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획기적인 여자 의사 양성>
의녀가 무엇인지 일반인들이 모두 알게 된 것은 공전의 흥행에 성공한 2003년 TV드라마 「대장금」 때문이다. 이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사극으로, ‘장금’이 여인의 몸으로 조선시대 최고 의녀의 길을 걷는다는 이야기다.
이와 같이 대장금이 최고의 의녀로서 궁중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유교 사상이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획기적인 의료제도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여자 의사의 양성이다. 성리학의 영향으로 ‘남녀칠세부동석’의 원칙이 철저히 지켜질 정도로 남녀의 구별이 엄격해지자 많은 부녀자들이 남자 의사의 진찰을 거부하였고, 그로 인해 불필요한 희생자들이 생겨나기 일쑤였다. 아무리 가벼운 병이라도 전문인으로부터 진단과 치료를 받지 못하면 곧바로 악화되고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 조정에서 묘안을 강구해낸 것이 바로 의녀제도였다.
의녀제도는 태종 6년(1406) 당시 한성윤겸교 겸 제생원지사였던 허도(許衜)의 진언에 따라 제생원에서 탄생했다. 제생원은 태조 6년(1397)에 설치된 의료 기관으로 원래는 지방에서 나오는 약재 구입과 제약을 맡아보는 관청이다. 허도는 진언을 통해 의녀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생각건대, 부인이 병이 있는데 남자 의원으로 하여금 진맥하여 치료하게 하면, 혹 부끄러움을 머금고 나와서 그 병을 보이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여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원하건대, 창고(倉庫)나 궁사(宮司)의 동녀(童女) 수십 명을 골라 맥경과 침구의 법을 가르쳐서 이들로 하여금 치료하게 하면, 거의 전하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남녀가 7세가 되면 서로 동석하지 않는 것이 성인의 가르침이지만 병에 걸려서 위급하게 되면 종실의 처자라도 의원에게 보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남자의사가 처자의 피부를 주무르게 되니 남녀유별의 교리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간혹 남의의 진료를 받기 부끄럽게 여겨 그대로 죽기를 원하는 일도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폐단을 고치고자 여의를 설치해야 한다.’
허도의 진언은 곧바로 허가되었다. 이때 뽑은 10명 중에 여의로 성장한 사람은 모두 7명인데 그중에서 제대로 의사 노릇을 할 수 있는 의녀는 5명이었다. 제생원은 그들 5명만으로는 많은 여성을 치료하는 데 한계가 있으므로 다시 의녀를 뽑아줄 것을 요청했다. 태종 18년 6월(1418), 예조에서 올린 글은 다음과 같다.
‘의녀는 모두 7명인데, 제예를 가진 자가 5명이므로, 이들을 여러 곳에 나눠 보내면 늘 부족합니다. 바라건대, 각사의 비자(婢子) 중에서 나이가 13세 이하인 자 10명을 더 정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태종은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초기에는 비정기적으로 의녀를 뽑아 양성했지만 의녀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3년마다 정기적으로 뽑고, 수가 모자라면 비정기적으로도 충원하였다.
이와 같은 의녀제도는 중국이나 서양 역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수한 제도다. 외국의 경우 여자들이 단순히 남자 의사의 보조 역할을 하는 경우는 있으나 부인병을 직접 치료하거나 진맥하고, 시침하고, 처방하는 일까지 모두 담당하는 전문 여의사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종 16년(1433)에 들어서면서 지방에서도 의녀제도가 시행되기 시작했다. 이 역시 참찬지사 허도의 건의를 예조에서 받아들인 것으로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에서 먼저 실시했다. 각 도의 관비 중에서 나이 어린 사람을 각각 두 명씩 뽑아서 제생원으로 올리면 제생원의 의녀와 함께 교육시켜 교육이 끝난 후 지방으로 돌려보내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의녀로 뽑힌 각 고을의 관비가 서울에서 의술을 배웠다고 해도 의술을 제대로 익히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이는 그들이 문자를 몰라 의서를 읽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의녀로 뽑기 전에 관비로 하여금 먼저 문자를 익히도록 했다.
이런 노력 끝에 의녀제도가 효과를 보자 그 대상 지역을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에까지 확대하고, 대상 군현도 계수관에서 일반 군현으로 확대했다. 문종 때에는 의녀들 대부분이 지방 각 고을에서 뽑힌 관비로 채워졌다. 의녀의 활동이 상당한 효과를 거둔 데는 그들이 관비 출신인 점도 크게 작용했다. 국가에서는 의녀가 필요할 때마다 관비 중에서 마음대로 선발할 수 있는데다, 관비 출신인 만큼 남자 의원에게서 교육을 받는 데도 문제가 없었다. 무엇보다 국가에서 지정하는 곳이면 어느 지방이라도 파견되어 의료 행위를 할 수 있었으므로 효과가 높았다. 또한 관비들로서도 의녀라는 전문직이 신분에 비해 대우가 좋았으므로 매우 선호하였다.
의녀는 특히 양반 여성들에게 필요한 직종이었으므로 의녀 장려책이 시행되기도 했다. 세종 16년(1434)에는 의녀를 권장하기 위해 1년에 두 번씩 쌀을 내리기도 했다. 성종 9년(1478)에는 의녀들의 수학 연한을 3년 이상으로 하고 성적에 따라 내의(內醫), 간병의(看病醫), 초학의(初學醫) 등 3등급으로 나누었다. 내의는 의술을 익혀 대내에 출입하면서 의원으로 활동하는 자이고, 간병의는 공부하면서 치료도 하는 자이며, 초학의는 교육받은 지 얼마가 안 되는 초보자를 말한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의녀는 3년에 한 번씩 선발했는데 그 수는 150명이었다. 이들 중에서 실력이 출중한 70명은 내의원에 배치되었고 나머지는 각 지방 의원에 소속되었다. 내의원은 왕실을 전담하는 의료 기관으로, 태종 때 설치된 내약방이 그 모체다. 이후 1443년에 세종이 이를 내의원으로 개칭하고 관원 16인을 배치함으로써 비로소 독립적인 기관이 되었다. 이후 인원수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으나 큰 차이는 없다. 이들 관원 외에 산원관원이 많았는데 이들은 정원이 없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많은 인원이 배치되기도 했다. 이는 왕실 사람의 수가 일정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어의는 3명이었다.
<여경찰 역할도 의녀가 수행>
중종 38년(1543) 2월 10일에 병조판서 임권 등이 도적의 발생 원인과 야간 순시에 관해 다음과 같이 상소했다.
‘도적이 사족의 집에 숨어 있으면 먼저 아뢰고 나서 잡는 것이 예사인데 계품하느라 왕래하는 동안 도망하여 달아나는 폐단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군사로 그 집을 포위해 놓고 부인들은 피하여 숨게 하고서 체포한 뒤에 그들의 체포 여부를 아뢰게 해 주소서. 또 도적이 부인들의 차림으로 변장하고 숨는 일도 있으니 의녀를 시켜 부인의 면모를 살펴보게 함으로써 도적들이 도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글에서 보듯이 당시 의녀는 궁중 여성들이나 사대부 여성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수색과 체포를 할 수 있는 여자 경찰의 역할도 겸했다.
의녀들은 다방면에 걸쳐 하는 일이 많았다. 만약 사형 당할 여자 죄수가 임신했으면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사행 집행을 연기했다가 아이를 낳은 후에 집행했다. 이때 의녀(다모)들이 몸을 수색하고 맥을 짚어 임신 여부를 판별했다. 궁중의 여관들이 죄를 지었을 때 형조나 포도청의 명을 받고 그들을 체포하는 것이나, 투옥된 여관에게 음식을 갖다 주거나 건강 상태를 확인하여 보고하는 것도 의녀의 임무였다. 후궁이나 어린 왕자를 잡아들이는 일도 의녀가 했다. 광해군 시절에 영창대군을 끌어낸 것도 여관이 아닌 의녀였다.
왕비의 능은 남자가 시위할 수 없으므로 왕비의 능을 옮기거나 조성할 때, 또는 왕비나 후궁의 무덤을 지키는 일도 의녀들이 맡았다. 왕이 밤에 궁궐 바깥에서 거동할 때 횃불을 드는 역할도 의녀였고 후궁이 죽으면 그 제문을 읽는 사람도 의녀였다.
이와 같이 의녀는 단순히 의술에 관한 일뿐만 아니라 온갖 잡다한 일을 수행해야 했는데, 죄인에게 사약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혼인 시 혼수의 사치 여부를 감찰하거나 기녀 교육, 궁중 의식의 의장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다룬 드라마가 2003년에 방영된「다모」, 그리고 2005년부터 2007년에 방영된 조선판 CSI 과학수사대 드라마 「별순검」이다. 이들은 조선시대 수사록인 『무원록』, 『증수무원록』 등을 바탕으로 수사관 별순검과 다모의 과학수사 과정을 그린 것으로 별순검 자체는 조선 말기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던 기구다.
조선시대의 특수경찰을 소재로 한 「별순검」은 기존 사극이 주로 연애와 역사 이야기를 주로 하는데 반해 조선시대에도 과학적인 수사기법을 동원하여 범인을 몰아가는 점 등이 색다르다는 평을 받았다.
「별순검」에서 다모(茶母)도 전천후 여형사 역할을 하는데 이 점은 사실 과장된 부분이 많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다모는 별순검처럼 조선시대 말에 잠깐 등장한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관청의 식모 노릇을 하던 천비로, 엄밀하게 말해 의녀의 보조로 드라마에서처럼 화려하게 여형사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포도청이 신설되고 포도군관들이 여자 범인을 체포하거나 수색, 기찰할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하지만 내외(內外)의 법도가 엄했던 당시에는 아무리 포도군관이라 해도 외간 남자가 안채에 발을 들여놓을 수는 없었다. 그러다보니 포도청과 각 지방 관아에서도 규방 사건을 수사하기 위한 여형사 역할을 할 인력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에 적합한 사람이 의녀였고 이들을 보조하는 사람이 관비인 다모였다.
이들 다모는 다모간(茶母間)이라는 곳에서 거처했는데, 숙종 27년(1701)에 포도청의 다모간이란 말이 등장한다. 또한 정조 때 ‘병영으로 붙잡아 가더니 도적이라며 한차례 따져 신문한 뒤에 비장청의 다모방(茶母房)에 구류시켰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다모가 군대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관비인 다모는 의녀와 상당히 관련한다.
조선왕조 초기, 혜민국에 의녀제도가 발족되었을 때 의녀 교육을 받는 자 중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다모로 강등시켰다. 『세조실록』에 다음과 같은 글이 보인다.
‘의녀는 혜민국 제조가 매월 독서한 것과 일찍이 독서한 바를 강(講)하여 통(通)하게 하고 불통(不通)한 것을 치부하고 매월 획수가 많은 자 3인을 일일이 베껴 써서 계문하여 월료(月料)로 주되 그중에 세 번 불통한 자는 혜민국 다모로 정하였다가 3략(略) 이상을 채우면 본임(本任)에 환허해 주십시오.’
의녀들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혜민국 다모로 강등시켰다가 공부를 열심히 하면 다시 의녀로 복귀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교육을 잘못 받으면 다모가 되었다가 다시 열심히 공부해 인정을 받으면 의녀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드라마처럼 다모가 전방위 수사관으로 활약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일부 다모들이 의녀 교육을 받았으므로 시신 검사 등 검험 등에 활용되었을 것으로 본다.
의녀의 신분은 대체로 노비 출신이었지만 성종 때에는 2품 이상의 첩자(妾子)는 법으로 의사에 속하게 했다. 이것은 당시 의술이 문과나 무과가 아닌 잡과에 소속되어 있는 데다 대체로 서자가 담당했기 때문에 의녀도 이에 준한 것이다.
내의원에 소속된 궁녀들은 궁중을 드나들었기 때문에 궁녀로 인식되기도 했지만 궁녀와는 엄연히 달랐다. 의녀들은 궁궐에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 근무시간에만 머무르며 출퇴근했다. 또한 결혼도 할 수 있었다. ‘궁궐에 사는 여자’라는 의미의 궁녀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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