적한 물질이었다.

그는 알릴톨루이딘 대신에 아닐린을 써서 역시 끈적끈적한 검은색 물질을 얻었는데 이번에는 진홍색의 광택이 있었다. 이 물질을 알코올에 넣자 무색의 액체가 아름다운 연보라색으로 변했다.

 

사실 퍼킨이 사용한 아닐린은 소량의 톨루이딘을 함유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보랏빛 염료였다. 바로 이 보랏빛이 염료업계에 획기적인 전환기를 가져오게 되는데, 놀라운 것은 퍼킨 자신이 보랏빛의 미래를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는 점이다.

그는 이 보라색 용액이 천을 물들인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 합성 염료의 샘플을 영국의 염료 공장으로 보냈다. 공장에서는 퍼킨이 보낸 재료로 실험한 결과 명주를 염색하는 데에는 매우 유망하지만 무명에는 잘 맞지 않았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그러나 퍼킨은 전()처리를 하면 이 물질을 무명에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퍼킨은 이 보라색 물질이 염료로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특허를 신청했다. 그의 나이 18세 때였다.

 

역사 시대 초기부터 인간은 직물들을 염색했다. 사하라의 선사 시대 암벽화에도 사람들이 채색된 옷을 입고 있으며 아나톨리아(현재의 터키)의 고대 벽화에는 채색된 직조 카펫처럼 보이는 것이 나타나 있다. 염료들은 보통 식물에서 얻어 옷이나 직물을 담가서 물들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청색 염료들은 대청이나 쪽으로부터, 황색은 석류나 엉거시과의 1년초인 잇꽃 및 사프란으로부터, 적색은 다년생 만초인 꼭두서나 헤나로부터 추출되었다. 적색 염료인 연지는 동물로부터 얻어졌다. 이 당시까지 보라색은 가장 소중히 여겨져 온 색이었다. 보라색은 로마의 왕족이나 최고위층에 있던 사람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색으로 비잔틴 제국에서는 황제의 아들로서 태어난 황제를 자주색에서 탄생한이란 의미의 자주색의 자손(porphyriogenatos)’이라 불렀으며, 보라색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사형을 당한 사람이 있었을 정도였다. 가격 또한 매우 비쌌는데 그 이유는 티리안퍼플(보라색)인 경우 조개 1만 개에서 고작 1그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키니네를 합성하려다 엉뚱한 결과를 얻게 된 퍼킨은 놀라운 순발력을 보인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보라색 용액이 천을 물들이는 것을 발견하고 이 합성염료의 샘플을 영국의 염료 공장인 폴라스 사에 보냈다. 퍼킨이 보낸 재료로 실험한 폴라스 사에서 다음과 같은 낙관적인 답장을 보내왔다.

 

당신이 발견한 물질이 상품을 너무 비싸게 하지만 않는다면 이것은 이제까지 나온 발견 중 가장 값진 것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이 색은 모든 상품의 염료로 그 동안 기다렸던 것입니다. (중략) 여기에 섬유에 염색한 가장 훌륭한 라일락 문양을 동봉합니다. 이것은 영국에서 오직 한 공장에서만 염색할 수 있는데 이것도 실제는 당신의 색과 비교해 오래가지 않으며 공기에 노출되면 바래집니다.’

 

폴라스 사는 퍼킨의 염료가 실크를 염색하는 데에는 매우 유용하지만 무명에는 잘 맞지 않았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퍼킨은 곧바로 무명을 염색하는 연구에 돌입했고, 곧바로 간단한 처리를 하면 이 물질을 무명에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퍼킨은 자신이 발견한 보라색 염료로 특허를 신청했다. 그의 나이 18세 때였다. 뒤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특허청 내에서는 미성년자에게 합법적으로 특허를 허가할 수 있느냐 하는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인류 최초의 인공 염료가 개발된 과정이다.

당시 염료는 천연 재료에서 추출해야 했으므로 매우 가격이 비쌌다. 퍼킨은 자연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운 빛깔의 아닐린 퍼플이라는 염료를 만들어 프랑스 들판에 피는 보라색 들꽃의 이름을 따라 모브(mouve)’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새로운 염료는 햇빛에도 쉽게 색이 바래지 않았다.

퍼킨은 자신이 발견한 염색재료의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 그가 새로 발견된 염색재료를 대량 생산하기 위해 지도교수인 호프만 교수에게 학교를 떠나겠다고 하자 호프만은 극구 만류하며 세계 최고의 명성을 갖고 있는 학교를 떠난다면 파멸에 이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퍼킨이 학자로 성공할 수는 있어도 사업에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는 사업에는 전혀 경험이 없는 20살도 채 안 된 어린 청년이었다. 호프만 교수의 조수라는 것만으로도 학자로서의 미래는 보장된 셈이었다. 퍼킨이 충실하게 호프만 교수를 거들면서 연구에 몰두했다면 편안하게 호프만 교수처럼 유명인사가 될 터였다.

그러나 퍼킨은 자신이 개발한 염색 재료가 그동안 세계인들이 원하는 바로 그 물질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유럽인들을 열광시킬 매혹적인 보랏빛 모브를 산업화시킬 수만 있다면 그 대가는 달콤할 것이라는 전망을 갖고 있었다.

결국 퍼킨은 부친과 형제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자신의 아이디어를 제품화했다. 제품 생산 연구 과정에서 실험용 용기들이 열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하는 사건도 있었지만 벌어들이는 돈으로 이러한 장애를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퍼킨은 곧장 모브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는 없었다. 우선 아닐린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이 문제였다. 엄청난 자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보통 아닐린은 벤젠으로부터 니트로벤젠을 만들고 그것을 환원해서 만드는데 이 과정에 많은 질산이 필요했다. 그는 특별한 장치를 고안해서 칠레 초석과 황산을 반응시켜 질산을 만들어 아닐린 대량생산의 길을 열었다.

1856년까지 문명세계에서 사용된 염료는 1213가지 정도로, 자연적 물질이나 생물체에서 채취해왔다. 그런데 퍼킨이 단숨에 그 귀하고 값비싼 보라색을 인공적으로 합성했다니 세계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퍼킨에게는 절묘하게 운이 따랐다. 1859년 보라색 색상이 패션업계를 강타했는데 플아스 왕후 외제니를 위시하여 프랑스 궁정이 가장 선호하는 색상이 되었다. 더구나 영어사용권에서 가장 고귀한 여성 빅토리아 여왕이 퍼킨의 보랏빛 물감에 매혹되어 공주의 결혼식에 모브 드레스를 입고 나갔으며 1862년 만국박람회의 개막식에 라일락 빛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 많은 여성들의 선망의 눈길을 받았다. 그 연보랏빛 드레스가 바로 퍼킨의 염료로 염색한 것이었다. 모브의 인기가 얼마나 높은 지 1860년대를 모브 시대로 부르며 급기야 모브는 1880년대 후반까지 영국 우체국의 일부인(日附印) 잉크로도 사용되었다.

그후 각국의 왕실 여성들에게 보라색이 대유행이 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로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결혼한 알렉산드리아도 페테르스부르크 근처에 있던 차르스코예셀로 궁전 내 자신의 내실을 완전히 연보라색으로 꾸몄다. 이 방의 양탄자, , 베개, 커튼, 가구 등 모든 것이 연보라색이었다. 한마디로 이 방이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방이 되었으며 보라색은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색이 되었다. 보라색의 유행은 고스란히 퍼킨의 재산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