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56) : 쿠프의 대피라미드(6)

Que sais 2021. 3. 8.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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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의 대안 왕가의 계곡>

이집트의 간판이 피라미드, 미라라는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집트에서 피라미드 건설12왕조부터 거의 중단했다. 이는 거대한 피라미드에 결정적인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피라미드는 하나의 장례 기념물 안에 왕의 무덤과 예배실을 마련하고 그 예배실에서 후대 사람들이 공양을 함으로써 내세에서도 파라오가 영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건축구조는 도굴꾼에게 보물이 어디 있는지를 알려주는 신호나 마찬가지다. 예배실만 찾으면 그 인근에 엄청난 보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모든 파라오의 무덤 즉 피라미드가 도굴의 표적이 되는 것이다.

18왕조의 투트모세 1(재위 기원전 1493~1483)는 피라미드를 대체할 왕가의 계곡이란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물론 왕가의 계곡이란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도출한 사람은 투트모세 1세가 아니라 그의 선임자인 아멘호테프 1(기원전 1514~1493).

아멘호테프 1는 이러한 무덤의 개념에 혁신을 가했다. 어느 한 곳에 순수한 의미의 무덤을 만들고 예배실 또는 장례신전은 다른 곳에 짓는 것이다. 이것은 신왕국의 신개념 건축술로 과거의 것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독창성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후임자인 투트모세 1는 선임자의 새로운 아이디어에 더욱 활력과 영속성을 불어넣었다. 그는 건축가 이네니에게, 죽은 파라오들이 영면할 수 있는 비밀스런 장소를 찾아내도록 명령했다. 그가 선택한 곳이 바로 나일 강 서부 해안에 있는 황량한 사막, 데이르엘바하리.

 

왕가의 계곡

왕가의 계곡즉 왕들의 문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비반 엘 몰루크450미터의 산 정상이 피라미드 모양을 하고 있으므로 당시 기준으로 볼 때 명당 중 명당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태양이 지는 곳이므로 고대부터 내려오던 무덤 즉 피라미드 형태라는 개념과도 일치했다. 더불어 나일강에서 멀리 떨어져 범람으로 훼손될 위험이 없고 사암지대라 터널식 석굴이 유지가 가능하다는 점도 비밀묘역을 조성하는 데 적격이었다.

이집트인들은 이들 지역을 과거부터 신성시 여겨 이곳을 침범하는 자는 침묵의 여신이 벌을 내린다고 믿고 있었다. 태양이 작열하는 가운데 풀 한 포기도 자라지 않는 황량한 곳이지만 위대한 자, 즉 파라오들의 영혼이 교감하고 내세에서 살기에는 적합한 신비의 장소였다. 고대에는 골짜기를 뜻하는 타이네트, 위대한 장소라는 뜻의 타세트아아트등으로 불렸으나 현재는 와디알무르크왕들의 계곡이라 불리고 있다.

왕가의 계곡의 또 다른 장점은 무덤이 있는 장소가 계곡이므로 입구와 출구만 경비하면 관리가 수월하다는 점이다. 사실 왕가의 계곡이 개발되기 시작한 초창기는 이집트의 정세가 안정적이었으므로 도굴이 발생하지 않았다. 이 말은 곧 정세가 불안해지면 얼마든지 도굴이 가능했다는 뜻으로, 왕가의 계곡의 거의 모든 무덤이 도굴되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하튼 투트모세 1의 무덤부터 왕가의 계곡이 파라오의 무덤으로 시작되어 제20왕조 마지막 왕 람세스 11 즉 기원전 1100년경까지 아멘호테프 4아케나톤이 아마르나로 천도했던 시기를 제외하고 400년에 걸쳐 신왕국시대의 무덤군이 되었다. 현재까지 등록되어 있는 묘지는 총 62기에 달하는데 지면에서 곧게 내리 판 20여개의 피트 묘도 발견된다.

람세스 2의 미라가 왕가의 계곡에 매장되는 광경은 잘 알려져 있다. 왕가의 계곡에 묻힌 다른 파라오도 동일한 과정을 밟았을 것이 분명하므로 보다 자세하게 설명한다.

람세스 2세의 미라는 페르라메수에 있는 영생의 집에서 만들어졌다. 그의 시체는 가장 질좋은 아마포로 조심스럽게 동여매졌고 벽옥, 터키옥, 청금석, 채색 백도 등 수많은 금부적이 미라를 묶은 끈 사이에 끼워 넣어졌다. 또한 값비싼 풍덩이 등 갑충석이 시체의 심장 위에 놓였다.

손목은 금속세공한 팔찌로 장식되었고 목에는 옷깃이 여러 겹 메워져 있었다. 손가락과 발가락에는 금고리가 끼워졌고 머리에는 금으로 된 사자(死者) 마스크가 덮여 있었다.

람세스 2세의 미라는 영생을 위한 준비를 마친 후 마지막으로 작은 배를 타고 제국을 가로질렀다. 그가 거주했던 페르라메수에서 테베의 왕가의 계곡까지는 약 3주가 걸리는데 여행길에 이집트 국민들이 나일강 좌우에서 이별을 고했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위대한 목자가 떠나셨다. 그분은 우리들 옆을 지나치셨다. . 그분이 우리를 바라보셨다. 평화롭게. 그분은 서쪽으로 평화롭게 떠나셨다.’

 

왕가의 계곡에 있는 그의 무덤은 그림과 글로 장식되었는데 밤의 12시간을 통과한 태양의 여행 및 태양이 아침에 재탄생하는 것을 묘사했다. 특히 지하세계의 책은 지하세계를 통과하는 태양신의 여정을 생생하게 서술했다. 지하세계에서 태양신은 사자를 소생시키는데 모두 74개의 서로 다른 형상의 태양이 동원되었다. 이들은 모두 일일이 벽화에 거론된다.

암두아트숨겨진 방의 글은 밤의 12시간에 지하세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상세하게 저술했다. 경우에 따라 12시간으로 분할되는 문의 책에는 저승의 문을 지키는 파수꾼들의 이름이 있다. 람세스 2세의 무덤 벽면에는 지하세계의 책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왕가의 계곡

무덤 안의 넓은 홀 즉 지하 궁전의 중심부에는 파라오의 미라와 태양신의 합일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매일 밤, 신이 된 람세스 2세의 아버지가 람세스 2세를 깨운다. 람세스 2세도 이제 태양신과 동등하게 만드는 주문이 필요하다.

 

내가 바로 당신이고 당신이 바로 나다. 당신의 영혼이 나의 영혼이고, 당신의 행보가 지하세계로의 나의 행로다. 당신이 무엇이든 나 또한 당신과 같다. 당신의 변화가 내 변화이며 당신의 분주함이 나의 분주함이다. 나의 여행이 당신의 여행이다. 레 신이시여. 나의 분주함이 당신의 분주함이다. 당신이 가면 지평선 너머라도 함께 가고, 당신이 변하면 나도 변할 것이다.’

 

파라오의 장례 행렬은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이집트인들로 장관을 이룬다. 새로운 호루스- 미네프타로부터 행렬을 안내받는 파라오의 가족과 그의 모든 성직자는 오시리스-람세스를 매장하기 위해 대신전에 모였다.

라메세움에서 의식을 마친 후 장례행렬은 왕가의 계곡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그의 호화로운 미라는 황소가 끌고 가는데 성직자, 고위관리, 곡소리 여자들이 동행한다. 아버지를 매장하기 위해 아들인 호루스-미네프타가 마지막 의식을 거행한다.

그는 미라의 눈과 코, , 귀를 마법의 도구로 건드리면서 지하세계에서의 영생을 위해 그를 소생시켰다. 마침내 람세스2세의 미라는 무덤 속 홀에 안치되었고 그의 영혼은 천국과 지상 사이를 태양신과 함께 영원히 순회한다.

무덤 속의 사람들이 모두 나오고 석공들이 무덤의 벽을 막자 사제들이 영원을 위해 무덤을 봉인했다. 살아 있는 영혼은 어느 누구도 무덤 입구를 지나쳐서는 안 된다. 람세스 2세는 선조들에게 가서 최종적으로 신들의 공동체에 받아들여졌다.

대부분 파라오의 무덤이지만 고관대작의 무덤도 존재한다. 1922투탕카문의 묘가 발견된 후 새로운 묘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현재도 새로운 묘를 찾기 위한 발굴 조사가 계속되고 있다. 이는 왕가의 계곡에서 가장 작은 묘로 인식하는 투탕카문 묘에서 엄청난 부장품이 발견된 것을 감안하면 아직 발견되지 않은 묘에서 상상할 수 없이 많은 부장품이 매장되어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 왕가의 계곡에 있는 무덤들은 기본적으로 험한 바위산을 파고 낭떠러지의 중턱이나 아랫 부분을 파낸 곳에 세워졌다. 이들 묘들은 일반적으로 계단과 경사로로 구성되는 하강 통로, 여러 개의 부속실, 전실, 현실로 이루어져 있다.

무덤의 규모는 파라오의 생존시 파워에 따라 다른데 람세스 2세의 아버지인 세티 1세의 무덤은 입구에서 현실까지 거리가 150미터나 된다. 큰 방은 한 변의 길이가 8.5미터나 되며 아름다운 벽화와 천장화가 그려져 있다.

그중 천장화 북천도(北天圖)는 이집트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간주된다. 진한 청색으로 북쪽 하늘을 그린 다음 그 위에 황색별을 수없이 박아 놓은 그림으로 백조좌, 목우좌 등 그밖의 성좌를 동물로 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왕가의 계곡에 있는 무덤의 또 다른 특징은 왕에 제례를 바치는 신전 시설을 경작지 외곽에 축조했다는 점이다. 이들 신전은 이른바 수백만 년의 거처로서 신격화된 왕의 영생에 부응하는 건축물로, 이처럼 혁신적인 파라오의 무덤 개념을 창안 한 투트모세 1는 사후에 가장 위대한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투탕카문 왕도 이곳에 묻혀있다. 1922하워드 카터가 발굴한 이 무덤은 이집트 파라오들의 무덤 가운데 철저하게 도굴당하지 않은 곳이다. 한마디로 고작 2번에 걸쳐 도굴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부장품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을 보면 당대의 패자였던 람세스나 아멘호테프 같은 파라오들의 무덤에는 얼마나 많은 부장품들이 묻혔을지 짐작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