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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 답사 (72) : 제3구역 선정릉(3)

Que sais 2021. 6. 29. 10:30

https://youtu.be/2ufB4Rg0O28

 정릉(靖陵)

11대 중종(14881544)의 능인 정릉선릉에서는 다소 다리품을 팔아야할 정도로 떨어진 곳에 있으므로 선릉과는 달리 사람들의 방문이 많지 않아 고요한 곳에 위치한다. 그러나 능역의 경계를 벗어나면 강남 중심부답게 주위가 매우 번화하여 묘한 대비를 이룬다.

중종조선왕조의 치부를 가장 적나라하게 노출시킨 왕으로 사극에서 자주 나오는 주인공 중의 한 명 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 유명한 중종정릉에 묻혀 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중종은 그야말로 격변기의 왕이다. 성종 19(1488)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태어나 진성대군에 봉해졌는데 1506박원종 등이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폐위시키고 13인 그를 으로 추대했다. 중종이 졸지에 으로 등극하게 된 중종반정을 보자.

반정을 주도한 사람은 성희안으로 그는 반정에 성공하자 형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영의정에 오른 사람이다. 성희안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자문을 많이 구할 정도로 학문에 조예가 깊었는데 연산군망원정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을 때 평소 왕의 방탕과 폭정불만을 품고 있었다. 문제는 그가 연산군의 행동을 보고 분을 참지 못하고 풍자적이고 훈계적인 를 지어 올렸는데 이것이 연산군의 미움을 산 것이다. 그런데 연산군의 행동이 놀라웠다. 당시 이조참판 겸 부총관(副摠官)이었던 성희안연산군9품 무관부사용이라는 관직으로 임명한 것이다. 말이 9품 무관이지 현대로 치면 장군에서 일등병 정도로 강등한 것인데 이런 조치에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후 성희안박원종을 만나 반정을 모의한다. 1506 9 1 훈련원에 무사들을 결집시킨 박원종·성희안·신윤무 등은 창덕궁 어귀의 하마비동에서 영의정 유순, 우의정 김수동 등을 만나 경복궁에 있는 성종의 계비이며 진성대군의 어머니대비 윤씨에게로 가서 거사의 사실을 알렸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대비신료들의 요청이 계속되자 연산군 폐위와 진성대군의 추대허락하는 교지를 내렸다.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바로 이것이다. 연산군이 설사 문제점을 일으켰다 하더라도 공식적으로 한 나라의 왕으로 국가의 전권을 갖고 있는데 대비왕을 폐위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결론은 그것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조선왕조의 단점이자 장점수렴청정이라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하면 당대에 대비 등의 파워가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다. 연산군의 실패는 바로 그런 조선왕조의 구조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으로도 귀결된다.

대비의 교지를 받은 반정 주도세력들은 먼저 권신·임사홍·신수근연산군의 측근죽인 다음 궁궐을 에워싸고 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했다. 다음날인 9 2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경복궁에 들어가서 연산군에게 옥새를 내놓을 것을 요구한다. 사태의 심각성을 안 연산군옥새내줬고, 반정군의 호위를 받으며 경복궁에 도착한 진성대군대비의 교지에 힘입어 조선 11대 왕 중종으로 등극한다.

졸지에 왕이 된 중종이지만 연산군 때의 여러 가지 폐정을 잘 알고 있으므로 개혁하기 위해 홍문관을 강화하고 유교적 도덕규범향악을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등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의도대로 정국이 돌아가지 않았다. 조광조를 내세워 철인군주정치를 표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고 사림파를 등용했으나, 과격한 개혁정치가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당파 논쟁이 끊이지 않아 기묘사화(1519)가 일어난 것은 물론 삼포왜란, 북방 국경지대의 야인들이 번번히 국경을 침략하는 등 분쟁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중종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실사에 대해서는 여러 곳에서 설명했으므로 이곳에서는 4대사화 중 하나인 기묘사화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설명한다. 기묘사화는 이후 조선 정치사에서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연산군을 무너트린 중종반정이 생각보다 수월하게 성공하자 대규모의 포상이 이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반정 직후 104정국(靖國)공신책봉되었고 반정의 핵심인 박원종·성희안·유순정 등이 중종 초반의 국정을 주도했고 중종4(1509)에는 이들이 삼정승을 모두 장악하면서 정점에 도달했다.

이런 편중된 권력비난이 쏟아졌는데 가장 중요한 원인정국공신과도한 책봉이었다. 100명을 넘는 인원에게 상을 주다보니 반정에서 별다른 공로도 없는 사람이나 연산군에게 깊이 협력했던 사람들도 다수 포함되었는데 이를 조선시대 언론을 담당한 사헌부·사간원·홍문관삼사(三司)가 가만있지를 않았다. 그들은 반정의 핵심들을 직접 거론하면서 탄핵을 주도했는데 그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조광조(趙光祖). 당시 반정중신으로서 조광조 등의 탄핵을 받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였다.

 

한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 중 한 명인 조광조개국공신 조온(趙溫) 5대손으로 탄탄한 배경을 가진 가문 출신이다. 그는 중종10(1515), 34의 다소 늦은 나이로 중앙 조정등장했지만, 조선의 역사에서 유례없이 빠른 승진을 거듭하면서 조선왕조에서 누적된 여러 현안을 원론적인 면부터 개혁하고자 했지만 겨우 4년 만에 기묘사화로 일거에 숙청되는 비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조광조를 비롯한 삼사인물은 대부분 30의 상당히 젊은 신진 관원으로 현실 세계복잡한 변수융통성 있게 처신하기 보다는 원칙과 이상에 입각해 엄정하게 비판하는데 앞장섰다. 결론을 말하자면 그들은 근본적인 개혁을 추구했지만, 현실 정치의 장벽에 부딪쳐 결국 좌절한 것이 기묘사화.

처음에 조광조 등이 삼사를 장악해 강력한 개혁추진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동력중종의 확고한 신임이었다. 특히 중종조광조를 철저히 신봉하여 등용한 지 2년 반만에 당상관으로 올리는 등 파격적으로 승진시켰다. 그러나 빨리 달궈지는 쇠가 빨리 식는다는 말처럼 이들 간의 관계급격히 무너졌는데 이 면에는 조광조의 실수도 어느 정도 작용한다.

조광조 등은 왕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원을 배경으로 그동안 조선왕조에서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민감한 문제들을 전광석화와 같은 대안으로 단시간에 근본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문제는 조광조공격당할 빌미제공했다는 점이다. 조광조가 강조한 현량과(賢良科)의 부작용이다.

현량과의 기본 취지는 나쁜 것이 아니다. 현량과사장(詞章)에만 치중하는 과거제도의 폐단을 극복한다는 취지에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한 뒤 간단한 시험으로 관리를 뽑는 제도였다. 그런데 막상 중종 14(1519) 현량과가 시행되어 김식 등 28명이 선발되었는데 이들 모두 조광조와 연관되는 기묘사림(조광조에 의해 등용되고 그를 따르다 조광조와 함께 실각한 사림의 무리를 뜻함)일원이었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은 공정성을 기치로 삼은 조광조개혁세력도 결국은 당파적이라는 비난을 잠재울 수 없었다.

 

<조광조의 패착>

사화가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원인조광조 등이 중점적인 개혁의 일환으로 내건 정국공신들을 대상으로 한 삭훈(削勳)이다. 당시 대사헌인 조광조, 대사간 이성동 등은 중종반정공신 가운데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많으므로 왕권강화를 위해서라도 기존 세력을 무너뜨릴 수 있는 묘안으로 삭훈을 밀어 부쳤다. 문제는 이 안이 워낙 급진적이므로 대신들은 물론 중종조차 강력히 반대했지만 조광조귀양을 가거나 죽더라도 달게 받아들이겠으니 조속히 윤허해 달라고 주청했다.

결국 기묘사림중종의 윤허를 얻어냄으로써 정국공신 중 76(72%) 공신호삭퇴되고 토지와 노비마저 환수토록 했다. 기묘사림은 이 조처로 결정적인 승기를 잡은 듯 했다. 그런데 고작 나흘 뒤 전격적으로 사화가 일어났다. 한마디로 결정적인 승리가 아니라 기묘사림의 결정적 패배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반전이 일어난 것은 조광조신진세력중종의 신뢰는 얻었지만 정국공신을 중심으로 한 대신들의 마음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위 기득권 세력들은 현량과기묘사림이 대거 진출하여 입지가 불안한 상태에서 설상가상 이어진 삭훈으로 자신들의 현실적 기반이 무너지자 자구책을 강구하려고 했다. 신하들의 자구책이란 중종으로서는 악몽과 다름없었다. 한마디로 자신이 왕이 된 것과 유사한 반정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뜻으로 중종의 급선무는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다. 중종으로서는 개혁도 중요하지만 왕위를 보존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므로 이들과 타협안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주요 대신들이 정국이 요동치는 불안의 원인을 근원적으로 제거국정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역설하자 중종은 지체없이 사화를 재가했다. 중종의 재가가 떨어지자마자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사림의 주요 인물을 전격적으로 하옥시켰다. 그들의 죄목당파를 만들어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은 천거하고 그렇지 않은 부류는 배척했으며, 서로 연합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국정을 어지럽혔다는 것이었다. 현량과기묘사림이 대거 등장한 것이 궁극적으로 개혁이 아니라 조광조 파를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으로 결국 조광조는 한 달 후 사사되고 사림 세력들은 유배되었고 조광조에 동정적이던 정광필과 김전 등도 좌천되었다. 반면에 삭훈되었던 정국공신은 원래대로 회복되면서 사화일단락되었다. 결론을 말한다면 조광조가 실패하게 된 요인은 근본적으로 도덕적 이념의 구현표방했지만, 그 방법으로 현실 정치의 구태를 답습하여 기존 세력들이 공격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고 절대적인 지원군인 중종의 문제점간과했다는 점이다.

반정으로 왕이 된 중종으로서는 또 다른 반정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조광조사림세력목적과 뜻만 좋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중종의 승낙만 있으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중종으로서는 자신을 상대로 한 반정으로 어렵사리 얻은 왕에서 쫓겨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광조 등이 중종의 약점과 고민을 미쳐 생각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왕조에서 정치적 혼란기를 맞이한 중종이지만 사회면에서는 유교주의 도덕윤리가 정착되어감에 따라 소학, 속상감행실도, 이륜행실도 등을 간행해 국민 교화에 힘썼다. 특히 백운동서원을 세운 주세붕풍기군수에 제수하였고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영은문을 세우는 등 유교주의적 도덕 윤리정착시켜 나갔다.

중종의 문화 업적 중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주자도감을 설치해 많은 동활자주조하여 인쇄술 발달기여하였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당시 사회에 긴요하게 요청되던 각종 서적의 출간이 활발해져 사성통해, 속동문선,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이 간행되었다. 특히 국정운영을 위해 경국대전, 대전속록 등을 편찬했다. 중종 연간은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시점으로 신진사림과 훈구파의 대립이라는 정치적인 모순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사회문화적으로 제도가 완비되고 조선 성리학의 기틀이 정착되어 가던 중요한 시기이기도 했다.