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조선왕릉 답사

조선 왕릉 답사 (52) : 제2구역 김포 장릉

Que sais 2021. 6. 29. 09:55

https://youtu.be/1SjPdnr1rnc

조선왕릉에 한자로는 다르지만 파주장릉과 다른 김포장릉(章陵, 사적 202) 있다.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에 있는 장릉은 제16인조의 부모인 원종(15801619)과 인헌왕후(15781626) 구씨를 모신 능이다. 원종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으로 태도가 신중하고 효성과 우애가 남달라 선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 1604임진왜란 중 왕을 호종(扈從)하였던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2에 봉해졌다. 왕을 뜻하는 이란 묘호를 갖고 있음에도 원종이란 이름이 우리에게 낯선 까닭은 그가 생존 당시의 왕이 아니라 추존된 왕이기 때문이다.

 

원래 원종은 사망할 때 정원군(定遠君) ()’의 신분이므로 현재 남양주시 금곡동인 양주 곡천리 처갓집 선산에 초라하게 묻혀있었다. 그런데 광해군을 축출시킨 이른바 인조반정으로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인조로 왕에 오르자, 이미 고인이 된 정원군정원대원군으로 높여졌고, 10년 후에 묘호를 원종으로 추존되었으며 묘도 원으로 추승되어 흥경원이라 했다. 이후 원종의 무덤은 현재의 자리인 김포시로 옮겨지면서 장릉이 되었다. 한마디로 살아 있을 때보다 죽은 뒤에 남다른 대접을 받은 셈이다. 인현왕후는 아들이 즉위하자 연주부부인이 되었고 궁호를 계운궁이라 했다. 1626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김포 성산 언덕에 예장하였는데 원종의 능인 현재의 자리로 다시 천장했다.

정원군은 아들이 조선의 왕인 인조가 되지만 그의 생전에는 상당히 불우한 삶을 살았다. 김두규 박사정원군이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과 비범한 관상으로 부왕인 선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적었다.

그런데 선조사망하고 이복형인 광해군이 왕이 되자 정원군 잠재적인 정적으로서 광해군에게 집중적인 견제와 감시를 받았다. 특히 정원군의 어머니 인빈 김씨의 무덤과 정원군이 살던 집터왕기가 서렸다는 소문 때문에 광해군은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더욱이 정원군의 셋째 아들 능창군은 성품이 호탕하고 인물이 훤칠하며 무예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이들이 눈에 들어있는 가시와 같은 존재인데 마침 능창군황해도 수안군수 신경희 등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고자한다상소가 들어왔다. 정원군에 대해 견제하고 있던 광해군은 곧바로 능창군강화도유배보낸 후 죽였다. 광해군 7(1615) 이른바 신경희 옥사.

더욱 정원군을 낙담하게 한 것은 아들을 잃은 지 2년 후다. 지관 김일룡 새문동왕기가 서려있으니 그곳에 궁궐을 짓자광해군에게 보고했다. 왕기가 서렸다는 새문동터가 바로 정원군이 살던 집터광해군은 정원군의 집터를 빼앗아 경덕궁 현재의 경희궁을 건설했다.

사랑하던 셋째 아들 능창군광해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도 억울한데, 자신이 살던 집터까지 광해군에게 빼앗기자 정원군은 광해군이 무슨 죄목을 들어 나머지 아들들을 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술로 화병을 달래다가 40의 나이로 죽는다. 그는 평소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해가 뜨면 간밤에 무사하게 지낸 것을 알겠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간 것을 알겠다. 오직 바라는 것은 일찍 집의 창문 아래에서 죽어 지하의 선왕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

 

그래도 불안한 광해군정원군의 무덤 자리를 제대로 고르지 못하도록 장례기간의 단축을 재촉하고 조문객을 감시토록 했다고 한다. 유족들이 장지를 제대로 고르지 못하고 정원군의 처가 선산에 안장한 이유다.

그런데 새옹지마라는 말이 이때 등장한다.

처음에는 정원군과 광해군의 싸움에서 광해군이 완승했다. 그러나 정원군이 세상을 떠나고 4년 후인 1623년에는 광해군이 쫓겨나자 정원군의 큰 아들인 능양군에 오른 것이다. 광해군이 정원군에게만 신경을 썼지 실제로 왕의 기운능양군에게 있다는 것을 미처 예상치 못했다는 설명이다.

인헌왕후는 본관이 능성(綾城)인 좌찬성 구사맹의 딸로 선조 23(1590) 정원군과 가례를 올려 연주군부인에 봉해지고 능양군 종(인조), 능원대군 보, 능창대군 전을 낳았다.

정원군의 부인인 인헌왕후는 아들이 왕이 되자 연주부부인에 진봉되었고 궁호를 계운궁(啓雲宮)이라 칭했다. 또한 빼앗긴 새문동 집터경덕궁으로 되돌아가 몇 년을 살다가 1626년에 숨을 거둔다. 인조반정이 역사가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결론만 본다면 광해군이 정원군의 부인을 위해 궁을 지어준 셈이다.

원래 정원군은 왕이 아니므로 원제(園制)육경원으로 조성되었지만 1632년 정원군이 왕으로 추존될 때 함께 왕비로 추존되어 인헌왕후라는 존호를 받았고 왕릉제(王陵制)석물(石物)이 바뀌었다.

장릉에는 능을 중심으로 좌우에서 묘내수(墓內水)가 흘러내리면서 만든 작은 연못이 재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이 연못을 지나면 보다 큰 두 번째 연못이 있다.

한편 육경원을 의미하는 비석의 토대 2008년에 발견되어 비각 옆에 전시해있는데 비석도 언젠가 발견될 것으로 추정한다. 김포 장릉의 재실은 능침으로 올라가는 중간에 있는데 현재 김포장릉관리소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솟을 대문으로 되어 있는 정문은 남다를 것이 없지만 재실의 뒤로 후문이 열려있다. 기본적으로 재실의 문은 정문 외에는 좌우측에 설치하는데 재실의 활용도를 위해 뒤쪽으로 문을 만든 것은 그만큼 법도가 충만한 왕릉 건물이라 해도 현실적인 변경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홍살문에서 참도가 시작되고 우측에 배위가 있는 것은 일반 격식과 다름이 없지만 참도가 넓다. 정자각까지 가는 중도에 5계단이 있는데 자연의 지형에 어울리게 정자각이 지어졌기 때문이다. 지형이 높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만들어진 계단이지만 참도에 계단이 있는 것은 극소수다.

육경원에서 왕릉으로 변경되었지만 병풍석과 난간석이 둘러지지 않은 쌍릉이다.

봉분은 자연과 맞닿은 부분에 아무런 조각이나 무늬도 새기지 않은 초석을 둘렀고 혼유석이 각각 놓여 있다. 2()와 제3문무석 한 쌍 씩을 세웠다. 반면에 팔각 장명등에는 꽃무늬가 화려하게 새겨져 있으며 석호는 앉아 있지만 석마, 석양은 일반 석물과는 달리 배 부분이 막혀있지 않아 배가 보이며 다리가 투각(透刻)되어 있다.

 

조선 왕릉은 장명등의 창호로 조산(朝山)을 바라보면 조산 또는 안산의 봉우리와 연결되는 자연의 축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김포 장릉은 정자각이 중앙으로 보이며 정자각에서 볼 때 다른 왕릉과는 달리 두 개의 능침이 곧바로 보인다. 김포 장릉은 조선의 왕릉 중 축 개념이 확실한 능역으로 평가된다.

조선왕릉서부지구 김포장릉관리소김공실 선생석물에 대해 매우 흥미 있는 이야기를 한다. 석물 중 혼유석, 우측 무인상, 좌측 석마총탄 자국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한국전쟁 때 상처를 입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김선생한국전쟁 때의 상처가 아니라고 말한다. 만약 당대에 사용된 무기인 M-1이나 칼빈, 북한측의 소총인 AK의 총탄이었다면 보다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김선생은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과거 왕릉에 대한 관리가 소홀했을 때 왕릉에서 산탄총 등으로 과녁맞추기 등을 했다고 했는데 그 피해일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이다. 얼마전만해도 우리 유산에 대한 소중함을 모를 때의 일이라고 볼 수 있지만 바로 이런 흔적을 거울삼아 오히려 유산에 대한 사랑이 더욱 높아질 것으로 생각한다.

정자각 좌측과 우측에 뽕나무가 있는데 좌측의 뽕나무인조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350 정도의 나무로 한국에서 가장 큰 뽕나무로 추정되고 있다. 좌측 뽕나무는 크기는 크지만 오디가 열리지 않는 반면 우측 뽕나무는 작지만 오디가 많이 열린다고 한다.

뽕나무는 뿌리가 깊고 황색으로 왕실을 상징하는 황색의 수피를 갖고 있다. 뿌리 속이 흰색이라 한약재로 상백피(桑白皮)라고도 한다. 열매는 푸르다가 차츰 적색, 검은색으로 변한다. 오행색(五行色)을 다 갖추고 있어 귀하게 여겼다. 오래된 뽕나무는 궁궐에도 있는데 특히 창덕궁 후원(비원)에 많다. 궁궐에서 기르는 뽕나무고급 비단의 어의(御衣)를 만들기 위한 용도로 궁궐에는 누에를 기르는 잠실을 두었다.

 

왕실에서는 상례 때 왕과 비의 영혼이 의지할 신위(神位)를 혼전에 모시는데 이것을 우제 지낼 때 쓰던 신주우주(虞主)라고 한다. 우주뽕나무로 제작한다. 그래서 신위를 상주(桑主)라고도 한다. 우주는 부묘 시 종묘 터에 묻고 밤나무로 만든 신주로 부묘(祔廟)한다.

밤나무는 자손의 번성과 왕권의 영구한 승계를 의미한다. 인조는 아버지를 종묘의 혼전에 모시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장릉부모의 영혼이 의지할 뽕나무를 직접 심었다고 한다.

장릉을 돌아 연못 옆으로 난 길로 나가면 금정사(金井寺)가 보인다. 조계종 직할교구 본사금정사조계사의 말사봉릉사(奉陵寺)라고도 부르고 장릉의 원찰이다. 장릉을 조성하면서 인근에 있는 사찰을 폐사(廢寺)시켰는데 1920년과 1938년에 중수했고 1974년에도 다시 중수하여 현재에 이른다.

왕릉을 답사하면서 왕릉관리소 직원들을 만나보면 왕릉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음을 아쉬워한다. 과거나 현재나 왕릉은 소풍, 수학여행 등은 휴식의 공간으로 최적의 장소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왕릉위락지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끄새초등학교소풍왕릉으로 갔는데 그야말로 놀이 공간으로 일품이었고 숨겨진 보물쪽지를 찾기 위해 온갖 곳을 뛰어 다닌 추억이 있다.

왕릉세계유산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래에도 도를 지나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현대에 왕릉과 같은 좋은 위치와 환경을 갖고 있는 곳을 찾을 수 없지만 왕릉은 엄연히 경건한 능묘로 과거를 되돌아보는 장소다. 아무리 여건이 좋은 공간이라고 해도 이를 유원지로 생각한다는 것은 사실 문제로 장소에 대한 격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얘기다.

학자들은 해수욕을 위해 모래사장을 간 사람이 넥타이를 매고 있다면 이상한 것처럼 선조의 넋이 숨어있는 왕릉이 놀이터가 아님이 분명하다고 강변한다. 왕릉 자체가 세계적인 유산임을 감안한다면 더욱 더 그러하다는 지적인데 우리들의 문화재를 보는 시각이 좀 더 성숙해야 한다는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참고문헌 :

[을 만나다·30]장릉(章陵-추존 원종·인헌왕후), 김두규, 경인일보, 2010.04.22.

[을 만나다·37]온릉 (11대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 염창균, 경인일보, 2010.06.17.

을 만나다·38]장릉 (長陵·16대 인조·인열왕후), 이민식, 경인일보, 2010.06.24

反正 죄인의 딸로 둔갑 7일간 왕비, 49년간 폐비 비운, 이창환, 주간동아, 2010.07.19.

포근한 매화낙지형 터 大院君 묘제에 맞춰 조성, 이창환, 주간동아, 2010.09.06

反正으로 정권 잡았지만 나라 쫓다 삼전도 굴욕, 이창환, 주간동아, 2010.09.13

우주의 질서 보여주는 풍광, 생과사 공존하는 고도, 강석경, 월간중앙, 2013 5월호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이덕일 외, 김영사, 1999

우리문화이야기, 김진섭, 초당, 2001

타살의 흔적, 강신몽, 시공사, 2010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 III, 국립문화재연구소, 2012

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답사기1 : 조선왕릉, 이종호, 북카라반,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