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그래?(한국불가사의)/세조의 문종 살해?

세조의 문종 살해?(II)

Que sais 2020. 9. 9.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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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관 전순의의 이상한 문종 치료>

 

조정에서는 전순의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전순의의 방면은 사건을 오히려 확대케 하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동년 427일 본격적인 상소가 들어오는데 이때부터 과거와는 달리 의관 전순의에 대한 의학적 처방이 옳지 않았다전문적인 죄상이 낱낱이 밝혀진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전순의의 죄상은 다음과 같다.

 

허리 위에 종기는 비록 보통 사람이라도 마땅히 삼가고 조심하여야 할 바인데, 하물며 임금이겠습니까? 움직이는 것과 꿩고기종기에는 금기하는 것인데, 전순의가 문종께서 종기가 난 초기에 사신의 접대와 관사(觀射) 등 모든 여러 가지 운동을 모두 해로움이 없다고 생각하였고, 이어서 구운 꿩고기를 바치기에 이르면서도 꺼리지 않았습니다. 종기()하면 침으로 찌를 수 있으나 농하지 아니하면 침으로 찌를 수가 없는데도, 전순의는 침으로 찌르자고 아뢰어서 끝내 대고(大故)에 이르게 하였으니, 비록 의원을 업으로 하지 않는 자라 할지라도 방서(方書)를 펴서 보면 일목요연한 일임에도 하물며 의원인 전순의가 이를 알지 못하였다니 마땅히 극형에 처하여야 합니다.’

 

전순의의 죄상은 곧바로 확대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전순의의 죄상이 실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견 때문이다. 51대사헌 기건(奇虔) 등은 문종 치료에 있어 전순의의 이상한 행동을 적나라하게 적시하면서 탄핵했다.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질병을 치료할 때 조심해야 하며 약이(藥餌)는 반드시 금기하는 것이 있으므로 치료를 잘못하고 금기를 범하면 그 병이 심해져서 마침내 구료할 수가 없게 된다. 문종의 병환 초기에 내의 전순의는 자신만 믿고 여러 의서를 널리 찾아보지 아니하고, 왕에게 사신들을 문밖까지 전송하는 것이 해롭지 않다고 하여 왕이 사신들을 문밖까지 전송하도록 하여, 종기의 증세를 더욱 심하게 하였다. 왕의 병환이 이로 인해 심해졌음에도 이때도 오히려 해롭지 않다면서 수라상에 식료(食療)를 또한 꺼리지 않아 종기를 보다 악화시켰다. 더욱이 전순의와 최읍변한산은 내진을 보고 침으로 종기의 입구를 따고 외부 신하들에게 공개적으로 왕은 며칠 안되어 회복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정황을 잘 모르는 대소신료들은 왕이 곧바로 완쾌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갑자기 안가(晏駕)했다. (중략) 독이 있는 종기는 처음에는 미미하게 나타나며 등에 있는 것은 더욱 독이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터인데도 전순의는 해가 없다고 하였다. 특히 등창이 났을 경우 몸의 기운을 피로하게 움직이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인데도 전순의는 이를 알리지 않았다.

식물의 성질이 반드시 병과 서로 반대되면 해로움이 있는 데 특히 꿩고기등창에서 가장 크게 금함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치구(雉灸, 꿩고기 구이)를 왕이 먹도록 했다. 또한 등창에서는 ()하여 터지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데, 그것이 농하지 아니하였는데 이를 침으로 찔러서 그 독을 더하게 하였다. 전순의 등은 이런 내용이 모두 방서에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왕의 병을 경솔하게 다루었으니, 마땅히 일족의 주멸()하는 것이 마땅하다.‘

 

전순의는 문종을 치료할 때 치유가 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화시키는데 역점을 두었다는 것으로 같은 날 사인(舍人) 예장(李禮長)은 당장 전순의로 하여금 내의원에 출사치 못하게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워낙 전문적인 내용으로 전순의를 탄핵하자 왕도 이예장의 건의에 따라 전순의가 내의원에 출사치 못하게 했다.

전순의는 현대로 따지면 해직된 것인데 이때도 전순의에게 호의적인 측근이 생긴다. 전순의가 고의로 문종의 사망을 앞당기게 했을지 모른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음에도 512우참찬(右參贊) 이사철(李思哲) 등은 전순의에게 고의성이 없으며 이미 죄를 받았으므로 추론(追論)이 불가하다고 옹호했다.

전순의의 행동이 고의냐 아니냐로 신하들의 의견이 180도 다르게 나눠짐에도 불구하고 전순의의 의료사고에 대한 논란은 계속 이어져 515지평(持平) 유성원(柳誠源)은 전순의에게 4가지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있으므로 마땅히 참형해야하지만 그와 같이 할 수는 없다면 관노(官奴)로 소속시키고 자손들은 폐고(廢錮)시켜야한다고 상소했다.

유성원의 상소는 집요하여 524일 보다 구체적으로 전순의를 벌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선 전순의에게 내약방(內藥房)에 출사하지 말도록 한 것 즉 해직시킨 것으로는 부족한데 그 이유는 그의 죄가 종묘 사직과 국가에 관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왕이 죄를 추론할 수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최소한 그의 가산을 적몰하고 아울러 처자를 관노로 영속(永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전순의에 대한 처우는 다음해에 급변한다. 단종 2(1454) 219, 병조(兵曹)를 통해 전순의최읍변한산에게 오히려 고신을 환급했다. 벌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음에도 오히려 그들에게 씌여졌던 모든 족쇄를 풀어 준 것이다.

전순의 등에 대한 소위 복권에 신하들이 이번에는 더욱 벌떼와 같이 일어났지만 일단 떨어진 방면 조처에 대한 취소는 내려지지 않았다. 단종전순의 등이 문종 사망에 고의성이 없고 또 죄를 받은 지가 이미 3년이나 되었으므로, 세종 때 노중례의 경우를 보아 고신을 주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좌사(左司諫) 조어(趙峿) 등은 단종의 명에도 계속 전순의에게 고신을 준 것이 문제점 있다고 상소하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전순의의 죄상을 적었다. 그의 상소는 앞에 설명된 전순의 죄목과 중복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다시 정리한다.

 

신들이 의원 전순의, 변한산최읍 등에게 고신을 도로 주는 것이 옳지 않다고 두 번이나 건의했는데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신 등이 생각하건대, 종기를 치료하는 방법은 처음 발병했을 때 먼저 노동을 삼가야 하고, , 음식물을 반드시 조심해야 하며, 금기해야 할 것은 날마다 삼가야만 하루라도 약력(藥力)의 효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종)나타난 처음에 전순의 등이 항상 입시(入侍)하면서 증세만 진찰하고, 방서를 삼가 살피지 않았으며, 또 여러 대신에게 의논도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만으로 종기의 증세가 대단치 않다고 말하면서 대신이 문안할 때마다 증세가 순조롭다면서 며칠 안으로 완쾌될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사신의 접대와 관사(觀射)진선(進膳) 등의 일을 하나도 삼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곪지 않은 종기는 침으로 종구(瘇口)를 째서 그 독을 더 누그러지게 해야 되는데, 대소신료들로 하여금 모두 종기의 증세가 위태한 줄 모르게 하고, 그 달 13일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말하기를, ‘증세가 순조롭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갑자기 문종이 사망하여 일국의 신민들에게 더할 수 없는 슬픔을 남기게 하였으므로 왕의 질환을 소홀히 하고 불경한 죄는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의금부에서 ()을 상고하여 아뢰었고, 대간(臺諫)에서 법에 의하여 처치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고, 다만 벼슬을 삭탈하여 귀양을 보낸 후 1년 만에 이르러 석방하고, 지금 또 두 돌이 못되어 그 고신을 주니, 신들이 통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략) 그 들의 죄가 노중례(盧重禮) 의 죄와 같다하지만 노중례선왕(先王)에게 죄를 지어 선왕이 용서한 것이고, 지금 전순의 등은 선왕의 병환을 삼가지 아니하여 선왕께 죄를 지은 것으로 죄상이 같을 수 없습니다.‘

 

큰 틀에서 문종의 사망은 전순의의 치료 상에 나타나는 불충과 실수에 의한 것이므로 그를 처벌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이다. 문종이 사망했을 처음에는 의원으로서 왕이 사망했으므로 당연히 죄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었지만 그후 제기되는 그에 대한 죄목은 치료 상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전순의의 죄로 문종이 사망하게 되었다는 뜻과 다름없다. 앞에 제시된 조어의 상소에 나타난 전순의의 죄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종기치료방법에는 처음에 노동을 삼가고, 음식물을 조심해야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입시하여 증세만 진찰하고, 방서를 살피지 않았으며, 여러 신하와도 상의가 없었다.

항상 종기의 증세가 대단치 않다고 말하고

대신들이 문안할 때마다 늘 증세가 순조롭다. 며칠 안으로 평복(平復)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신의 접대와 관사(觀射)진천(進膳) 등의 일을 하나도 삼가시라고 하지 않았고

화농한 종기의 끝을 침으로 째서 그 독을 더 누그러지게 해야 되는데, 소 신료들로 하여금 종기의 증세가 위태한 줄 모르게 하고

문종이 사망하는 전 날 조차, ‘증세가 순조롭다.’ 했는데 다음 날 갑자기 사망했다.

 

전순의에 대한 문종 치료의 문제점 즉 전순의가 문종을 독살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계속 제기되는데 단종을 이어 세조가 들어서자 상황은 180도 바뀐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전순의는 계속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면서 세조의 총애를 받는 부러운 신분으로 상승하는 것이다. 세조실록에 기록된 전순의에 대한 내용은 무려 18건이나 된다. 다음은 전순의세조로부터 얼마나 총애를 받았는지를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영화 관상중 세조(수양대군)

세조 1(1455) 816, 왕이 크게 웃으며 장난삼아 이구로 하여금 주먹으로 이계전을 때리게 하니, 신숙주내가 만약 손으로 때리게 되면, 비록 명의(名醫)로 이름난 전순의임원준 같은 사람이 좌우에서 서로 교대하며 구호한다 하더라도 끝내 효험이 없을 것이다.”라 말했다. 세조 1년에 상호군 전순의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해지며 다음해에는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익년에는 난신들의 전지를 대호군(大護軍) 전순의에게 내려주었다. 세조 8(1462)에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세조 10년에 자헌대부(資憲大夫)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었. 세조 12(1466)에는 세조가 전순의를 얼마나 총애하였는가는 세조가 전순의(全循義) 등으로 하여금 대궐에 들어와 대렵도(大獵圖)의 노름을 하도록 하고 이를 구경하였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전순의 문종 치료의 의학적 해석>

전순의고의적으로 문종을 살해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문종의 병에 대한 의학적 소견 때문이다. 종기는 원래 고량진미를 과식할 경우에 생기며 초기 치료를 잘 하면 사망까지 이르는 병은 아니라고 의학자들은 말한다. 그런데도 문종이 종기로 사망한 것은 원래 몸이 약한 점도 있었지만 매우 특이한 예라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적힌 것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전순의의 죄목은 크게 3가지.

제일 먼저 종기가 번성했을 때 움직이는 것을 크게 금기하는데 전순의는 문종으로 하여금 사신들을 접대하는 연회 참석을 금해야 한다고 말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국왕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번거운 절차를 요구하는 사신들을 접대하는 것은 건강한 사람들에게도 벅찬 일인데 환자를 혹사시켜 병환이 깊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종기가 이미 화농되었을 때는 침을 써서 배농시키지만 초기 증상에 쓰면 도리어 증상이 악화되고 염증이 심화되는데 전순의는 화농되지 않은 종기를 고의적으로 건드려 증상이 보다 악화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특히 당시에는 지금같이 정교한 침이 아니므로 환처에 강한 자극을 주면 증상이 악화되는 것이 상례인데 전순의가 이런 기초 지식을 모두 무시하면서 문종에게 비상식적인 처방을 한 것은 고의가 아니면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세 번째는 보다 구체적으로 전순의가 문종을 독살했음이 분명한 증거이다. 원래 꿩이나 닭, 오리고기는 껍질에 기름이 과다하여 종기가 났을 때 금기로 치는데도 불구하고 의관인 전순의는 특히 문종에게 독성이 있는 꿩고기를 계속 먹게 했다는 점이다. 이 점이 문종의 독살에 심증을 더해준다.

 

문종실록

문종이 독살되었을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은 꿩고기의 특성 때문이다. 은 독성이 강한 반하(半夏, 천남성과의 다년초)를 매우 즐기는데 문종과 같이 종기가 있을 경우 반하를 먹은 꿩고기를 먹으면 치명적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반하와 꿩고기에 대한 의학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허준의 동의보감에 나와 있는 반하의 설명을 보자.

 

반하는 성질이 ()하고(생것은 약간 차고 찐 것은 따뜻하다) 맛은 매우며 이 있다. 상한의 한열에 주로 쓰며 명치에 담열(痰熱)이 가득한 것과 해수상기담연을 없앤다. 식욕을 돋우고 비를 좋게 하며 구토를 멎게 하고 가슴속의 담연을 없애며, 학질을 치료하고 낙태시킨다. 삼소(三消)와 혈허, 목구멍이 마르고 아픈 사람, ()이 말라 대변보기 어려운 사람, 땀이 많이 나는 사람모두 쓰면 안 된다.’

 

한편 중국의 중화본초에는 반하의 독성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적었다.

 

반하유독식물로 한방에서 의료용으로 사용시에는 언제나 가공처리를 하여 치료제로 활용해야하며 이 약 속에 들어 있는 단백질 성분은 임신저해작용, 항혈액응고, 항세포분열작용 등을 초래한다. 반하거담작용 구토를 진정시키는 약물로 제독 시에 반드시 상극관계에 있는 생강즙에 12시간 담가 두었다가 볶아서 쓰고 생것은 독성이 강하여 외용약에만 응용하며 또 다른 제독 법백반 물에 7일간 담갔다가 볶아서 사용한다.’

 

 

반하가 기록된 중화본초

종기가 난 문종에게 반하가 가장 극성할 때 잡은 꿩고기를 먹였다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설명으로 꿩고기에 대한 의학적 해석은 다음과 같다.

 

꿩고기는 음력 12겨울철에만 먹는데 그 이유는 꿩이 반하를 즐겨 생식하므로 겨울에는 만물이 다 얼어서 반하를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절기에 꿩고기를 먹으면 독성이 없고 안전하여 겨울에만 먹는다. 만약 반하의 독성이 강한 봄 여름 가을에 먹으면 이내 독성반응을 일으켜 혀와 인후마비 음성이 변하고 침을 흘리며 미각상실 메스껍고 구토 가슴이 뻑뻑하고 호흡장애가 오며, 복통 인후경련 사지마비 혈압하강 간기능 손상 콩팥 기능 손상이 나타나고 종래에는 호흡중추마비사망케 된다.’

 

꿩고기를 겨울철에만 먹으라고 하는 것은 야생에서 반하가 잘 자라는 여름에 꿩고기는 독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와 같은 내용을 잘 알고 있을 전순의가 이를 무시하고 문종에게 계속 섭취토록 했다는 것은 고의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처방이라는 설명이다. 문종을 치료하면서 전순의의 행동이 매우 이상했다는 것은 문종이 사망하는 당일문종실록의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다.

 

반하를 잘먹는 꿩

 

이때 의정부의 대신들이 임금의 병환이 위급한 때를 당하여, 본부(本府)에 앉아서 사인(舍人)을 시켜 안부만 물었을 뿐이고, 한 사람이라도 임금을 뵈옵고 병을 진찰하기를 청하지는 않고서 범용(凡庸)한 의관에게만 맡겨놓고 있었으니, 그때 사람들의 의논이 분개하고 한탄하였다

 

만약에 전순의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임종 직전의 문종을 보았다면 그의 비정상적인 용태를 알아차렸을 것이 틀림없다. 전순의당대의 명의로서 세계 최초의 온실에 대한 기록이 있는 산가요록, 의학대백과사전인의방유취, 식료찬요등을 저술하고 의술과 강의에 충실했던 의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순의시대적 상황을 예지적으로 명확하게 판단하여 문종의 병증을 더더욱 위독하게 만들어서 병증이 심화되게 하여 결국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상황은 왕의 주치의관으로서 그야말로 비상식적인 처신이다.

문종은 등극하기 전부터 병약하여 주변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므로 문종이 일찍 병사한다하더라도,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상황이다. 때문에 마침 문종의 종기 치료를 두고 세조의 사주를 받은 전순의가 교묘한 의술을 이용해 문종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여기에서 당연히 제기되는 의문은, 의관 혼자서 이와 같은 비상식적인 행동을 했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사주에 의해 문종이 독살되었다는 가설은 바로 이 대목에서 성립한다.

문종의 사망과 관련하여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였음에도, 또 별다른 공을 세운 바도 없이 전순의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1등 공신 책록에 올랐다. 이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전순의세조와 사전 공모해 문종의 병증을 더욱 위독하게 만들어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생긴다. 물론 전순의가 어떠한 경로로 세조와 결탁하여 문종 살해에 적극 가담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그러나 세조 왕권을 찬탈하기 위해서는 문종이 보다 빨리 사망할 필요성이 있었다는 시각이다. 단종의 나이가 성년에 이르러 친정을 하게 되면 자신의 야욕은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었다. 전순의가 눈치 빠르게 세조 편을 들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전순의의료인이자 정치인이었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문종 사망 후 전순의의 행보>

어떤 연유로 당대 최고의 의관이 의사로서의 직분을 어기고 문종을 보다 빨리 죽도록 처방했겠느냐에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 임금의 치료전담하던 의관들은 왕이 사망하면 질병을 잘못 다스렸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당하는 것이 관례였다. 전순의와 함께 의방유취를 저술한 노중례중궁과 수양대군의 질병을 잘못 다스렸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직위가 강등되는 수모를 당했고 효종(161959)이 사망하자 의관 신가규사형을 당했다.

그러나 단종 원년에 관례대로 의금부에서 전순의의 죄를 논했음에도 그에 대한 단죄는 그야말로 솜방망이였다. 단종 1(1453), 14전순의, 조경지, 전인귀3명은 방면되고 전순의는 내의원에 다시 출사한다. 탄핵된 지 채 7개월도 지나지 않은 때이다. 이에 불복한 신하들은 방면과 내의원 출사가 불가하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거절됐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상소가 끊이지 않아 전순의에 대한 처벌내의원에 출사하지 말라는 것이 고작이었다. 특히 전순의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으므로 가산을 몰수, 처자를 관노로 영속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단종 2에는 고신과 과전을 돌려주기까지 했다. 전순의는 완전히 면죄부를 받은 것이다.

이후 전순의의 출세는 더욱 놀랍다. 세조1 계유정난과 더불어 개국공신이라 하여 원종공신1녹훈(상호군(上護君)으로 제수)되고 세조 2년에는 첨지중추원사로 임명된다. 세조3에는 성삼문 등 사육신 등이 처벌되면서 적몰된 가산(家産)을 받았으며 세조10년에는 2품 자헌대부에 이르렀다.

세조 12전순의로 하여금 대궐로 들어와 대렵도라는 놀이를 구경하도록 했다는 등 전순의는 천민으로서는 최고의 영화를 누렸다. 그가 성종 대에 이르러서 어떻게 사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성종 9세조 때에 의술을 중요시한 전순의는 의관으로서 당상관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평생 영화를 누리다가 자연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관 전순의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예지적으로 명확하게 판단하여 세조와 사전에 공모 또는 모의한 후, 문종의 병증을 더욱 위독하게 만들어 결국 사망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의관인 전순의가 직접 문종을 치료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문종에 대한 비상식적인 치료를 하면서도 계속 문종의 병환에 문제가 없고 곧 낫는다고 연막을 피웠다는 것은 전순의가 문종의 병을 고의적으로 악화시킨 것을 숨기려고 한 의도로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특히 꿩이 반하를 주로 먹고 있는 시기종기에 금기인 꿩고기를 문종에게 계속 먹였다는 것도 의학에 매우 밝은 의관이 아니면 생각해 낼 수 없는 기막힌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다.

여하튼 문종은 죽음까지는 이르지는 않는다는 종기에 의해 사망했으며 세조도 우여곡절을 겪고 결국 왕위에 올랐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수양대군의 왕권을 차지하려는 치밀한 계획문종의 사망하기 전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했다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무력에 의해 왕위에 오른 세조는 구신들의 전 왕에 대한 충성심을 무자비하게 짓밟아 만고의 비난을 받는 왕이 되었다. 그러나 세조는 왕으로 등극한 후로 태종과 세종이 확립한 국가의 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힘을 썼다. 세조는 우선 백성들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태종 때 실시했던 호패법을 다시 복원했다. 종래의 현직과 휴직 또는 정직 관원에게 나눠주던 과전을 현직 관원에게만 주는 직전제를 실시하여 국비를 줄였으며, 지방 관리들의 반란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지방의 병마절도사로 그 지방 출신을 억제하고 중앙에서 문신을 파견했다.

세조는 국방 등 외치(外治)에서도 남다른 정력을 쏟았다. 그는 조선 왕 중에서 남다르게 병서에 능한 데다 무인을 많이 중용하여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무인을 크게 우대했다. 세조는 북방의 여진족 등 야인을 회유정토했고 하삼도민(下三道民)을 평안황해강원도 등으로 이주시켜 북방을 개척하게 했다. 이로서 세조국방과 농업을 장려하는 이중 효과를 거뒀다.

이러한 업적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세조에게 점수를 후하게 준다. 관리들에 대한 관제 개편과 기강 확립을 통해 중앙 집권제를 확립하고, 민생 안정책으로 백성의 편리를 꾀했으며, 법전 편찬사업과 문화사업으로 사회를 일신시켰다는 점 등이 세조의 업적으로 평가된다.

정치 운영에서는 문치가 아닌 강권으로, 인재의 등용에서는 실력 중심이 아닌 측근 중심의 인사로 일관해 조선왕조가 후대에 갈수록 붕당정치로 변질되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역사학자들은 세조가 이씨 왕조를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문종의 죽음의관 전순의의 술수와 세조의 계략이 작용한 결과라면 이를 거짓말 차원이 아니라 세조는 반만년에 걸친 우리 겨레의 역사에서 두 명의 왕을 죽음에 몰아넣은 유일한 왕이 된다. 유교 사상을 국시로 내세우며 탄생한 조선왕조에서 군주를 두 명씩이나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세조에 대한 평가군주로서의 업적도덕적 정당성 사이에서 사람에 따라 달리 평가될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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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명의 전순의에 관한 의사학적 고착, 안덕균, 조선초 과학영농온실 복원기념 학술 심포지움, 한국농업사학회 외, 200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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