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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 답사 (57) : 제3구역 태강릉(5)

Que sais 2021. 6. 29. 10:02

https://youtu.be/JVjSrO6ckBo

 강릉(康陵)

강릉중종과 문정왕후 윤씨의 차남으로 조선 왕조 제13대 왕인 명종(15341567)과 그의 비 인순왕후(15321575) 심씨의 능이다. 후사 없이 죽은 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왕으로 등극된 후부터 8년간 문정왕후 윤씨섭정을 하였고 155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친정을 하였지만 외척인 윤원형, 윤원로 등에 의해 정사가 좌지우지되면서 혼란을 겪었다.

인순왕후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의 딸로 1543경원대군(명종)과 가례를 올리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다. 명종이 죽은 후 선조가 즉위하자 잠시 수렴청정을 했다. 1569(선조 2)의성(懿聖)의 존호가 진상되었다.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를 일찍 잃고 이복 조카인 하성군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사망하였다.

 

성종 때 싹튼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의 대립은 연산군 대의 무오사화·갑자사화, 중종대의 기묘사화로 나타나면서 단순한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의 대립 차원을 넘어 양반관료층의 분열과 권력투쟁으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명종의 즉위는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으므로 조선왕조시대의 격변기를 심층적으로 겪은 사람이다.

중종의 첫 번째 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 소생의 세자 (, 인종)를 왕위에 앉히려는 외척 윤임 일파의 대윤(大尹), 문정왕후 소생의 세자 을 즉위시키려는 윤원형 일파의 소윤(小尹) 사이에서 왕위계승을 둘러싼 암투는 중종 말년부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결국 인종이 우여곡절을 겪고 즉위하자 윤임 일파가 권력을 장악하며 이언적(李彦迪) 사림들이 정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1545인종이 병으로 죽고, 명종 12의 나이로 즉위하여 문정왕후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외척인 윤원형 일파의 소윤이 권력을 장악하여 대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을사사화가 그 일환으로 이 부분은 문정왕후 태릉의 장에서 설명했다. 여하튼 을사사화 이후에도 반대파에 대한 숙청이 계속되어 6년 동안 1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었을 정도다. 당시의 정황을 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모비청정(聽政)하게 됐으므로 정치가 외가에 의해 좌우됐다. 그리하여 뭇 간인(奸人)득세하여 선량한 신하들이 많이 귀양 또는 살해되었으므로 주상의 형세외롭고 위태로웠다.’

 

소위 당파싸움의 폐해를 잘 알고 있는 명종은 친정을 하면서 외척견제하고 고른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워낙 깊숙이 박혀 있던 기득권 세력의 견제 뜻을 이루지 못했고 정치는 더욱 문란해져 파쟁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정치가 문란해져 민생이 어려워지자 양주지방의 백정 출신인 임꺽정(林巨正)이 의적을 자처하며 1559년부터 1562년 사이에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횡행하면서 이름을 날렸다.

임꺽정의 반란 3년이나 지속되었는데 이는 조선왕조의 역대 반란 가운데서도 상당히 장기적인 경우다. 위계가 철저한 조선시대임에도 백정의 반란이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당대의 정황이 도적이 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열악했기 때문이다. 명종실록에 이 당시의 상황이 비교적 정확하게 적혀있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오늘날 재상들의 탐오한 풍습이 한이 없기 때문에 수령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권력자들을 섬겨야 하므로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한마디로 당시의 집권자들이 정치만 잘했다면 임꺽정의 난이 일어날 리 없다는 말이다. 임꺽정이 출현할 당시 황해도 지역은 극심한 흉년과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할 정도라고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난과 전염병으로 쪼들린 농민들은 살 곳을 잃고 떠돌아 다니다가 도적이 되는 것이 기본 수순이었다.

임꺽정의 활동 무대는 처음에는 구월산·서흥산간지대였으나 따르는 무리들이 많아지면서 평안도와 강원도, 안성경기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어 갔다. 임꺽정의 무리들이 계속 증가한 것은 약탈 대상이 이른바 부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관청이나 양반, 토호의 집습격하여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인 재물을 가져갔고, 심지어 과감하게 관청을 습격하기도 했다. 임꺽정이 일개 좀도둑이 아닌 농민저항 수준의 반란군으로 민중들이 임꺽정을 비호한 것은 그가 단순한 도적떼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명종은 이들을 반적(叛敵)이라 부르며 토벌을 명령했지만 임꺽정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조선 땅을 떠들썩하게 했던 임꺽정의 난이 진압된 것은 1562 1, 토포사 남치근(南致勤)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서였다. 이때 임꺽정의 무리로 관군에 체포된 서림(徐林)이 길잡이로 나서 결국 임꺽정은 부상을 당하고 체포되었다.

임꺽정의 체취가 남아있는 곳이 강원도 철원군 고석정이다.

고석정 한탄강 변에 있는 정자. 세운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 고려 충숙왕(재위 12941339)이 여기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그 외에도 고려 승려 무외(無畏)고석정기와 김량경의 시 등이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임꺽정이 고석정 앞에 솟아 있는 고석바위의 큰 구멍 안에 숨어 지내면서 조공물(朝貢物)을 탈취하여 빈민을 구제했다고도 하는데 이 바위에는 성지, 도력이 새겨져 있고 구멍 안의 벽면에는 유명대, 본읍금만이라고 새겨 있다. 현재 2층 정자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져 1971 콘크리트새로 지은 것이다. 현재 고석정관광지로 개발되어 뱃놀이낚시터로 알려져 있으며 임꺽정 동상이 입구에 있다.

임꺽정의 난이 진정되었지만 우환은 계속된다. 삼포왜란 이래 세견선(歲遣船, 일종의 무역선)의 감소로 곤란을 받아온 왜인들이 1555년 배 60여 척을 이끌고 전라도에 침입하는 을묘왜변을 일으킨 것도 명종의 치세 동안이다. 조선의 정황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명종이 친정하면서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인재 등용이다. 그는 인재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가가 인재를 등용함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중략) 수령될 인물자상한 사람으로 십분 가려서 주의하고 시종이나 감찰이 될 간원들은 더욱 별도로 택해 주의해야 한다. 외방 수령 중에 명망이 있어 쓸 만한 사람이라 문신 및 정현직을 역임했던 사람으로서 하자가 없는 자라면 아울러 청빈에 주의하라.’

 

명종이 매료된 인물이 바로 퇴계 이황이다. 당대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퇴계와 같은 인물이 더욱 필요할 때인데 퇴계병을 칭하며 관직에서 물러나 경상도 지방에서 은거할 때다. 명종은 여러 번 사람을 보내 이황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를 썼지만 이황은 여러 가지 이유로 명종의 부름을 사양했다. 끝끝내 이황의 명종의 부름에 응하지 않자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독서당에 문신들을 모아 놓고 초현부지탄(招賢不至灘, 어진 이를 불러도 오지 않으니 한탄스럽다)’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게 했다.

명종개인적인 불행도 계속되었다. 1563순회세자를 잃고 2년 뒤 어머니 문정왕후마저 세상을 뜨자 병약했던 명종은 병을 얻어 1567경복궁 양심당에서 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종영조(52), 숙종(46), 고종(44), 선조(41), 순조(34), 세종(32), 인조(26), 성종(25), 정조(24)에 이어 22년이라는 장기간 왕위에 있었지만 명종이 사망할 때의 나이는 겨우 34였다.

 

강릉의 참도는 조선왕릉의 여타 참도와 다소 다르다. 참도 자체가 매우 넓은 것은 물론 좌측 신도는 약 30센티미터, 우측 어도는 약 15센티미터 높게 시공되어 있다. 또한 정자각의 월대로 오르는 계단은 일반적으로 3단인데 이곳은 한 단이 높아 신계와 어계 4이나 된다.

강릉은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마련한 쌍봉릉이며, 두 릉 모두 병풍석을 둘렀고 12칸의 난간석으로 연결되었다. 봉분의 봉토가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된 인석(引石)에 화문(花紋)을 장식한 것이 이색적이다. 대체로 태릉과 마찬가지로 설치되었으나 혼유석은 각각 설치했다. 상설제도에 의해 설치된 장명등, 망주석, 석호, 석마, 석양 등이 설치되어 있으며 보존 상태가 모두 양호하다. 문인 공간에 세워진 장명등은 조선 초기 건원릉(健元陵)과 헌릉(獻陵)을 본뜬 16세기 복고풍 장명등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화대(火臺)하대석(下臺石)보다 좁아지고 몸체 부분이 길어지는 이러한 형식의 장명등은 할아버지인 성종의 선릉(宣陵)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강릉의 문인석은 전체적으로 보아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크고, 목이 짧아 마치 머리가 양어깨 사이로 파고 들어간 것처럼 조각돼 있다. 복장복두를 쓰고 관복을 걸치고 두 손에는 ()을 쥐고 있다. 태릉과 마찬가지로 강릉의 문인석좌우에 따라 손의 위치가 달라진다. 태릉조각한 작가들이 강릉 조영에도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무인석좌우측이 서로 다르다. 둘 다 코에 붉은빛이 돌지만 좌측의 경우 투구와 안면 크기가 엇비슷한 반면, 우측은 투구가 작고 코가 둥글며 턱과 양쪽 볼이 튀어나와 묘한 인상을 준다. 신체 표현에서도 좌측 무인석은 팔꿈치에는 구름 문양, 등과 무릎 부분에는 비늘 문양을 새긴 반면, 우측 무인석은 띠가 생략된 가슴의 전면에 걸쳐 파도 문양을 조각했으며, 양어깨에는 귀면(鬼面)을 새기는 등 조각하기 어려운 화강암임에도 조각의 수준이 높다. 또한 석상을 받치고 있는 고석은 많이 퇴화되기는 했으나 나어두(羅魚頭) 문양이 남다르게 볼륨감이 느껴질만큼 굴곡 깊게 새겨 놓았다. 강릉원형 보존을 위해서 그동안 일반인에게는 공개되지 않았는데 2013 1 1일부터 공개하고 있다.

 

참고문헌 :

「③ 정희왕후, 탁효정, 법보신문, 2007.08.20.

16. 문정왕후, 탁효정, 법보신문, 2007.10.09.

[을 만나다·23]강릉 (13대 명종·인순왕후), 이민식, 경인일보, 2010.03.04

[을 만나다·24]태릉 (11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 이창환, 경인일보, 2010.03.11.

임꺽정, 정성희, 네이버캐스트, 2010.07.12

조선 왕실의 측천무후 50여 년간 국정 쥐락펴락, 이창환, 주간동아, 2010.08.02.

권신들 횡포와 국정 혼란 허수아비 왕권에 눈물, 이창환, 주간동아, 2010.08.23

문정왕후 비호로 조선 불교 기사회생, 김용대, 현대불교, 2015.12.11.

왕릉, 한국문원, 1995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이덕일 외, 김영사, 1999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0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 III, 국립문화재연구소, 2012

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답사기1 : 조선왕릉, 이종호, 북카라반,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