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조선왕릉 답사

조선 왕릉 답사 (55) : 제3구역 태강릉(3)

Que sais 2021. 6. 29. 10:00

https://youtu.be/newLvA3RRco

<유생들의 반격>

문정왕후불교에 대한 비호가 본격화되자 조선 유생들은 그녀가 수렴청정을 하고 있는 동안, 암탉이 수탉으로 바뀌었다고 비아냥대는 상소를 네 번이나 올렸고, 실록을 편찬한 사서들 또한 명종이 죽은 후 그녀가 명종에게 회초리를 때린 것 등을 비롯하여 아들에게 불선(不善)을 가르친 어머니라고 폄하했다.

 

그런데 암탉이 수탉으로 변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코미디다. 현대인이 과학적으로 암탉이 수탉으로 바뀐다는 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당대에 그런 상소가 올라간 것은 사실이다. 바로 그 내용이 심지어 명종실록 명종 6 2월에 나온다.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 것은 예사롭지 않은 변괴입니다. 옛날 (휘종(徽宗) 임영소(林靈素)를 받들었는데, 그때 부인이 남자로 변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 것도 어찌 이교(異敎)를 존중하고 양종설립한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듣기로는 중 보우는 불측하고 간사한 사람으로서 경문(經文)을 약간 해독하고 있으며 문사(文士) 정만종(鄭萬鍾)과 교유하면서 부처라고 자칭하고 있는데, 어리석은 백성들만 혹신하는 것이 아니라 정만종이 함경감사로 있을 적에 또한 보우에게 현혹되어 늘 관사에다 두고서 떠받드는 일에 있어 하지 않은 짓이 없었다고 하니, 함흥은 실로 보우자취를 드러낸 곳입니다. 그런데 재변이 마침 그곳에서 생겼으니, 어찌 그 사람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보우를 내쫓는다면 유생들은 부르지 않아도 저절로 올 것이고 하늘의 재변은 걱정하지 않아도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이런 유학자들의 악마 만들기 명종실록 명종 7 4월에도 등장한다.

 

‘오랫동안 폐지하였던 양종(兩宗)을 다시 세우고 또 중을 선발하는 구규(舊規)를 회복시켰기 때문에 중의 무리가 날로 번성하고 부처를 섬기는 것이 더욱 정성스러웠다. 이는 모두 요승 보우가 고혹(蠱惑)시킨 소치인 것이니, 재해가 겹치고 국사가 날로 잘못되어가는 것이 괴이한 것도 없다.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이다.’

 

재해가 자주 발생하고 국사가 잘못된 것은 모두 보우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보우 스님봉은사에서 은밀한 연애를 벌이기 위해 일부러 중종의 능봉은사 주변으로 이전했다는 이야기까지 나돌 정도였다. 한마디로 조선 유생들에게 있어서 그녀는 국모이기는커녕 가장 기피해야 할 금수(禽獸)만도 못한 인물이었다.

학자들이 현대에 들어와서도 그녀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조선조 최악의 왕비, 정부인의 아들을 죽인 사악한 계모, 친아들의 인생을 눈물 속으로 빠뜨린 어머니, 게다가 한술 더 떠 임진왜란의 직접적인 원인을 그녀에게서 찾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다.

그녀가 가장 크게 비난 받는 것은 정미사화, 을사사화를 일으켜 자신에게 반대하는 유생들을 숙청하고, 친아들 명종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중종의 정비 장경왕후가 낳은 인종을 독살했다는 것이다. 여러 야사(野史)에서는 인종이 요절한 이유로 문정왕후가 준 떡을 먹고 3일 뒤에 죽었다고 설명한다. 문정왕후의 행동인종을 정말로 독살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여하튼 전문 학자들이 입을 모아 악녀로 지목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문정왕후는 사실 삼종지도(三從之道)를 하늘의 이치로 따라야 했던 조선시대에 이단적인 인물이었다. 유교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조선시대에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 위해 그녀가 무자비하고,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조선시대에서 아무리 왕후라 하더라도 정당한 방법으로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열일곱의 나이로 중종의 후비로 간택됐을 당시, 이미 중종 주변에는 경빈 박씨, 희빈 홍씨, 창빈 안씨 왕의 총애를 받는 여인들이 즐비하게 버티고 있었다. 더불어 그녀가 뒤늦게 후일 명종이 되는 아들을 낳았지만 이미 장경왕후 소생의 아들인 인종이 세자로 책봉되었고 그는 성년(20)이 된 이후였다.

이때 추구한 방법은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정적들을 하나둘씩 제거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런데 인종이 재위에 오른 지 일 년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함으로써 그녀는 마침내 자신이 낳은 아들 명종국왕의 자리에 올려놓는데 성공했다.

을사사화를 일으켜 인종을 지지했던 김안로와 윤임 일파를 제거한 이후에도 문정왕후는 그녀의 수렴청정을 반대하는 유생들을 유배 보내거나 사사했다.

그런데 사화는 당대의 정치여건 상 불가피한 일이였다는 시각도 있지만 문정왕후가 유생들에게 욕을 먹은 결정적인 이유는 그녀가 불교를 깊이 신앙하다 못해 전대 왕들이 폐지했던 불교정책들을 모조리 되살려놓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유교보다 불교를 우위에 두었던 그녀의 정책들은 호불군주 세조조차도 해내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녀의 불교 옹호에 성리학을 목숨처럼 여기던 유생들이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리 만무다. 전국의 유생들이 끊임없이 상소를 올렸고, 성균관 유생들은 보따리를 싸서 집으로 돌아가는 시위를 벌였으며, 사간원사헌부홍문관에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불교를 배척하라는 상소가 이어졌다. 기록에 의하면 양종 부활을 철회하라는 상소가 무려 432, 보우를 제거해야 한다는 () 75회에 걸쳐 올라왔다.

자신에 대한 수많은 반대가 들어왔음에도 문정왕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불교중흥정책을 밀고 나갔다. 그녀의 호불정책조선 불교계에 엄청난 기폭제가 됐음은 물론이다.

현존하는 상당수 전통사찰의 사지에 명종대중수를 한 기록이 남아있다는 것은 그녀의 호불정책조선 불교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어내는데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음을 반증한다. 조정 대신들의 간섭이나 반대에도 아랑곳없이 자신의 의지대로 국가정책을 밀어붙인 그녀를 조선시대 유생들이 어떻게 평가했을 지는 불 보듯 뻔한 일로 그녀가 사망하자 명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윤씨는 천성이 극악스러웠고 문자를 알았다. 명종이 즉위한 뒤로는 그 아우 윤원형과 안팎에서 권세를 휘둘러 20 사이에 조정 정사가 어지러울 대로 어지러워지고 국맥(國脈)이 끊어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윤씨사직의 죄인이라고 할 만하다.’

 

<문정왕후의 공개적 불교 정책>

조선조에서 가장 특이한 사항은 유교 정신으로 똘똘뭉쳐 조선인의 모든 생활을 유교로 변모시켰는데 명종 때 즉 문정왕후공개적으로 불교를 내세웠다는 점이다.

 

허응당 보우(불교신문)

바로 보우의 등장이다. 명종 3(1548) 보우문정왕후에 의해 발탁되어 당시 불교의 총본산인 봉은사 주지로 부임하였다. 그가 주지가 된 후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당시 유생들이 마음대로 사원에 출입하여 횡포를 부리는 행위를 방지하는 것이다.

그는 문정왕후에게 건의하여 난동을 부린 유생 중 대표적인 황언징(黃言澄)을 처벌하고 사원 입구에 잡된 사람들이 들어올 수 없다고 ()을 붙였다. 명종실록에 이때의 조치 내용이 실려있다.

 

문정왕후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선왕의 능침(陵寢)에 대한 일은, 잡인들이 출입할 염려가 있기에 대내(大內)에서 적간하게 하였는데, 유생들이 몹시 소란을 피워 사찰 내의 전해 내려오던 많은 기물을 파손하였다고 한다대전의 법에 유생으로서 사찰에 오르면 거기에 해당하는 죄가 있으니 법에 의하여 죄를 주라. 그 중에서도 가장 심했던 황언징 식년(式年) 과거에 정거(停擧)시키라정인사(正因寺)는 덕종대왕의 능침사(陵寢寺)이고 회암사(檜岩寺)는 태종대왕의 능침사인데, 유생들이 난입하여 소란을 피워서야 되겠는가봉은(奉恩봉선(奉先) 두 사찰의 예와 같이 ()을 걸어 금하라.’

 

당시 유생의 행동이 매우 심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보우는 이어 명종 5(1550) 선교 양종부활시키는 비망기를 내리게 한다. 연산군중종반정으로 무너진 이후에도 선교 양종을 폐지한 조치만은 그대로 두었기 때문이다.

이들 조치에 따라 봉은사선종의 본사가 되고 봉선사교종의 본사로 지정되었다. 보우선종을 총괄하는 판선종사도대선사 봉은사 주지가 되었다.

이어서 도승시(度僧試)가 실시되어 승려의 도첩(度牒) 제도가 부활되었고 불과 2년 동안 승려 4,000여 명을 뽑았다. 또한 승려들의 과거시험인 승과(僧科)가 부활되었는데 이것이 승려들의 자질을 향상시켰고 임진왜란 때 커다란 공적을 세우는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등장하는 요인이 된다.

 

회암사 온돌 유적

보우는 이어서 불교의 숙원회암사 중창을 마치고 낙성식을 겸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개최했다. 회암사에서 무차대회가 대단히 중요한 것은 태조 이성계의 스승인 무학대사가 거처했던 곳인데다 태조가 왕위를 물려준 후 수도생활을 한 사찰로도 유명하기 때문이다.

회암사의 중창은 무려 13년이나 걸릴 정도로 대역사였다. 그동안 유신들이 거듭 상소를 올려 회암사 중창반대하고 주지를 처벌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정희왕후한명희와 결탁하여 월산대군의 동생성종을 왕으로 지목할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이 있었으므로 회암사는 보호받을 수 있었다. 이후 연산군이 강력한 배불정책을 추진하여 도성 내 대부분의 사찰들이 철거되었고 회암사의 승려들도 도성 출입이 금지될 정도로 그 세가 약화되어 겨우 명목만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보우회암사에서 무차대회를 개최한 것은 왕실 차원에서 불교를 적극 보호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상징이라 볼 수 있다. 유교를 기치로 걸고 태어난 조선에서 문정왕후와 보우가 주도한 불교중흥책은 유학자들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하였음은 물론이다.

유학자들로 볼 때 불교의 중흥을 꾀하는 보우는 그 자체로 요승(妖僧)이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보우의 처신이 조선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에 도전하는 국시(國是) 위반책으로 보았다.

당대의 식자들이 불교 중흥결사적으로 반대한 것은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 즉 왕실의 적극적인 지지하에 불교를 앞세운다면 자칫 조선 백성들이 불교 중흥책을 지지하고 나설지 모른다는 것이다. 유교를 모토로 한 조선 정부의 정책 자체에 첩첩 산중으로 문제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므로 언제 백성들의 생각이 바뀔지도 모를 일이다.

유교 정부에서 이런 불교 중흥책을 꾀하는 보우천하의 악마였다. 그러므로 조선에서 일어나는 모든 천연재해보우의 탓으로 돌렸다. 심지어 암탉이 수탉으로 변했다며 보우의 처벌을 요청했다. 이들의 악마 만들기는 당시 유학자들 중 보우를 비판한 인사는 군자이고 그에 대한 침묵하는 자는 소인이라는 것으로까지 치부되었다. 보우를 천대하면 군자이고 보우를 우대하면 소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우를 비판한 일개 서리(胥吏)조차 영웅화할 정도다.

무엇이든 대항세력이 없는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하기 마련이다. 학자들이 아쉬워하는 것은 유교와 불교가 서로 경쟁하면서 세를 넓혀갔다면 조선의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견제세력이 서로의 부패를 방지하면서 백성들의 마음을 잡으려고 노력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유학자들은 끝내 불교와의 공존을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