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우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많은 이점도 있었지만 전적으로 문정왕후의 권력에 의지했다는 점이다. 유학자들은 문정왕후가 죽기만 기다렸는데 결국 문정왕후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결과는 예상대로 흘러갔다.
문정왕후의 장례를 마치자마자 유생들이 보우의 처벌과 불교탄압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문제는 명종으로 볼 때 막을 힘도 의지도 없었다는 점이다.
상소가 잇다르자 명종은 보우의 승직을 박탈하고 서울 근교의 사찰 출입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유생들은 이런 조처에 만족하지 않고 보우의 처형을 주장했다. 문제는 보우가 불법을 저지렀거나 탐학을 자행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점이다. 그의 죄목은 다만 ‘요망하다’는 것이다.
이덕일 박사는 보우도 문정왕후가 사망하면 자신에게 죽음이 온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고 적었다. 그러므로 보우는 자신이 없으면 후세에 불법이 영원히 끊어질 수 있다며 불교를 중흥시키는 일에 전력을 기우렸다. 한마디로 자신이 순교하더라도 불교가 중흥될 수 있다면 자신의 한 몸을 바쳐도 좋다고 생각했고 결국 문정왕후의 죽음과 함께 순교승이 되었다는 설명이다.
학자들은 역사의 기록이 모두 진실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문정왕후가 권력 지향적이고 냉혹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고 설명한다. 그녀는 조선왕조가 평안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불교를 다시 살리는 것이 첩경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삼국시대와 고려 시대에 불교가 국시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는 일이다.
그런 목표를 위해 자신의 어린 아들을 내세워 국정을 손아귀에 넣었으며, 불교를 다시 살리기 위해 어떠한 비난이나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호불정책을 밀어붙였다. 그 같은 집념이 결국 자신을 왕의 어머니로 만들었고, 조선시대 여인들 중 최고의 권력을 구가하는 여인으로 거듭나게 했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문정왕후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것도, 보우가 불교의 중흥을 꿈꾸었던 것은 지나친 ‘무리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탁효정 기자는 이 문제에 대해 매우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탁 기자는 현재와 같은 물질문명의 시점에서 여자를 사람 취급하지 않고, 불교를 이단으로 치부하던 조선 유생들의 시각으로만 문정왕후를 바라볼 필요가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시대정신에 일정 부분 타협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어김없이 그에 상응하는 보복을 당한다는 사실을 역사는 끊임없이 말해준다. 문정왕후는 그런 의미에서 시대정신에 굴복하기를 거부하였고 그에 대한 대가 또한 톡톡히 치른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여자로서 삼가고, 왕의 어머니로서 조심하고, 불자로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시대에 이에 반하는 삶을 살았다. 이 말은 그녀가 집요하리만치 강인했던 집념과 카리스마를 보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여자임에도 최고가 되고자하는 의지를 결코 꺾지 않았다.
그런데 역사는 냉정하다. 시대가 달라지면 평가도 달라지기 마련인데 문정왕후에 대한 시각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붙여진 악녀라는 이름은 쉽게 지워지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추정이지만 그녀로 인해 불교가 기사회생했다는 시각조차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 그녀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답임은 물론이다.
<다시 보는 보우>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그야말로 불교에 관한 기사는 거의 예외없이 비판적이다. 이를 잘 알려주는 기록은 정도전의 『불씨잡변』이다. 불씨란 곧 석가를 뜻하므로 『불씨잡변』이란 ‘석가의 잡소리’란 뜻이다. 한마디로 조선에서 잡소리를 없애야 조선이 제대로 갈 수 있다는 뜻이므로 조선에서 불교가 탄압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뜻이다.
태종 때 불교 종파를 11개에서 7개로 통합하고 다시 세종 때 선교(禪敎) 두 종파로 묶었다. 더불어 세종은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하는 한편 궁중의 내원당과 서울 주위 36개 사찰만 남기고 모두 폐해 버렸다. 특히 연산군 때는 선교양과(禪敎兩科)마저 폐지하는 등 철저하게 불교를 탄압했다.
그런데 국가의 이런 탄압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민간에서는 물론 왕실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것은 조선 왕가가 외부적으로는 불교를 경원했지만 실제로는 불교를 신앙했기 때문이다. 사실 외형적으로 세종처럼 불교를 탄압한 왕이 거의 없었지만 그는 말년에 내원당을 다시 지었고 세조는 원각사를 짖는 등 보다 적극적으로 불교를 보호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학자들은 세종이나 세조의 이런 조치들은 유학자들과 어느 정도 타협 속에 이루어진 것으로 설명한다.
문정왕후의 불교 진흥은 보우를 제외하고 설명할 수 없으므로 그의 이면을 약간 설명한다. 여하튼 처음 선종판사를 맡았던 보우는 양종 복립의 주모자로 지목되었고 문정왕후 사후 바로 유생들의 성토의 주적이 되어 제주도에서 유배도중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를 두고 김용대 박사는 신라의 불교 공인을 위해 흰 피를 쏟으며 죽은 이차돈에 이어 유교국가 조선에서 불교 재흥을 위해 노력하다가 목숨을 잃은 일종의 순교자라는 시각도 있다고 적었다.
그런데 보우는 기본이 승려이므로 보우가 지닌 도(道)의 깊고 낮음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보우가 불교계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은 선교일체론(禪敎一體論)을 주장하면서 선과 교가 다른 것이 아니라며 당시의 불교관을 바로 잡았다는 점이다. 또한 그는 일정설(一正說)로 불교와 유교의 융합을 강조했는데 이는 그가 유교와의 공존을 도모했음을 뜻한다.
보우의 제자 태균이 보우의 문집 『허응당집』과 『나암잡서』를 편찬하였는데, 『나암잡서』의 교정은 사명대사 유정이 맡아 보았다. 그런데 『나암잡서』를 보면 보우가 『대승기론』, 『화엄경』등 교학에 정통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보우는 선종보다는 화엄 교종에 더 가까웠지만 양자의 조화를 추구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우가 불교계에 상당한 혁신을 갖고 왔지만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곧바로 혁파되었다. 명종은 모후의 유훈을 들어 폐지를 거부하였지만 유생들의 상소가 잇다르자 결국 이를 수용한다.
문종왕후와 보우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양종의 일시적 재건은 조선시대 불교사의 전체 흐름 속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 사건이 된다. 도승 및 승과의 재개를 통해 불교의 인적기반 확대 및 재생산, 교단의 조직화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중종대에 단행된 법제적 폐불 및 정책상의 방임의 결과 제도권 밖에서 명맥을 잇던 불교계는 이 시기에 승려의 자격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더욱이 성종대인 1470년대에 도첩 시행이 일시 중단되면서부터 ‘역승급패’와 같은 예외적 상황을 제외하고는 거의 두 세대 이상에 걸쳐 도첩이 새로 발급되지 않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는 더 이상 공인된 승려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 폐불의 위기였는데 공식적 승려 자격이 대규모로 허용되어 불교의 존립과 안정적 계승을 위한 기반이 조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승과를 통해 주지나 승직을 제수 받은 휴정, 유정과 같은 고승들이 부상하면서 이들이 양종 혁파 후에도 불교계를 주도하고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즉 16세기 후반의 불교계는 학습과 저술, 교육에 매진하였고 불서 간행 등 각종 불사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명종의 뒤를 이은 선조대는 율곡 이이 등 다수의 명현들이 대거 등장하고 사림이 정국의 주도권을 쥐면서 붕당정치가 시작되는 등 조선이 본격적인 유교사회로 접어든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상황을 반영하여 선조는 불교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말을 한다.
‘다스리는 도를 융성하게 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한다면 우리 도가 쇠하고 이단이 성할 것은 걱정할 것도 없다. 어찌 구구하게 강론하여 마치 위의 태무제가 사문을 죽이고 사찰을 헐어버린 것처럼 해야 되겠는가.'
한마디로 불교에 대한 억제가 아닌 방임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는 선조의 유교의 정착에 따른 자신감과 불교에 대한 호의가 덧붙여져 선조대에는 불교를 더 이상 억압하지 않고 방임해 두는 정책 기조가 확고히 굳어졌다는 것이다. 유교 국가에서 불교가 더 이상 탄압받지 않고 나름대로 조선에서 역할할 수 있게 되는 큰 근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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