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속인 거짓말/정조대

정조대 신화의 전말(2)

Que sais 2020. 12. 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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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는 보편 기구

정조대는 일반적으로 12세기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13세기에는 프랑스, 15세기경에는 유럽 대부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고 알려지지만 정조대는 이보다 훨씬 전부터 알려졌다.

그리스의 스파르타에서는 헤라클레스의 매듭이라 부르며 처녀들의 은밀한 부분모직 띠로 두르고 묶었다가 신혼 첫날밤에 신랑이 풀도록 했다. 물론 이것은 결혼 적령기의 처녀에게만 강요했으므로 엄밀한 의미에 정조대는 아니다. 순결을 지키려는 풍습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호머의 오디세이아프로디테가 어떻게 자기 남편 헤파이스토스배신했는지와 더 이상의 부정 행위방지하기 위해 남편이 그녀에게 거들을 채우는 방법을 묘사하고 있다.

성경에도 정조대존재했다주장이 있는데 이것은 모세가 이동식 막사식 신전장막(帳幕)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자기 소유물을 헌납할 것을 요구했을 때 여자들이 쿠마즈(koomaz)라는 물건을 내 놓았다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학자는 이 단어의 원래 의미가 여성의 은밀한 부분에 부착시키는 금제품이라고 주장했다. 유대인들의 윤리와 종교적 율법을 모은 탈무드에도 쿠마즈여기에 부끄러운 행위의 장소가 있다라는 말의 약어라는 것이다.

고대 에티오피아에서는 여자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대음순실로 봉합했다. 생리현상에 필요한 부분을 제외한 어떠한 출구도 막았고 결혼 날자가 잡혀져야 비로소 실을 끊어 개봉했다. 김장호환상박물관에서 음부를 봉쇄하는 방법은 이집트와 아시아는 물론 고대 로마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고 적었다.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이 만든 백과전서정조대를 이렇게 설명했다.

 

벨트십자로 엮어진, 아주 유연하고 얇은 철판 두 장으로 돼 있고 벨벳으로 덮여 있다. 한 장은 허리 위를 둥그렇게 두르게 돼 있다. 다른 한 장은 넓적다리 사이를 지나, 그 끝이 다른 한 장의 양쪽 끝과 연결된다. 이렇게 연결된 세 개의 끝 부분을 자물쇠로 전부 채웠다. 자물쇠를 여는 비밀은 오로지 남편만이 알고 있었다. 넓적다리 사이를 지나는 판에는 아내의 정조가 지켜질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구멍이 있어 볼일을 보는 데 곤란함이 없도록 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다음 같은 강간 방지기구 여성의 정조를 지키는 보호기구라는 상품소개서가 시중에 나돌았다.

 

호신구와 간단한 열쇠 120 프랑, 호신구와 고급 장식 열쇠 180프랑, 호신구와 은열쇠 세트 320프랑.’

 

1885년에 발행된 다음과 같은 설명서도 있다.

 

산화방지를 위해 기구 안쪽을 으로 만들고 금박을 했다. 이 기구는 원하는 대로 앞뒤로 보호가 가능하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항에 주의해야 한다. 뒤쪽을 보호하고자 할 경우 다소 문제가 생길 염려가 있으며, 또한 뒤쪽의 욕구를 원활하게 만족시키려면 갖고 와서 조정해야 한다. 그러나 앞의 욕구는 기구를 부착한 채로 만족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기구는 열쇠로 안전하게 채우도록 돼 있는데 앞부분만은 300프랑, 앞뒤 양쪽은 500프랑이다.’

이 가격이라면 정조대는 기본적으로 상당한 고가품이다. 19세기 중반300프랑, 500프랑이라면 엄청나게 비싼 가격이다. 이는 재료가 예술적으로 가공된 것은 물론 대다수 제품이 으로 만들었으며, 심지어는 자개가 박혀 있는 것도 있었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서양에서 정조대에 관한 최초의 언급1405 콘라드 카이저벨리호르티스라는 책에서이다. 이 책은 당대의 군사 기술에 관해 적은 책인데, 이 안에 군사용 투석기, 갑옷, 고문 장치 및 기타 전쟁 도구에 대한 세부 디자인 중에서 정조대묘사한 그림이 실려 있다. 이 그림 옆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라틴어가 적혀 있다.

 

이것은 피렌체의 여인들을 위한 강철 바지로, 앞이 잠겨 있다.’

 

<전쟁에 안 나간 여자>

정조대가 처음에 좋은 목적을 갖고 등장한 점은 있다하더라도 문제점이 생기기 마련이다. 정조대의 자물쇠남편만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고약스러운 일은 열쇠를 갖고 있는 남자가 전쟁터나 여행에서 꼭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적인 의문이 생긴다. 만약에 남편이 전사할 경우 아내에게 정조대가 채워져 있다면 그녀는 죽을 때까지 정조대를 차고 있어야 하는가이다. 의사들이 정조대를 한 번에 몇 달 간 차고 있어도 건강에는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몇 달 이후에는 어떻게 해야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 있다. 18824 스페인의 일간지 <엘리베랄>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게재되었다.

 

어제 오후, 부오나비시타의 세논 마로트 판사중요사건을 처리했다. 익명의 젊은 여성이 조그만 기구 하나를 벗겨줄 것을 호소했다. 바로 십자군 전쟁 때 성지로 향하기 전 부인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채우던 기묘한 기구였다.’

 

신문은 정조대를 채운 사람이 동거하던 의사였다는 것이다. 결국 이 재판은 4달 후 판사가 피의자가 열쇠를 갖고 법정에 출두할 것을 명령하여 단순 경범죄사건을 처리했다고 적었다. 이런 면을 보면 정조대가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역으로 생각하면 정조대에 대한 진실은 또 다른 면을 상상토록 만든다. 바로 그 해답은 정조대에 대한 유머로서 알 수 있다.

 

어떤 마을의 대장장이가 십자군 전쟁에 출정할 기사의 부탁을 받고 그의 아내에게 외음부대를 만들어 주면서 자기가 사용할 여분의 열쇠를 만들었다.’

 

남편이 전쟁터로 가기 위해 마지막 포옹을 하면서 남편의 주머니에서 열쇠를 빼내어 애인에게 준다.’

 

남편이 전쟁터에서 돌아와 보니 아내가 임신한 배를 천연스럽게 보여주며 예수도 남편이 없는 마리아로부터 태어났다고 말했다.’

 

이와 반대의 경우라면 어떻게 될까? 정숙한 아내가 남편에게 청을 하여 정조대를 차게 되었는데 그가 떠난 다음에야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배속에 있는 어린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답변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조대를 찬 여자들은 정조대의 열쇠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정조대를 만든 열쇄장이가 남편과 함께 전쟁터에 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예로 전쟁터에서 돌아 온 남편이 아내에게 채워 준 정조대의 열쇠를 잃어버렸다고 고민하자 그녀는 남편에게 걱정하지 말라면서 자신의 방에 정조대 열쇠가 여러 개 있다고 말했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

정조대십자군 전쟁 때 가장 성행했다고 알려진다. 처음에 교회에서는 남편이 전쟁터에 나가 있음에도 정절을 지키지 않는 여자들에 대해 단속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슬람교도와의 전쟁이 장기전으로 가자 성직자들도 눈을 감는 것이 좋다는 결론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해야만 십자가를 위해 싸우는 전사들에게 그들의 부재중에 일어날 수 있는 각가지 좋지 않은 소문을 알려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1590년대정조대 풍자, 2명이열쇄갖고있음(대영박물관)

십자군 전투가 예상외로 길어지고 전쟁에 나간 남자들이 사망하는 경우가 많아지자 인간의 머리가 매우 비상하게 돌아간다. 남편이나 애인이 사망할 경우에 대비한 비상대책도 강구되었다. 진품과 구분하기 어려운 장신구 용도가짜 정조대가 오히려 더 많이 제조된 것이다. 열쇠장이들은 남자들의 의뢰를 받으면 가짜 정조대를 만들어 주었다. 의뢰자인 남자가 그 비밀을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열쇠장이가 남자가 떠난 다음에 여자로부터 후대를 받았음은 이야기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수녀와 성직자는 무죄

정조대관한 전설에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많이 있다.

한 처녀가 남자들의 유혹과 자기 신체의 남용 또는 강간에 의한 더러움을 방지하기 위해 스스로 완전 외음부대착용하고 열쇠를 던져 버렸다는 일화 등 평생을 걸쳐 정조대를 차려는 의지의 여자가 많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런 일화들의 내용을 정확히 뜯어보면 여자들이 자신의 의도에 반하여 정절을 빼앗기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여자들이 정조대를 차고 있어야 하는 이유로서 충분하다는 것이다.

가장 놀라운 이야기는 1586 리마에서 태어난 로제라는 수녀에 관한 이야기. 그녀는 20세 때 한 남자의 청혼을 거절하고 수녀가 되었다. 그런 후에 스스로 정조대를 착용한 뒤 열쇠우물 속에 던져 버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일단 수녀가 되었는데 정조대를 찰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중세시대에 오히려 성생활이 문란했고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중세시대의 교회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신부가 여자로부터 매우 인기 있는 남자였다.

중세 말기, 성직자들의 성적 타락은 일반인들의 상상을 넘었다. 사제와 수녀들의 불륜 관계는 공공연하여 교황이 금지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14세기 프랑스의 성직자는 이런 성적 타락에 대해 그럴듯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간음 행위를 아무도 몰래 주일이 아닌 날, 신성한 장소가 아닌 곳에서 미혼자와 했다면 그것은 그리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 순결의 서약이란 처자를 거느리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아무리 간음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가 독신 생활을 계속했다면 순결의 서약을 파기한 행위라 볼 수 없다.’

 

보다 더 뻔뻔한 말은 13세기 스트라스부르그탁발 수도회 단장 하린리히가 한 말이다.

 

수녀육욕의 유혹과 인간적인 약점 사이에서 도저히 순결을 지키지 못할 정도로 몸이 타오를 때에는, 속인에게 몸을 맡기는 것보다성직자에게 몸을 맡기는 것이 낫다. 그것이 훨씬 죄가 가볍고 또한 그 처벌도 훨씬 관대하기 때문이다.’

 

교황청에서는 이 사실을 인정하고 실리를 취하기로 한다. 사제들이 축첩세만 내면 모든 것을 눈감아 주었다. 15세기교황 식스투스 4는 한술 더 떠 모든 성직자에게 첩을 데리고 살든 말든 해마다 축첩세징수했다.

이러한 예를 볼 때, 설사 수녀일지라도 직접 정조대를 차고 열쇠를 던진 로제의 행동이 이상하게 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여하튼 그녀자학적인 성향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나중에 경건하기보다는 병적인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외모를 손상시키기 위해 자기 뺨을 째고 그 상처에 후추를 비볐다고도 한다. 그녀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가족과 친구, 동료 수녀조차 비난했으나 교회의 조사 결과악마가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고통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 그녀는 공격적 순결주의 학파창시자로 불려졌고 그녀의 시성(諡聖)로마에 탄원했다. 그녀의 축제일은 830젊은 로제가 그녀의 정조대 열쇠를 던져 버린 우물리마에 지금도 남아 있어 성지로 숭배 받고 있다고 한다.

로제와 같은 여자로 에콰도르의 마리나 플로레스가 있다.

그녀는 8 때 이미 가시 면류관과 가시 벨트착용하였고 사춘기 때 평생의 순결을 맹세하며 스스로 정조대를 차고 이 정조대를 못과 쇠이빨이 달린 가시로 보강했다. 그녀는 하루에 빵 한 조각만 먹고 3시간 이상은 자지 않았다고 한다. 죽음을 상기시키기 위해 잠도 관속에서 잤다. 남아메리카에 지진과 전염병이 일어나자 그녀는 인류의 죄를 속죄하는 뜻에서 자신의 생명을 바치고자 했으나 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녀는 성처녀로 숭앙 받았고 1950년에 시성되었다.

이와 같은 예가 유럽보다는 아메리카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특이하다. 여러 가지 면에서 수많은 성직자들이 유럽에 있었음에도 이 두 여자의 행동이 특별하게 보일 정도로 유럽에서는 성직자들의 성 문제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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